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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62)화 (62/110)
  • 62화

    공작으로서 평민들의 삶을 구제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캐슬린은 알렉시스 발텐이라는 사람이 그런 의무에 무감각한 사람이란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황족이나 고위 귀족인 그에게 요구되는 태도로 보면 그게 제일 이상적인 대답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굳이 그가 내어놓은 말이 그럴듯하게 꾸민 핑계일 가능성은 적었다.

    ‘노력.’

    순전히 제가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해서 평생 신경 쓰지 않던 기부에 구제 활동까지 했다는 말이었다.

    “이게 네가 날 돌아봐 줄 수 있는 명분이라도 되었으면 해.”

    전장에서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적군 선봉장의 목을 베어 넘겼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애걸하듯 제 대답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라도 할 수 있어. 황실 주관 보호 구역을 지원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공작령에 따로 보호소를 세울 수도 있고.”

    “정말 저 때문에 그런 일을 하시는 건가요?”

    “그래.”

    한밤중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 놀아 주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내라 소개하며 새로운 드레스를 선물하고, 전에는 관심도 두지 않던 구제 활동까지 따라 하는 알렉시스 발텐은 그녀에게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낯선 건,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그를 마주할 때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이었다.

    ‘정말 독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내게 마음이 있었는데 독 때문에 깨닫지 못했던 거라면?

    뒤늦게라도 잘못을 깨우치고 바뀌어 보고 싶은 거라면.

    다른 남자의 아이라는 걸 알면서도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릴 적 황후궁에서의 이야기와 신입 하녀였을 때의 그녀를 기억하던 이야기까지.

    믿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쳐들었다.

    캐슬린은 무의식중에 떠올린 생각에 제풀에 놀랐다. 그에 대한 미련을 모조리 지워 냈다고 여겼는데 아직도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조가 밀려들었다.

    “이, 이만 가 봐야겠어요.”

    그녀는 서두르며 그를 지나쳐 서재를 나왔다. 등 뒤에서 채 닫히지 않은 문이 다시 안쪽으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시스가 뒤쫓는 듯했다.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캐슬린은 거의 뛰다시피 해 계단으로 향했다.

    “아!”

    그러다 안쪽으로 큰 상자를 옮기던 하녀와 부딪혔다. 하녀의 손에서 상자가 굴러떨어지며 뚜껑이 벗겨지고 안에 든 것이 흘러나왔다. 여성 의복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마님! 제가 앞을 제대로 보고 다녔어야 하는데, 괜찮으세요?”

    “괜찮아.”

    다행히 상자가 비껴가서 다치지는 않았다. 떨어진 먼지를 대충 훑으며 지나치려던 찰나였다.

    붉은 카펫 위에 떨어진 장갑 하나가 눈에 띄었다. 흰 레이스가 정교한 사교용 장갑이었다.

    “저건…….”

    “아, 지방 영지에서 보관하던 물건들입니다. 집사님께서 살펴보시고 처분을 결정해야 하실 듯해서 가지고 가던 참이었어요.”

    그럼 영지에 숨겨 놓았다던 정부를 위해 마련한 의복일 텐데…….

    캐슬린은 허리를 굽혀 장갑을 주워 들었다. 손목 쪽에 발텐 가의 문양이 수놓여 있었다. 장갑을 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제국법상 지니는 물건에 가문의 문양을 새겨 소유할 수 있는 건 가문의 일원뿐이었다. 가문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그 물건을 지닐 순 없었다. 아무리 황실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발텐 가에서 이런 여성용 장갑을 착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공작 부인인 캐슬린을 제외하면.

    “……이거, 언제부터 보관하던 것인지 알고 있니?”

    “제가 들어오기 전부터라고 들었어요. 잠시만요.”

    하녀가 상자의 뚜껑을 주워 겉에 붙은 종이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4년 전이에요, 마님.”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울대가 뻣뻣해졌다. 캐슬린은 비틀거리는 다리에 겨우 힘을 주고 다가가 상자에 담긴 옷을 꺼내 살폈다.

    죄다 귀부인의 옷이었다. 비싸거나 화려하지는 않아도 적당히 입을 수 있는 사교용과 일상복이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문양이 새겨진 장갑은 여러 짝이었다.

    지금은 능력이 사용되지 않아 거의 착용하지 않지만, 이전에는 스스로 조절하기 어려워 밖에 나갈 때면 필수품처럼 늘 끼고 다니던 것이었다.

    막을 새도 없이 다시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다. 꺼낸 장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데 손목이 잡혔다.

    서재에서 뒤쫓아 나온 알렉시스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더니, 접힌 치맛단을 펴 주고 하녀를 돌아보았다.

    “물건을 떨어뜨렸으면 수습하지 않고 뭐 하나?”

    “아, 네! 죄송합니다, 주인님.”

    사나운 눈빛에 하녀가 허둥지둥 돌아다니며 바닥에 널린 옷가지를 주워 상자에 집어넣었다. 캐슬린은 입술을 깨물고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이리 줘.”

    알렉시스가 손을 내밀었다.

    “낡은 장갑이야.”

    치워 버릴 물건이니 내놓으란 소리였다. 모르는 척 건네주면 끝이다. 그는 설명할 생각도 없는 것 같으니까. 그러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나갈 수 있다. 다른 여자를 지방 영지에 숨겨 놓고 부인을 냉대한 과거는 좋은 이혼 사유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대로 아무렇지 않게…….

