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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58)화 (58/110)
  • 58화

    캐슬린은 책을 구석진 곳으로 밀어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시각에 어쩐 일이신가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으나 가슴은 다급하게 쿵쾅거렸다. 설마 에디스가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닐까? 어쩌면 숨기려 한 비밀을 기어코 캐내 알아 버렸다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갖가지 생각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냥.”

    불을 켜지 않아 사위가 어두웠다. 적막한 침실에서 낮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위태로웠다.

    “그냥 보러 왔어.”

    “제가 오늘은 좀 피곤해서요. 특별히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내일 다시…….”

    갑작스레 알게 된 사실에 복잡한 심경이 드러날까 걱정됐다. 그래서 완곡하게 거절하려던 찰나에 불쑥 알렉시스가 가까워졌다.

    단단한 팔이 순식간에 허리를 끌어당기더니 품에 가두었다. 그러면서 마치 제가 안긴 것처럼 어깨를 둥글게 말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실은 여기 있는 걸 확인하려고 온 거야.”

    “…….”

    “네가 떠나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어. 보고 바로 가려고 했는데…… 보니까, 허상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지더군.”

    변명처럼 이어지는 말은 용서를 구하는 것처럼 필사적이었다. 캐슬린은 그의 팔을 밀어내려다가 알아차렸다.

    저를 안은 팔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바짝 당겨 안긴 품 안에서 가까이 들리는 심장 소리마저 불규칙했다.

    그의 소맷자락을 잡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

    ‘모르겠어.’

    에디스의 말이 믿기지 않는 건 아니었다. 도감에 남부 전갈의 독이 어떤 증상을 불러일으키는지 적힌 내용도 모조리 읽었다. 그런데도 그를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독 때문에 저에 대한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던 건지, 아니면 독이라는 핑계를 빌어 무심했던 과거의 자신을 합리화하고 후회를 사랑이라고 믿는 건지.

    딱 잘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타인의 입으로 전해 들은 진실은 그만큼의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공작님이 말씀하셨었죠. 저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캐슬린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언제부터요?”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캐슬린은 한 번 더 물었다.

    “왜 절 사랑하게 되셨어요?”

    그제야 알렉시스는 그녀를 품에서 떼어 내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차갑기만 했던 눈이 지금은 어쩐지 슬퍼 보였다.

    “설명하지 못하면 안 믿어 줄 건가?”

    “지금도 믿지는 않아요. 그저 궁금할 뿐이에요.”

    캐슬린은 그가 제게 한 번만이라도 솔직해 주길 바랐다. 그런다면 용서까진 아니더라도 이해는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들어는 주겠다는 소리군.”

    알렉시스는 피식 웃더니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다행히 구석에 치워진 책은 보지 못한 듯했다.

    “네 눈 때문이었어.”

    “……눈이요?”

    흔한 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희귀한 색도 아니었다. 캐슬린처럼 연한 푸른색 눈은 드물었지만, 벽안 자체는 귀족이나 평민 모두를 통틀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래. 황후궁 감옥에 처박혀 있을 때, 날 도와줬던 유일한 사람이 푸른 눈이었거든. 너와 꼭 같이 연한 푸른색이었어.”

    먼 기억을 더듬는 그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아득했다.

    “아주 잠깐 말을 나눴을 뿐인데 그 대가로 그 여잔 황후에게 끌려갔어. 그 뒤론 어떻게 됐는지 모르고. 공작이 된 후 찾아봐도 알 길이 없더군.”

    뜻밖에 듣게 된 과거는 에디스가 알려 준 이야기와도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그가 발텐의 성을 받기 전의 시절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적었기에, 캐슬린 역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어느 귀족의 하녀인 것 같았는데 그자가 누군지는 알아내지 못했어. 그럴 만도 하지. 그때는 황후궁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귀족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게다가 하녀 따위를 누가 기억하겠어.”

    알렉시스의 말에 무언가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캐슬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궁 사람이 아니라 정말 귀족의 하녀였나요?”

