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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63)화 (63/110)
  • 63화

    알렉시스는 상자를 열어 옷을 살펴보는 캐슬린을 건너보았다. 정리는 하녀에게 맡기라고 해도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안에 든 것이 정말 제 몫으로 산 게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죄다 산 지 오래된 것들이야.”

    “알고 있어요.”

    화가 난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알렉시스는 계속 옷더미로 뛰어들려는 루치를 붙잡아 들며 말했다.

    “다 내버릴 것들인데 굳이 정리할 필요 없어.”

    그러자 상자 뚜껑을 덮은 캐슬린이 돌아보았다.

    “왜 버린다는 말씀이세요?”

    “그거야 낡았으니까. 새 옷도 아닌데 굳이 들여놓을 필요 없잖아.”

    “제 거라면서요. 그럼 제가 어찌하든 상관없는 것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어차피 그녀를 위해 마련한 것들이니 갖겠다면 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지만, 낡은 옷을 입게 하고 싶진 않았다. 아무래도 저번에 예복을 맞춘 곳에서 새로 싹 다시 주문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것도 마련해야겠군.’

    알렉시스는 바둥거리는 루치를 잡아 무릎에 앉히면서 생각했다. 신탁에 따르면 황제가 죽은 후 산발적인 지진이 일 것이다. 그때 캐슬린에 이어 아이도 안전한 곳에 머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공작님. 왜 지방 영지마다 옷을 준비해 두셨나요?”

    허를 찌르는 질문에 일순 말문이 막혔으나 그는 빠르게 둘러댔다.

    “영지를 순회할 때 필요할 테니까.”

    “저도 데려가실 생각이셨어요?”

    “……마이어 저택 관리에 익숙해지면 영지 관리도 신경 써야 할 때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남성 황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금, 황제가 죽은 후 제 목숨이 끊어질 위험에 처하면 마이어까지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고 그때를 대비해 최대한 변방의 영지에 대피할 곳을 마련하고 있었다고 밝히기는 일렀다. 알렉시스는 그 말을 듣고서도 캐슬린이 떠나지 않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저보다 페터를 더 신뢰했다. 언제고 그가 황궁으로 쳐들어가 황제와 황후를 무너뜨리려면 페터와는 맞설 수밖에 없는데, 그때 그녀가 페터가 아닌 제 옆에 남아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알렉시스는 캐슬린이 저를 조금만 더 믿게 되면 모든 것을 고백할 생각이었다.

    황궁의 말로는 어차피 황제가 몇 년은 더 살 거라고 했으니 아직 시간은 있었다.

    “아이가 좀 더 크면 지방 영지에 내려가서 여름을 보내자.”

    농담처럼 건넨 말에 캐슬린은 대답이 없었다. 기쁜 내색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부의 의사를 내비치지도 않았다. 알렉시스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는 에밀리에게 손짓해 루치를 안겨 주며 말했다.

    “이만 가 봐야겠군. 식사 시간에 봐.”

    그는 캐슬린에게서 거절의 답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침실을 빠져나왔다.

    정부를 두었다는 예전의 오해가 풀린 뒤로 그녀의 태도가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안심할 순 없었다. 알렉시스는 그녀가 저를 밀어내거나 실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놈은 아직 소식이 없는 건가.’

    다행히 아직 캐슬린에게 접촉한 정황은 없었으나, 결국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른 욕심이 있다는 뜻이다.

    알렉시스의 입술 끝이 묘하게 비틀어졌다.

    ‘몸 성하게 내보내 준 값은 하겠지.’

    집무실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마이어에만 머무른 지 한참이라 지방 영지에서 올라온 보고서가 많았다. 내일 황태자의 성인식에 참석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일을 해 둬야 했다.

    ‘죽지 않을 수 있을까.’

    문득 든 생각에, 바쁘게 영지 경영에 관한 보고서를 검토하고 서명란을 바쁘게 오가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알량한 목숨 따위를 부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될 줄 몰랐다. 지금까지는 죽든 말든 상관없었는데 이제는 달라졌다.

    ‘안 된다면 조금이라도 늦게 죽을 방법은.’

    혈관에 흐르는 소량의 독은 지금은 잠잠한 상태지만 언제 또 날뛸지 몰랐다. 전장에서 돌아왔을 때부터 흐르는 피가 굳어 심장이 박동을 멈출 때를 고대했었다. 그리하여 황제와 황후가 모친처럼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았다.

    그런데 미련이 생겼다. 캐슬린만은 이 졸렬한 욕망을 모른 채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우스운 미련이.

    그는 상념을 지우며 서명을 계속했다.

    조금만 더 기다릴 생각이었다. 이전처럼 절 다시 봐 주게 되면 모든 사실을 고백해도 떠나지 않을 거고, 그때 아이와 함께 마이어를 떠나 안전할 수 있을 것이다.

    대충 급한 일을 마무리하고 나자 저녁때가 되었다. 아직 식사가 준비되기엔 일렀지만, 요즘 아이는 부쩍 활동량이 늘어 자주 배고파하는 터라 먼저 식사하곤 했으니 캐슬린은 일찍 내려와 있을지도 몰랐다.

    “주인님, 오셨어요?”

