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이런 걸 왜?’
머릿속이 온통 물음으로 가득 찼다. 다시 앞장을 살피니 낡아 먼지가 쌓여 있었다. 꽂혀 있는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름은 신착 도서 서가로 붙여 놓았지만 모두 최근에 구매한 도서는 아닌 듯 보였다.
- 각하께선 마님을 훨씬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이 저택에 처음 오셨을 때부터 말입니다.
불현듯 알스도프의 말이 떠올랐다. 섬기는 주인을 감싸려는 의도가 명백한 그 말이 갑자기 왜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알렉시스 발텐 공작은 열다섯의 소녀 켈리가 주방에서 하녀로 일할 때 한 번도 다가온 적 없었다. 주인과 사용인으로서 몇 번 마주치기는 했겠지만 간단한 말조차 나눈 기억도 마찬가지로 없었다.
‘……확대 해석일 거야.’
좋을 대로 끼워 맞춰 해석해 봤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캐슬린이 애써 책을 덮자마자 불쑥 서가 사이로 알렉시스가 나타나 손에서 책을 앗아 갔다.
“요즘 요리법은 많이 바뀌었을 테니 새 책을 들여놓으라고 말해 두겠다.”
순식간에 서가를 등지고 선 그가 책을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손길이었다.
하지만 캐슬린은 그렇게 말을 돌리면서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의 기저에 어떤 의도가 깔려 있는지 잘 알았다.
드러나 버린 생각을 감추고 상대방에게 제가 원하는 모습만 보여 주려는 이들이 종종 그러고는 했다. 과거엔 캐슬린도 자주 했던 행동이었다. 명목상의 남편이 제게 조금은 다정해지길, 살짝이라도 관심을 가져 주길 바라며 다가갔다. 하지만 눈에 띄게 거절당할 때마다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않았냐고 되뇌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돌아올 상처에 최대한 피해를 입지 않으려는 방어 계책이었다. 지극히 자기 보호에만 집중한.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궁금한 건 요리법이 아니니.”
캐슬린은 부러 파헤치지 않았다. 알스도프의 말처럼 아주 옛날부터 나를 알고 있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다면 더 초라해질 뿐이었다. 저택에 들어오면서부터 공작의 관심을 끌었으나 곧 잊어버리고 냉대당한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목록표에서 자연생태학 서가의 위치를 찾아내곤 그대로 옆으로 빠져서 자리를 옮겼다.
“오페라나 사냥은 마음대로 다녀오세요. 몇 달 동안 돌아오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늘 그러셨던 것처럼.”
그러자 낮은 목소리가 엉뚱한 답을 담고 돌아왔다.
“그쪽은 육아 서적이 있는 서가가 아닌데.”
캐슬린은 자연생태학 서가를 찾아 걸으며 건조하게 대꾸했다.
“생각해 보니 공작가의 서재에 육아 서적이 있을 리가 없더군요. 후계자를 바라지 않으셨는데 당연한 일이죠.”
“…….”
“그래서 아이의 기질에 맞는 약초가 있는지 알아볼 생각이에요.”
명백한 축객령에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시 고요를 찾은 서재에서 캐슬린은 책을 찾는 데 힘썼다. 자연생태학 서가를 오간 지 한참 만에 발걸음이 멈추었다. 시선 끝에 책 두 권이 잡혔다.
전 대륙 서식 동식물 도감.
그리고 트리벨리언 약용 식물 총론.
어떤 것을 뽑아 들어야 하는지 갈등이 일었다. 머뭇거리는 찰나 등 뒤에서 저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캐슬린은 반사적으로 약용 식물 총론 쪽으로 손을 뻗었으나, 제 키보다 훨씬 높은 선반에 있는 책은 책등 끝만 매만져질 뿐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그녀의 뒤에 붙어 서서 팔을 뻗었다. 그는 허무하리만치 손쉽게 꺼내진 책을 캐슬린에게 들려 주었다.
“천천히 읽고 나와. 가지고 가서 읽어도 되고.”
그리고 서재를 나갔다. 캐슬린은 그가 나갈 때까지 못 박인 듯 서 있다가 약용 식물 총론을 소파에 내던진 후 서재 문을 잠갔다. 그리고 다시 서가로 돌아와 동식물 도감을 뽑아 들고, 쿠션이 꺼진 낡은 의자에 앉았다.
직접 확인해서 알아내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이를 변호하고자 말을 꺼낸 이도, 혹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자 말을 아끼는 이도 그녀와는 다른 목적이었을 테니까.
책을 펼쳐 목차를 살피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 * *
“발텐 공작 각하께서는 마치 칩거라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궁정 회의가 열리길 손꼽아 기다린 오스타버 후작은 발언권을 얻자마자 말했다.
“남부의 반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전하의 결단에 이견이 있어서가 아닐지요.”
“발텐 공은 그럴 성격이 아닙니다.”
페터는 단칼에 그의 말을 잘라 냈다. 오스타버 후작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황한 눈치였다.
‘어머님과 말을 맞출 땐 이런 예상은 못 했겠지.’