    그러나 혀끝에 맴도는 오래된 질문은 결국 가라앉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누구 거예요?”

    “뭐?”

    “예전에 장부를 봤어요. 지방 영지에 내려보낸 물품 중 여성 의복이 있더군요.”

    그녀는 장갑의 손목 부분에 새겨진 문양이 잘 보이도록 그에게 내밀었다.

    “제 거였나요?”

    “……….”

    “말씀해 주세요.”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의 대답이 긍정이면 어떡하지. 아니, 부정이면 어떡하지?

    들려올 대답이 어느 쪽이든 두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바라는 쪽이 있다면.

    “그래. 네 거야.”

    긍정이었다.

    “옷이든 장갑이든 장신구든 다 네 거였어.”

    캐슬린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왈칵 눈물이 났다.

    “캐슬린?”

    그가 당황한 듯 그녀의 어깨를 잡았으나 캐슬린은 원망을 쏟아 냈다.

    “왜 말해 주지 않았어요? 분명 제가 묻지 않았나요? 당신께 정부가 있다는 소문이 돈다고…… 그러니까 대답해 달라고 했는데…….”

    아니라면 그저 오해라고 말했으면 되었을 것을.

    “조건을 건 결혼이었으니까 말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나요?”

    알렉시스는 따져 묻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대답해요.”

    자꾸만 미끄러지는 손은 차마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캐슬린의 흐느낌을 가로채고 알렉시스가 말했다.

    “널 사랑하고 있는 줄 몰랐어.”

    그녀의 등을 가만히 쓰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널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가 오해하도록 내버려 뒀어. 이용하려면 그쪽이 더 편하다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아니야, 캐슬린. 내가 다 잘못했어. 정부 따위는 없어.”

    바스러지도록 힘주어 끌어안아 맞닿은 가슴에 심장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귓가에 속삭이듯 고백했다.

    “내 마음에 품은 건 너뿐이야.”

    유사시에 지방 영지에 내려가면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마련해 둔 것이며, 공작령의 모든 성에는 캐슬린 발텐의 물품을 구비해 두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원망과 서러움이 뒤섞여 눈물로 흘렀다. 모두 지워 버렸다고 생각했던 마음은 응어리가 되어 숨어 있었을 뿐, 어느덧 다시 드러나 버렸다. 알렉시스의 옷깃을 붙잡고 있던 흰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의 팔이 알렉시스의 등을 껴안았다. 화답하듯 안아 오는 그의 팔은 한때 그토록 바랐던 것처럼 따뜻했다.

    * * *

    계단 앞 대리석 바닥에서 주저앉아 한참을 울고 난 캐슬린은 진이 빠져 움직이지 못했다. 알렉시스는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긴 후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만 가세요.”

    잠겨 버린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얼굴도 엉망이겠지 싶어 그녀가 돌아누우려는데 알렉시스가 어깨를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돌아눕지 마. 네 얼굴 보고 싶으니까.”

    “쉬고 싶어요.”

    “이대로 쉬면 되잖아.”

    “……….”

    “내 꼴을 보기 싫은 건가?”

    “……….”

    “좋아. 그럼 쉴 수 있게 나갈게. 한 보름 정도면 괜찮아지겠어?”

    “……보름이라니요?”

    “네 눈앞에서 꺼지겠단 소리야.”

    그는 금방이라도 떠나 버릴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건 싫었다. 대화를 거절하고 돌아서던 기억이 떠올라 겁이 났다.

    엉겁결에 소맷자락을 붙잡았는데 그의 몸이 휘청하더니 제게로 무너졌다.

    “그건 싫어?”

    제 위에 올라탄 채 내려다보는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커다란 덩치에 갇힌 기분이 들어 덜컥 숨이 막혔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는 동안 그의 손이 뺨을 훑었다.

    “꺼지는 게 싫은데 왜 가라고 해.”

    뺨을 지나 귓불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묘하게 살갗에 열이 올랐다.

    “난 네가 하라는 대로 해 주고 싶은데, 그렇게 말했다가 또 멍청하게 알아들을 것 같아. 그러니까 제대로 말해 줘.”

    믿어도 되는 걸까.

    답은 이미 나와 있는데 자꾸만 되묻게 됐다. 처음 그를 떠났을 때부터 원했던 답이 있는데도 그랬다.

    “정말로 절 사랑하세요?”

    “그래.”

    조금의 의심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대답은 빨랐다.

    “이전의 날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은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알렉시스가 고개를 숙여 눈두덩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미안해.”

    그 말에 캐슬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었을 때보다 더 반응이 컸다.

    “분이 다 풀릴 때까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해도 돼.”

    그가 찬찬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내 옆에만 그대로 있어 준다면.”

    알렉시스는 그녀의 귓불을 뜨거운 손으로 매만졌다. 정말 그는 캐슬린이 뭘 원하든 그대로 해 줄 생각이었다. 저를 떠나 그 새끼와 함께하는 것만 아니라면.

    그래, 그것만 아니면 좋았다.

    그 결심을 되새기기라도 하듯 캐슬린의 귀에 매달려 있는 마정석 귀걸이가 희미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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