    다이닝 룸에 들어서자 루치를 아기 의자에 앉히고 있던 에밀리가 인사했다. 둘러보았지만 캐슬린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누구를 찾는지 눈치챈 에밀리가 얼른 덧붙였다.

    “마님은 며칠 후 입고 가실 입궁 예복 준비 때문에 늦으실 것 같아 도련님과 먼저 내려왔어요. 바로 식사 준비하도록 이르겠습니다.”

    루치는 이유식을 끝내고 단단한 음식을 먹는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들었는데, 테이블에는 아직 수프 한 접시만 놓여 있었다. 뜨거운 김이 오르는 수프는 아이가 먹기 좋도록 적당히 식을 때까지 기다리는 중인 듯했다.

    그게 불만스러운지 루치는 스푼을 잡고 이리저리 흔드는 중이었다. 알렉시스는 아이의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됐다. 기다리지. 아이 식사나 마저 내오도록.”

    “네, 주인님.”

    에밀리가 막 돌아서는데 스푼을 가지고 장난을 치던 아이가 팔을 뻗어 테이블 위의 그릇을 건드렸다. 김 오르는 뜨거운 수프 그릇이 기우뚱하며 쏟아지자마자 알렉시스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맨손으로 그것을 잡았다.

    “주인님!”

    에밀리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알렉시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릇을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놓고 아기 의자를 테이블로부터 멀찍이 밀어 놓았다.

    “애가 다치지는 않았나?”

    손바닥에 뜨거운 수프가 쏟아져서 화끈거리긴 했으나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에밀리가 손수건을 가져와 닦아 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 도련님은 괜찮으신데 주인님 손이…… 카벨 선생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에밀리가 뛰쳐나간 후 살펴보니 오른손이 붉어져 물집이 잡히고 있었다.

    이 정도야 다친 거라고 보기도 어려웠지만, 내일 황궁에 가야 하니 붕대는 감아야 할 터였다. 황후가 만족스러워할 것을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으나 아이가 다치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저야 이런 상처에 이골이 날 정도지만 저만한 아이에겐 아닐 테니까.

    루치는 영문도 모르고 배고프다는 듯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알렉시스가 아이를 한쪽 팔로 안아 들었을 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돌아보니 캐슬린이 들어서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의 시선이 알렉시스의 손과 난장판이 된 테이블을 향했다.

    “애는 안 다쳤어.”

    걱정할까 싶어 말했는데 캐슬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테이블의 화병에서 꽃을 빼고 내밀었다.

    알렉시스가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자 그녀가 물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알렉시스는 아까와 달리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화를 내고 있었다.

    수프가 묻은 손으로 아이를 만져서 그런 건가 싶어 돌아봤지만 아이의 옷은 깨끗했다. 왜 그런지 물으려는데 캐슬린이 다소 거칠게 그의 손을 끌어당겨 화병의 물을 부었다. 찬물이 쏟아지자 화끈거리던 기운이 조금 사그라졌다.

    아이가 다친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저를 붙잡은 손길은 마음에 들어서 잠자코 있었다.

    잠시 후 카벨 선생이 도착해 간단한 치료를 마쳤다. 예상처럼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에밀리, 루치는 위층으로 데려가서 먹이는 게 낫겠다.”

    에밀리는 즉시 루치를 안아 들고 데려갔다. 평소라면 직접 아이의 식사를 챙겼을 텐데 의외였다.

    캐슬린이 말없이 그를 돌아보았다. 정확히는 붕대가 친친 감겨 있는 그의 손으로 시선이 향했다.

    알렉시스는 식기를 왼손으로 바꿔 잡으며 말했다.

    “식사해. 배고프잖아.”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무슨 뜻이지?”

    “다쳤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잖아요.”

    말끝에 혼란이 묻어 있었다.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혈관에서 독이 날뛸 때 느껴지던 고통에 익숙해진 나머지 너무 태연했다. 다른 이들처럼 아픈 척이라도 해야 했던 걸까.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인간이라고 끔찍해하면 어쩌지.

    “아이가 다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는 말을 돌렸다.

    “그러니까 됐어.”

    아이가 다치면 캐슬린은 괴로워할 것이다. 뜨거운 수프가 손에 쏟아질 걸 알면서도 알렉시스가 망설이지 않은 이유는 그래서였다.

    그녀의 눈빛이 갈등하는 것처럼 흔들렸다. 식사하는 내내 무언가를 물으려다 그만두기도 했다. 알렉시스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식사가 끝난 후 침실로 향할 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캐슬린은, 계단 끝에 이르러서야 입을 열었다.

    “내일 연회에서 공작님의 손을 보면 떠드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그래도 후회하지 않으세요?”

    “안 해.”

    그는 짧게 답했다. 망설이는 흰 손을 단번에 잡아서 입술을 누르고는 덧붙였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난 상관없어.”

    그녀는 움찔 떨었을 뿐 잡힌 손을 빼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기묘한 흥분에 휩싸였다.

    캐슬린은 저를 걱정해서 화를 낸 걸지도 모른다.

    그 사실에 미친놈처럼 기분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저를 걱정만 해 준다면 이깟 화상쯤은 몇 번이고 더 입어도 괜찮았다.

    그는 다시 한번 손등에 느릿하게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그녀가 제 곁에서 매일 머물러 주기만 하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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