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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59)화 (59/110)
  • 59화

    분명히 처음은 그랬다. 캐슬린을 닮아서, 캐슬린의 아이여서 관심을 두었는데 자꾸 눈에 밟혔다.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처럼.

    알렉시스는 정원으로 향했다. 온기를 가진 작고 말랑한 생명체를 안고 있으니 불안감이 조금은 가시는 느낌이었다.

    “에취!”

    루치가 재채기를 하며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런. 추운가?”

    막 잠자리에 누워 있던 채로 온지라 겉옷을 따로 입히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겨울은 아니지만 해가 져서 바람이 쌀쌀하긴 했다.

    “이만 들어갈까?”

    “으으응.”

    한 살도 채 되지 않았는데 희한하게도 아이는 말귀를 알아듣는 듯이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옷깃을 붙잡는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는 걸 보니 명백한 거절의 의사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럼 온실로 가자.”

    화훼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신경 쓴 적은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이것저것 꾸며 놓긴 했다. 월초에 받아 본 예산 보고서에서 온대지역 화초도 몇 가지 들여놨다던 기억이 났다.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커다란 반구형 온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벽면에 박힌 마정석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긴 따뜻하지?”

    알렉시스는 루치를 돌려 안아 사방을 둘러볼 수 있도록 해 주면서 물었다. 아이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분수 쪽을 가리키며 무어라 소리쳤다. 짧은 다리를 흔들며 빠르게 옹알거리는 걸 보니 호기심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알렉시스는 그곳으로 아이를 데려갔다.

    “물장난이 하고 싶어?”

    중앙에 설치된 작은 분수에서는 온수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루치는 흥분한 목소리로 물줄기를 잡아보겠다고 애썼다. 알렉시스는 어색하게 아이가 원하는 대로 가까이 갔다. 아이가 물에 빠지지 않도록 붙잡으면서도 어떻게 놀아 줘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직 뛰기는커녕 잘 걷지도 못하면서 따뜻한 물이 발을 적실 때마다 즐거워서 함박웃음을 짓는 아이는 행복해 보였다. 대가 없이 주어지는 순수한 미소에 그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이렇게 웃는 모습은 본 적이 없어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라도 아이를 통해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아빠!”

    루치가 한층 더 선명해진 발음으로 외치며 물을 잔뜩 묻힌 손으로 알렉시스의 얼굴을 매만졌다. 작고 통통한 손은 따뜻했다. 알렉시스는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붙잡아 뺨에 비볐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네 엄마가 가르쳐 주지 않았을 텐데.”

    “아암?”

    “에밀리가 가르쳐 줬어? 아니면.”

    문득 말이 멈췄다. 바보같이. 캐슬린이 아니면 아이가 말을 어디서 배웠을지는 조금만 더 생각하면 답은 뻔했다.

    오솔레에서 루치에겐 부모가 있었다. 똑똑하고 튼튼한 아이니 그때부터 많은 걸 듣고 배웠을 거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아빠란 말을 배운 건 그 새끼를 통해서였겠지…….

    “그 새끼는 그냥 잊어버려.”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올라 알렉시스는 미친 것처럼 중얼거렸다.

    “네 아빠는 나야. 나라고 해. 어차피 넌 그놈을 닮지도 않았잖아.”

    어쩌면 진짜 그렇게 될 수 있지도 않을까. 그 신관 놈이 더 이상 캐슬린을 찾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영원히 내 자식이 되어서, 아니, 처음부터 내 자식이었던 것처럼 사는 거야.

    그러다 문득 알렉시스는 깨달았다.

    “아니야. 넌 내가 낳은 아이면 안 돼.”

    진짜로 이 아이가 제 아들이면 캐슬린은 언젠가 떠날 것이다. 어쩌면 지금 당장에라도 떠날 수도 있다. 끔찍하게 여기는 남자의 아이는 얼마든지 버리기 쉬울 테니. 만약 아이가 저를 닮기라도 했으면 더 진절머리 나겠지.

    “……넌 그 새끼의 자식이어야 하는구나.”