    “황궁 사람이라면 날 도왔을 리 없어. 황후가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

    단호한 대답은 그녀의 추측에 가능성을 덧붙여 주었다.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마음이 복잡해졌다.

    캐슬린은 저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뜬 어머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 있었다.

    윈스턴 백작의 포로가 되어 원치 않는 정부로 살다가, 그가 결혼하여 부인을 들이자 하녀가 되었다. 온갖 궂은일은 다 맡아 하며 아이를 가지고서도 백작이 먼 길을 떠나는 일이 생기면 시중을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네가 처음 발텐 저에 들어왔을 때 눈길이 갔어.”

    잊었던 기억을 더듬어 나가던 캐슬린은 그의 고백에 순식간에 현재로 다시 돌아왔다. 찬물을 부은 듯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땐 왜 그런지 몰랐어. 그 뒤로도 한참이나. 왜 자꾸 네가 눈에 들어오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다 거슬리는지. 그러다 네가 떠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쩌면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

    “기회를 줘.”

    그가 애원하듯 말하며 어둠 속에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은 손을 보듬으며 속삭였다.

    “다신, 다신 놓치고 싶지 않아. 어머닐 잃어버린 것처럼. 내게 손을 내밀었던 그 사람을 끌려가게 뒀던 것처럼. 너마저도 떠나보낼 순 없어. 그러니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널 찾을 기회를.”

    알렉시스는 제 뺨을 어루만지며 숨이 넘어갈 것처럼 가쁘게 말을 뱉어 냈다. 마치 제가 환상이 아닌지를 필사적으로 확인하듯이.

    “제발.”

    캐슬린은 저를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수도 있을 것처럼 커다란 덩치를 한 남자가 제 발치로 내려가 애원하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마음이 이상했다.

    저를 세상에 홀로 내버려 두고 매몰차게 돌아서면서도 기어코 비수를 던졌던 남자였다. 그걸 알면서도 그에게 온몸을 내던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조그만 곁이라도 나눠 받으면 행복했다.

    제 배로 낳은 아이에게 흐르는 피의 반은 알렉시스 발텐의 것이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하고 가여웠다. 아이에게 아비의 사랑을 물려주지 못한 것이 저 때문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서니 다시 찾아온 남자를 어디까지 받아 줘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처음의 그 마음이 다시 생겨날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었다.

    “우선 돌아가세요.”

    캐슬린은 동요하는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차분하게 그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밤이 늦었어요.”

    “캐슬린.”

    “하신 말씀은 생각해 볼게요.”

    단호한 몸짓으로 밀어내자 알렉시스는 조금씩 물러났다. 천천히 돌아서는 그의 어깨가 전과 달라 보여서 캐슬린은 잠깐 갈등했다.

    ‘약은 제대로 마시고 있는 걸까?’

    결국 그가 침실 문에 손을 댔을 때, 망설이던 캐슬린은 그를 불러 세웠다.

    “공작님. 저, 혹시…….”

    그러나 입 밖으로 말이 나간 순간 바로 후회했다. 만약 중독 상태를 제가 안다는 티를 내면, 에디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곤란해질 거였다. 그녀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니에요. 가세요.”

    어색하게 흐린 말끝에도 그는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캐묻지 않았다.

    “바람 부니까 창문 닫고 자.”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듯 그 한마디만 하고 침실을 떠났다. 돌아본 창가는 여전히 꽉 닫혀 있었다. 캐슬린은 창문의 잠금장치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적어도 오늘 밤의 알렉시스 발텐은 그 어떤 때보다 솔직했다고.

    * * *

    공작저의 보안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단순히 정문을 경계하는 인력이 추가 편성되었을 뿐 아니라 내부에서 도는 모든 문서를 대상으로 철저한 검사가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전에 없던 행정 업무가 하나 추가되었다.

