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이어지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알렉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꼬박꼬박 캐슬린을 찾아왔다. 대부분은 선물을 가져다 안기고 돌아가곤 했으나 가끔은 알 수 없는 눈으로 아이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캐슬린은 가슴이 선득해졌다.
“당분간 단독 출타 계획은 없다고 하세요.”
에밀리가 알스도프를 통해 알아 온 발텐 공작의 평소 일정을 읊었다.
“궁정 회의도 불참하시고 지방 영지 시찰도 라일런트 자작님께 위임하셨대요.”
캐슬린은 검은 종이 상자에 담긴 탐스러운 열매를 가만히 보다가, 뚜껑을 덮고 풀었던 붉은색 리본을 다시 맸다.
“이건 주방에 가져다줘.”
“네. 씻어서 도련님 간식으로 내올까요?”
“아니. 좋을 대로 처리하라고 해.”
“하지만…… 주인님께서 보내신 선물이잖아요.”
오렌지빛이 감도는 황금색 열매는 로쿠아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마이어는 물론이고 트리벨리언 전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과실이었다. 타 대륙과 끝이 맞닿은 남부에서 겨우 몇 그루가 자라고 있어서 열매를 얻기도 어려울뿐더러, 무르고 쉽게 상하는 성질이라 온전한 형태로 공수하는 데만 해도 많은 물자와 노동을 요해 부르는 게 값이었다.
상자를 만지작거리는 에밀리의 눈에서 아쉬운 기색이 묻어났다. 신선한 잎이 붙어 있기까지 한 귀한 과일을 주방에서 마음대로 쓰게 한다면 주방장이 다 차지하게 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캐슬린을 설득했다.
“지금 드실 생각이 없으시면 술이나 차로 만드는 건 어떠세요? 아니면 말려서 창가에 매달아 놔도 향기가 좋을 것 같은데.”
“그럼 네가 가져.”
“네?”
“버리는 것보단 낫겠지.”
무심하게 눈길을 돌린 캐슬린이 낮잠을 자는 아이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은 후 일어났다.
“서재에 다녀올게.”
“함께 가요, 마님. 그리고 보시는 책을 말씀해 주시면 제가 챙겨서 올게요. 계속 서재와 침실을 오가시면 번거로우시잖아요.”
“아니야. 산책하는 셈 치고 가는 건데 뭘.”
1층의 서재를 하루에도 몇 번씩 이리저리 오르내리는 것이 에밀리는 걱정스러운 듯했지만, 캐슬린은 끝내 혼자 침실을 나섰다.
알렉시스의 침실은 그녀의 침실과 같은 3층에, 집무실은 2층에 있었다. 캐슬린은 여느 때처럼 그의 침실 반대편에 있는 계단을 선택해 내려갔다.
그녀가 찾아낸 전 대륙 서식 동식물 도감은 말 그대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식물에 대해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한 페이지를 읽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다만 아쉽게도 페터가 말한 남부 전갈에 대해서는 별도로 설명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캐슬린은 일단 전갈이 서술된 대목을 모조리 읽어 나가는 중이었다.
‘감정이 무뎌진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거였을까.’
대충 뽑아 온 다른 책을 근처에 내던지며 캐슬린은 소파에 앉아 페터의 말을 곱씹었다.
어릴 적부터 독에 노출된 탓으로 감정이 무뎠다면 모든 사람에게 태도가 같았어야 옳았다.
‘내겐 아니었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람에게 후계자를 낳아 보라는 비수를 꽂았을 때 그는 무심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말을 해야 제게 효과적으로 상처를 줄 수 있을지 분명 알고 있었다. 저를 곁에서 떼어 내 버리고 싶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으니. 게다가 서쪽 사냥터에서 들었던 여자의 신음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아이가 배 속에 움트던 날, 그는 발치에 매달린 저를 마치 적선하듯 안았다. 그러면서 다른 여자는 거절의 뜻을 비치는데도 안았다. 캐슬린은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아직도 비참함에 몸서리쳤다.