    알렉시스는 씁쓸하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온실의 따뜻한 기운 덕에 부풀었던 가슴 한쪽에 찬바람이 훅 몰려든 듯이 헛헛했다.

    “네가 그 새끼의 자식이면 캐슬린은 널 버리고 떠나지 못하겠지.”

    이 아이가 저와 캐슬린을 반씩 닮았으면 어떨까 그려 보던 상상을 억지로 지워 냈다. 알렉시스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감히 제게 주어질 리 없는 사실이니 포기도 쉬웠다.

    “그러니까 난 널 데리고 있어야겠다.”

    인질이든 포로든 뭐라고 불러도 좋아.

    그는 고집스럽게 아이에게 느끼는 감정을 그뿐이라고 일축했다. 할 수만 있다면 아이에게 흐르는 제 피의 반을 나누어 주고, 제 자식이라고 말하고 싶은 감정은 그저 소유욕일 뿐이라고.

    아이에게 느끼는 감정이 만약 그게 아닌 다른 거라면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델라포스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북부까지 올라가 모든 신관을 다 잡아 죽이고 싶었다. 왜 제가 아닌 다른 남자가 캐슬린을 안았는지. 그녀의 태를 빌려 태어난 아이가 왜 제 아이가 아닌지 그 빌어먹을 신의 멱살을 붙잡아 제단에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아빠.”

    끝없이 치닫던 망상이 극에 달할 즈음 아이가 기어와 품에 안겼다. 조그만 손이 저를 더듬어 잡은 순간 차오르던 분노가 물거품처럼 사그라졌다.

    ‘그래. 이 아이는 내가 키우면 된다.’

    앞으로도 제 자식으로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어찌 됐든 지금 아이와 캐슬린은 제게 머무르고 있으니까, 벗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꼬물거리며 파고드는 아이의 목소리에 잠이 묻어 있었다. 안정을 되찾은 알렉시스는 아이를 꼭 안으며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3층 침실의 젖혀진 커튼 사이로 내려다보는 복잡한 시선이 저와 아이를 향한 것은 모르는 채로.

    * * *

    황태자의 성인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궁정 회의에서는 생일과 의식을 겸해서 규모를 키워 거행하자는 결론이 났고, 그에 따라 연회는 현 황제가 즉위할 때와 비슷한 정도로 결정되었다.

    “그건 안 버리실 거죠, 마님?”

    캐슬린이 초대장을 접어 내려놓자, 에밀리가 불안한 듯 물었다.

    “여기, 황태자 전하의 이름으로 초대장이 하나 더 왔어요.”

    “응. 가야겠지.”

    에밀리가 건네는 봉투를 받아 뜯으니 역시 같은 초대장이었다. 지금까지 페터의 생일은 잊지 않고 챙겼었는데 이번 해는 깜박 잊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몰려들었다.

    캐슬린은 페터의 이름이 적힌 초대장만 따로 빼 두었다. 사교계의 행사는 다 피해 왔지만 페터의 일에는 불참할 순 없었다. 더구나 열아홉 번째 생일은 트리벨리언에서 큰 의미를 가지니 말이다.

    “황제 폐하께서 편찮으신 이후부터는 전하께서 탄신일 연회를 열지 않으셨지만, 이번엔 성인식을 해야 하니 미룰 수도 없겠어요. 엄청 화려하겠는데요.”

    금방이라도 재단사와 보석상을 불러들이고 싶다는 눈빛으로 에밀리가 화두를 던졌다.

    “주인님께서도 참석하셔야 할 테고요.”

    캐슬린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귀족의 신분으로 참석하는 거라면 동행하지 않아도 상관없겠지만 발텐 가는 황실의 방계였다. 이번에는 함께해야 했다.

    “먼저 주인님께 여쭈고 올까요? 황실에 답신도 보내야 하고, 또 주인님도 마님의 의상과 맞추어야 할 부분이 있으니까, 얼른 라일런트 자작님께…….”

    에밀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벌컥 문이 열리고 알렉시스가 들어왔다.

    “함께 외출하지. 황실 연회에 참석할 준비가 필요하니.”

    난데없는 요청에 캐슬린은 의아한 기분으로 답했다.