    공작 부인을 수신자로 하여 발송되던 사교계의 초대장은 이전부터 늘 봉투도 뜯기지 않은 채로 다시 내려오곤 했는데, 시녀장은 그것의 숫자가 침실로 올라갔던 숫자와 일치하는지를 맞추어 본 후 하나하나 뜯어 특별한 내용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해 질 녘이 되면 집사에게 현황을 보고했다.

    “특이 사항은 없다고 합니다.”

    “그래.”

    알렉시스는 이만 나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노집사 알스도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각하, 에디스 양은 어떻게 할까요? 저번에 한번 방문했다가 다시 돌아갔다는데, 불러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약은 두고 갔으니 따로 연락하지 마. 라일런트 자작이 알아서 할 테니.”

    “하지만 카벨 선생도 우려가 큽니다. 만약 또 예상치 못한 증상이라도 발현되면.”

    “내가 병자 새끼란 걸 지금 캐슬린더러 알게 하란 소린가?”

    “각하…….”

    요제프란 신관 놈은 이런 병 따위 없이 멀쩡하겠지. 조금이라도 다친 곳이 있으면 알아서 치료할 수 있을 테니까.

    이미 저는 캐슬린에게 한참 그놈보다 아래인 처지였다. 그놈보다 덜 떨어진 구석은 절대로 밝히고 싶지 않았다.

    “허튼짓하지 마. 지금까지는 멀쩡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 봐.”

    알스도프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물러났다. 알렉시스는 그가 나가자마자 강박적으로 손목에 뛰는 맥을 짚었다. 다행히도 정상이었다.

    긴 한숨을 뱉으며 커튼을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밤이었다.

    ‘한번 다시 갔다 올까.’

    낮에 잠깐 아이를 보러 갔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가 아니라 캐슬린을 보러 간 거였다. 그녀가 혹시나 다른 연락을 받고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초조해져서 자꾸만 주위를 맴돌게 됐다.

    다행히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날 밤의 고백 이후로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더 속이 탔다. 이런 상황에서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아이는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캐슬린의 눈을 똑 닮은 사내아이는 낯가림도 없이 잘 웃는 편이었고 희한하게도 저를 반겼다. 캐슬린은 아이가 좋아하는 물건조차도 억지로 빼앗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제게 기어오는 아이의 앞을 모질게 막아설 수 있을 리 없었다.

    ‘제대로 자고 있는지만 보면 되겠지.’

    알렉시스는 빠르게 집무실을 나서서 3층으로 올라가며 반대편 복도 끝을 흘깃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캐슬린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말없이 저를 보는 그 눈에 증오가 어려 있을까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그는 셔츠 목깃을 풀어내면서 루치가 잠들어 있을 침실로 향했다.

    열린 문을 밀고 들어가자 아직 촛불이 켜져 있었다. 지친 얼굴로 아기 침대를 굽어보고 있던 에밀리가 돌아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주인님?”

    “아이는?”

    “그게.”

    그녀가 난처한 얼굴로 비켜 보이자, 큰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이리저리 몸을 뒤집는 루치가 보였다.

    “낮잠을 많이 자서 그런지 아직 잠들지 않으시네요.”

    그사이에 짧고 통통한 다리로 일어서서 침대를 붙잡은 채 옹알거리는 아이는 확실히 금방 잠들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아빠!”

    알렉시스를 알아본 루치가 반갑게 외치며 한쪽 팔을 침대 창살 사이로 뻗고 바동거렸다.

    알렉시스는 걸어가서 아이를 안아 올리며 말했다.

    “잠시 데리고 나갔다 오지. 어차피 금방 잘 것 같지도 않으니까.”

    “그, 그렇긴 합니다만…….”

    “캐슬린에겐 알리지 마.”

    “네, 알겠습니다.”

    침실을 나온 그는 한쪽 팔로 아이의 등을 받쳐 안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아이는 뜻밖의 외출이 반가운지 까르륵거리며 목에 매달렸다.

    ‘다음 달이면 태어난 지 한 살이 된다고 했었나.’

    저를 아비로 아는 아이가 품에 안겨 있는 게 썩 기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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