그래서 사실을 알아야 했다. 페터가 말한 것처럼 남부 전갈의 독이 신체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독이라는 핑계 뒤에 숨어 그가 저를 농락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증명한 다음에야 홀가분하게 이 저택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잇장을 넘기는 것과 동시에 서재 문이 열리고 알렉시스가 들어섰다. 캐슬린은 문을 잠그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재빨리 도감을 덮고 제목이 보이지 않게 뒤집었다.
“캐슬린.”
다가오는 알렉시스의 음성이 다소 성마르게 들렸다. 캐슬린은 눈속임용으로 가지고 온 다른 책을 펼쳐 무릎에 얹었으나 이내 손목이 잡혔다.
“로쿠아트. 내가 보냈다는 것 몰랐어?”
포장부터 공작의 공식 색인 붉은 리본을 둘렀었다. 모른다면 천치거나 무지렁이일 것이다. 그는 짐작하면서도 묻고 있었다. 마치 아니기를 바라기라도 하듯이.
“아니면 에밀리가 네게 숨겼나?”
“무슨 말씀이세요?”
“네 시녀가 공작 부인의 선물을 무단으로 탈취해서 소유했다는 소릴 하는 거야, 지금.”
고개를 꺾다시피 하여 올려다본 이글거리는 금색 눈에 배신감이 읽혔다. 캐슬린은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눈높이가 얼추 비슷해지자 손목을 잡은 힘이 풀려 자유로워졌다.
“제가 주었어요.”
“뭐?”
“제게는 필요가 없어서요. 에밀리는 술이나 차로 만들고 싶어 하는 눈치길래 줬어요.”
“너에게 보낸 거였어, 내가!”
천장이 높은 서재에 고함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캐슬린은 우습게도 화가 난 알렉시스의 낯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 파문의 시작이 자신이라는 점도.
“왜 그랬어?”
그러나 알렉시스는 순식간에 다시 바뀌었다. 이전처럼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서지 않고 오히려 애원하듯 물어왔다.
“내가 보낸 선물이라는 거 알면서 왜 그걸 버렸어?”
“말씀드렸잖아요. 필요 없었다고.”
“여태껏 보냈던 선물도 다 그렇게 내던졌나?”
“보내셨던 물건들은 다 정리해 두었어요. 언제든 원하실 때 찾아가세요.”
“캐슬린.”
미끄러져 내린 발텐 공작의 손이 모아 잡은 캐슬린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건 네 거야. 다 네 것들이라고.”
“이 저택에 제 물건은 없어요, 공작님.”
예전에도 그랬듯이요.
속삭이듯 짧게 덧붙인 말에 그가 움칠 몸을 떨며 물었다.
“그래서 그때 낡아 빠진 가방만 들고 떠났어?”
“제 소유인 것만 가져갔을 뿐이에요.”
“다 주겠다고 했잖아, 그때도. 돈, 보석, 권리. 왜 아무것도 안 가지고 갔어?”
그때 알렉시스는 유일하게 후계자만은 주지 않겠다고 했었다.
캐슬린은 어찌 보면 제가 발텐 가에서 허락되지 않은 것을 스스로 찾아 떠난 셈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뗐다.
“전 필요한 건 다 가지고 갔어요.”
캐슬린은 그를 밀어냈다.
“이런 소모적인 논쟁은 그만하고 싶어요.”
억지로 떠다 안긴 물건 따위에 감격하고 설렐 기회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그러면. 다시 또 빈손으로 떠나려고 안 가지겠다는 건가?”
알렉시스는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소파에 주저앉히고서 조급하게 물었다.
“대답해. 그럴 기회만 오면 또다시 그때처럼 떠날 거냐고 묻잖아.”
“이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공작님의 흥미가 떨어지면 떠날 거라고.”
“제발. 캐슬린.”
그가 꺼져 가는 목소리로 부르더니 이내 무릎을 꿇었다.
“보석도, 드레스도, 향수도, 꽃도, 그리고 과일도. 다 싫으면 내가 뭘 줘야 할까. 응? 제발 말해 줘.”
“…….”
“아이 물건을 더 보낼까? 옷은 이미 다 맞췄어. 장난감은 어때? 그림책이나…….”
“공작님, 선물하시는 건 자유예요.”
캐슬린은 그에게 사실을 일깨웠다.