    “발텐 가 소속 재단사가 만든 예복은 이미 있는데요.”

    “기준이란 건 늘 바뀌기 마련이지.”

    이미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그가 에밀리에게 고갯짓했다.

    “부인의 외출 준비를 도와 드려라.”

    “예, 주인님.”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는 에밀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발텐 가의 안주인이 3년 만에 돌아온 이후 새로운 의상과 보석을 구매하지 않은 상태여서, 그렇지 않아도 걱정스럽던 참이었다.

    사교계 인사들이 모두 모인 황실 연회에 그대로 갔다가는 구설에 휩싸일 수도 있었다. 캐슬린은 상관없어하는 눈치라 에밀리는 내심 걱정했는데, 평생 이런 면에는 무심하던 주인이 모처럼 신경을 썼다는 게 놀랍고 다행스러웠다.

    알렉시스가 당연한 듯 응접실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에밀리는 캐슬린이 외출복으로 갈아입는 것을 도우며 등을 떠밀었다.

    “얼른 다녀오세요, 마님!”

    “그래. 루치 잘 부탁해.”

    캐슬린은 싱글벙글하는 에밀리를 뒤로하고 알렉시스가 내민 손을 잡고 본관을 나섰다.

    사실 외출에 대해 별 감흥은 없었다. 장신구야 기성품을 사서 착용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의상의 경우는 달랐다. 지금부터 제작에 들어간다 해도 일주일 안에 새 드레스를 만드는 건 무리였다.

    ‘그걸 알 리 없지.’

    외출을 청한 건 그저 함께 밖으로 나갈 핑계를 잡은 것뿐이겠지.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캐슬린은 마차로 올라섰다.

    미리 마부에게 말을 해 두었는지, 공작저를 벗어난 마차는 망설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교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자주 들른다는 상점이 줄줄이 들어선 거리에 도착했다.

    창밖과 그를 번갈아 보자마자 마차가 멈추었다. 알렉시스가 손을 내밀었다.

    “내리지.”

    “어딜 가는 건가요?”

    “예복 맞추러.”

    돌아온 짧은 대답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캐슬린은 소용없다고 말할까 하다가 그만두고 손을 잡았다.

    마차에서 내리자 의상실의 재단사를 포함한 직원들이 모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부인.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답니다.”

    “마담 메텔린. 저번에 연락을 준 이후 처음 보는군. 그런데 준비라니?”

    “물론 가봉이죠. 공작님께서 방문 일자를 일러 주지 않으셔서 걱정했는데 딱 맞게 오셨군요.”

    의상실 직원들이 상냥하게 안쪽으로 입장하기를 권했다. 얼떨결에 그들을 따라 들어가면서도 캐슬린은 믿기지 않았다.

    ‘여긴 어떻게 안 거지? 게다가 드레스 가봉 준비가 다 되었다니.’

    마담 메텔린은 고풍스럽고 우아한 컨셉의 드레스를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해서, 많은 귀족들이 전담 재단사로 고용하려고 제안을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는 소문이 돌 만큼 프라이드도 높았다. 그런 사람에게 예약을 해 두다니, 누가 듣는다면 발텐 공작이 미쳤다고 할 법했다.

    얼떨떨하게 커튼을 헤치고 들어간 캐슬린은 마네킹에 입혀진 드레스를 발견했다.

    진줏빛 실크 드레스에 그녀의 눈 색과 같은 연청색 레이스가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어깨 부분에서 이어진 망토는 작은 진주와 금조개 껍데기로 장식되어 반짝거렸고, 허리 부분에는 공작가를 상징하는 붉은 천이 비스듬하게 묶여 있었다.

    누가 보아도 공작가의 안주인을 위해 제작된 예복인데도 제 옷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누군가 저를 골탕 먹이려고 가져다 놓은 게 아닐까, 반신반의하며 드레스를 입어 보았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부인. 사이즈도 꼭 맞으시네요.”

    마담 메텔린이 흡족하게 웃으며 붉은 끈을 마저 바로잡아 주었을 때야 비로소 캐슬린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정말로 알렉시스 발텐이 저를 위해 드레스를 주문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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