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캐슬린이 떠나고 알렉시스는 한참 만에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조끼 단추를 풀어냈다. 그의 가슴이 거칠게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시선은 굳건하게 닫힌 문에 계속 고정되어 있었으나, 문이 열리고 카펫을 밟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붙잡아야 해.’
그것 말고는 달리 그녀의 마음을 돌릴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잘라 말하던 가라앉은 눈을 떠올릴 때마다 견딜 수가 없었다.
“각하!”
서재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사색이 된 얼굴로 라일런트 자작이 뛰어 들어왔다.
“여기 계셨군요. 한참을 찾았습니다.”
“비켜.”
“각하, 오늘은 꼭 에디스 양을 만나 보셔야 합니다. 어서 가시죠.”
“비키라고 하지 않았나.”
“벌써 두 달이 넘게 대기시키지 않으셨습니까? 그사이에 가져온 약의 효력이 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뛰쳐나가려는 알렉시스의 앞을 기어코 막는 라일런트 자작은 막무가내였다. 참을성이 바닥난 알렉시스가 막 부관의 멱살을 잡아 소파로 내동댕이치려던 찰나였다.
노집사 알스도프가 들어와 보고했다.
“각하, 손님이 오셨습니다.”
“집사님, 지금 각하께서 손님을 맞으실 땝니까?”
“마님을 찾아온 손님입니다.”
라일런트 자작이 도움을 청하듯 애타는 눈빛을 보냈지만, 알스도프는 부관의 멱살을 틀어쥔 공작을 향해서 침착하게 설명했다.
“남루한 차림을 한 작자인데 마님께 무엇을 전달하려고 왔다고 합니다. 오솔레에서 왔다고 하면 알 거라고 했습니다.”
귀에 익은 이름에 알렉시스는 부관의 멱살을 틀어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오솔레라…….”
캐슬린이 도망쳐 몸을 숨기고 아이를 낳았던 시골 마을이었다. 그곳은 영주조차 없는 무지렁이들이 모여 사는 촌락이었는데, 그곳의 사람이 불쑥 공작 부인을 만나고자 찾아왔다고?
“라일런트 자작. 캐슬린을 데려올 때 신분을 알렸나?”
“예?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기사단은 그때 마님을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들에서 발견했고, 마을에는 들이닥치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혹시 몰라 마님의 정체에 대해 소문이 돌지 않는지 따로 확인까지 했는데요.”
그럼 그 마을의 누군가에게 신분을 알려 준 적이라도 있다는 이야기인가?
‘거슬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시골 마을로의 도피는 캐슬린 발텐에게 조금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되어선 안 됐다.
“이곳으로 데려와.”
“알겠습니다.”
알스도프가 즉각 답하고는 물러났다. 라일런트 자작은 한숨을 쉬며 곁으로 물러나 중얼거렸다.
“이러다간 정말 에디스 양이 공작저로 들이닥칠지도 모릅니다. 상태도 보지 않고 약을 만드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아느냐고 성화인데요. 이러다가 돈까지 거절하고 혹 다시 남부로 돌아가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약 좀 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호들갑 떨지 마.”
“각하께선 각하의 상태를 너무 맹신하십니다.”
복도에 나타난 두 쌍의 발걸음이 서재 문 앞에서 멈췄다. 이윽고 노크 후, 알스도프가 문을 열며 방문객을 안으로 들였다.
“각하, 손님이십니다.”
긴 갈색 로브를 뒤집어쓴 이는 젊은 남자였다. 자신이 공작과 대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얼굴을 가렸음에도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초조한 듯 로브를 좀 더 잡아당기는 손길에 머리칼이 살짝 드러났다.
날카로운 황금안이 어두운 로브 안을 훑다가 무언가를 포착했다. 알렉시스는 그자에게 명령했다.
“문 닫고 들어와.”
남자는 멈칫하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으나, 알렉시스는 기다리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알스도프에게 말했다.
“캐슬린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
“예, 각하.”
그 말에 남자가 반응했다. 노집사가 문을 닫고 물러나기가 무섭게 그가 로브를 벗으며 외쳐 물었다.
“찾아온 손님을 숨기는 것이 공작가의 법도입니까?”
라일런트 자작은 감히 제국의 공작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갈색 머리의 남자를 보며 희한하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어쩐지 목소리가 들어 본 것도 같았다. 게다가 저 눈은.
‘어디서 봤더라, 저 연두색 눈?’
싸늘한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는 상관의 낯도 어쩐지 익숙했다. 한두 번 본 것 같지 않은 느낌인데 대체 어디서…….
“어!”
그제야 이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은 라일런트 자작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어두웠던 남자의 머리칼이 연두색으로 밝아졌다. 환상처럼 덧씌워진 허물이 벗겨지고 숨겨졌던 본질이 드러났다. 알렉시스는 이를 악물었다.
* * *
품에 안은 책이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정원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날이 밝았는데 벌써 해가 져서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캐슬린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떼어 침실로 돌아왔다.
“마님, 그 책에 푹 빠지셨나 봐요. 정원에 종일 계시더니 오늘은 침실에도 들고 오셨네요?”
“아…… 응.”
서재에 두고 왔어야 하는데 정신이 없어서 그대로 들고 왔다. 캐슬린은 책 표지가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루치는 벌써 자?”
“네. 도련님은 방금 잠드셨어요. 참, 마님. 오늘은 도련님이 일으켜 달라고 보채시지 뭐예요. 어쩌면 곧 걸음마를 하실지도 몰라요!”
기쁨에 들뜬 에밀리는 캐슬린의 복잡한 심경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평소 같았다면 그녀 역시 아이의 성장에 설��을 테지만, 오늘은 그렇지 못했다.
“오늘은 좀 피곤하네. 옷은 내가 알아서 갈아입을 테니 일찍 돌아가 봐.”
“네, 무슨 일 있으면 불러 주세요, 마님.”
에밀리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캐슬린은 의자에 앉아 뒤집힌 책을 가만히 보다가 무릎을 끌어안았다.
- 부인께서 생각하시는 건 다 오해예요.
- 내가 뭘 오해하고 있다는 거죠?
- 제가 공작님의 정부라고 생각하고 계시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