“저는 그만하시라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제가 발텐 저에 머무르는 한은 계속 원하는 대로 하시면 돼요. 침실을 온통 드레스로 채우든, 아니면 보석과 꽃을 계단에 흩뿌리든. 제가 갖지는 않을 테지만요.”
한참이 지나도 그녀의 두 손을 쥔 손에는 힘이 빠지지 않았다.
“얼마나 더 기다리면 돼?”
그는 나직하게 물었다.
“기다릴 수 있어.”
아니, 강요했다. 그녀가 희망의 끈을 던져 줄 거라고 굳게 믿으면서.
“공작님께는 예전의 제가 훨씬 더 가치 있나 봐요.”
그러나 캐슬린은 얌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정부조차 눈감아 줄 순순한 여자가 되길 그만둔 지 오래였다.
돌아오지 않을 애정에 목말라하던 시간은 고통스러웠고,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저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은걸요.”
“아니야.”
그가 허겁지겁 말을 바꾸었다.
“옛날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 잊어 달라 하지도 않을게. 그냥 내 옆에만 있어 주기만 해. 나와 같은 마음이 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이유를 알 수 없이 속이 뜨거워졌다. 캐슬린은 그의 손을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 주세요.”
어지러이 흩어진 책을 주워서 그러안은 채 기다렸지만, 알렉시스는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댄 채 앉아 있었다.
“공작님께서 나가실 생각이 없으신 듯하니 제가 나갈게요.”
그녀는 천천히 걸어 서재를 나왔다. 그때까지 알렉시스는 일어서거나 뒤따르지 않았다.
문이 등 뒤에서 천천히 닫혔다. 책이 무겁게 팔을 내리눌렀지만, 서재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정원에서 책을 마저 읽을 생각이었다.
“아…….”
종종걸음으로 본관의 후문을 막 벗어나자마자 캐슬린은 누군가와 마주쳤다.
“공작 부인.”
어색하게 치맛단을 잡고 인사하는 붉은 머리 여자는, 마주친 것은 딱 한 번뿐이었는데도 캐슬린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눈앞이 잠깐 아찔해졌다. 순간 상실감 비슷한 것이 스쳤다.
걸친 옷은 여전히 평민의 복색이었다. 그녀는 몇 년 전과 비교해도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신분이나 재산이 크게 바뀌지는 않은 듯했다.
평민이 손쉽게 발텐 저를 드나드는 건 공작의 허가 없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사용인도 아니니 단순한 방문자 신분으로는 본관 후문을 알 리도 만무했다.
그동안에도 여전히 만나 왔던 걸까. 심지어는 내가 돌아온 후에도 이곳에 들였다. 갖가지 선물을 안기면서 눈을 가려 두고 뒤에서 몰래…….
‘독 따위는 허울 좋은 핑계야.’
캐슬린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페터의 말에 기대 보려고 했던 자신을 선명하게 깨달았다.
허탈함이 몰려들었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이 아렸다. 예전부터 다 알고 있었으면서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상관없잖아, 이제.’
이제는 필요도 없다고 느끼면서도, 그녀는 마치 방패처럼 책 여러 권을 가슴께로 당겨 안았다.
“오랜만이군요, 에디스.”
“저를 기억하세요?”
“네.”
짧게 대답한 캐슬린은 그녀를 스쳐 지나면서 안고 있는 책을 죄다 가져다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보기 좋게 인형극의 주인공이 되어 끌려다니는 것도 그만두리라. 어쩌면 지금 이대로 루치와 함께 공작저를 떠나 북부로…….
“저, 잠시만요!”
에디스가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뛰어왔다.
“잠시만요, 부인. 기다려 주세요!”
“뭐 하는 짓이죠?”
캐슬린은 제 앞을 가로막은 여자를 쳐다보았다. 헉헉거리며 숨을 고른 에디스가 서둘러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공작님에 관한 이야기예요.”
“에디스가 이곳에 온 이유는 따로 있지 않나요? 내가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볼일 보고 가세요.”
그녀를 비켜서 정원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팔이 붙잡혔다. 에디스는 힘주어 말했다.
“꼭 들으셔야 해요. 지금부터 부인께 제가 여기 온 이유를 말씀드리려고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