회의 날짜가 정해진 후부터 황후궁에 후작의 하수인이 몇 번이나 드나들었다는 보고를 들은 후였다. 페터는 그가 제출한 문서를 소리 나게 덮었다.
“생각해 보시죠, 오스타버 후작. 남부 출정에 제일 부정적이었던 것이 발텐 공이었는데 그의 뜻대로 이루어진 지금, 그가 이견을 가질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 그야 전하께서 정략혼을 없던 일로 하였으니…….”
“그건 단순한 제안이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본질은 소요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거였고. 어찌 되었든 발텐 공에 대해선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맙시다.”
단호한 태도에 귀족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회의는 다음 안건으로 흘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복형에 대해 상당히 방어적인 편이군.’
맨 끝자락에 앉아 페터를 관찰하던 셴베르크 백작이 흥미롭게 결론을 내렸다. 그는 소요 사태 수습에 일정 부분 기여하여 궁정 회의에 참석한 상태였다. 물론 발언권은 얻지 못했지만.
‘알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저 혈육의 정 때문에?’
황태자는 황족치고는 정이 깊었다. 셴베르크 백작은 잉크가 번지는 것도 모르고 깃펜을 종이에 눌러 찍으며 둘 중 어느 쪽일지를 가늠하려 애썼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마칩시다. 추가 안건이 있으면 따로 제출하도록 하세요.”
몇 건의 안건을 주제로 논의가 이어진 후, 페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셴베르크 백작도 슬그머니 따라 일어났다. 장내가 어수선한 덕에 제일 끝에 앉은 그가 황태자와 거의 비슷한 시각에 문밖으로 나서는 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전하.”
시종들을 줄줄이 달고 퇴장하던 페터는 곁에 셴베르크 백작이 따라붙자 미간을 찌푸렸다.
“자넨 또 왜 이리로 오는 건가?”
“궁 안에 말 나눌 사람은 전하뿐인데, 달리 갈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입에 발린 소리 말게. 상경하면 파티란 파티는 다 초대받아 다니는 자네가 아는 사람이 없다니 말이 돼?”
“아는 사람과 말 나눌 사람은 다르지요.”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당장 꺼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셴베르크 백작은 자연스럽게 부관의 자리를 꿰차고 섰다. 밀려난 부관이 입을 딱 벌리는 듯했으나 무시했다.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전하.”
“그래서.”
“전하께서 답을 주실 수 있을 것 같아 여쭤보려고 합니다만.”
“자네 뒤의 내 부관에게 묻게. 황태자라는 자리가 그리 한가하지가 않으니.”
“급한 건은 다 처리하셨지 않습니까? 뭐가 그리도 시급하신지요.”
부관을 돌아보니 못 들은 척 시선을 돌린다. 굴러 들어온 돌 따위에게 감히 정보 따위 내주진 않겠다는 의미였다. 셴베르크 백작은 코웃음을 치면서 걸음을 빨리하는 페터를 따라갔다.
“남부 세율 조정 건은 방금 협의를 마치셨고. 북부 행정관 파견은 이미 끝나셨고. 정기 황궁 예산 협의회 처리안은 서명만 하시면 되시고.”
“자넨 날 감시하려고 따라다니나?”
멈추어 선 페터가 기가 막힌 듯 따져 물었다. 셴베르크 백작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언제 질문을 드리면 제일 적절할지 따져보다 보니 이리되었습니다.”
“해 봐.”
“여기서 말씀드려도 곤란해지지 않으실지요.”
“해 보라니까.”
“발텐 공작 각하의 친모께서는 어떤 분입니까?”
성가시다는 뜻이 역력하던 페터의 얼굴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주변의 부관은 물론이고 시종들까지 죄다 사색이 되었다.
페터가 다소 거칠게 손짓하자 물거품이 꺼지듯 사람들이 모두 물러났다. 순식간에 회랑에는 페터와 셴베르크 백작만 남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곤란해지실까 봐 따로 여쭈려고 했는데 그럴 기회가 없어서요.”
“형님의 친모에 대해서 갑자기 자네가 관심을 가질 이유가 뭐냐고 물었어.”
“각하의 친모께서 혹 남부 출신은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셴베르크 지방 사람이라는 뜻인가?”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셴베르크 백작은 페터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황실의 상징이라는 황금안 말입니다. 전하와 각하의 눈은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전하께선 달빛과 비슷한 밝고 부드러운 빛이지만 각하께선 진하고 어두운 빛이지요. 황실의 혈통이 정확히 어떤 쪽에 가까운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각하의 눈과 같은 색을 지닌 사람을 본 적 있습니다.”
귀히 자라 영근 벼 이삭 같은 눈동자가 의아한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알아챈 것 같았다. 셴베르크 백작의 눈 역시 저와 비슷한 계열이라는 걸.
“트리벨리언에서는 남부 이민족이라고 부르더군요. 과거 셴베르크의 첫 왕조를 이끌었으나 지금은 혈통이 끊긴 순수 원주민 말입니다. 그들이 가진 눈도 그런 색이었습니다.”
수도 마이어의 상징인 황후는 결혼한 지 이십여 년이 넘게 아이를 낳지 못했고, 황제는 이민족을 완벽히 포섭하여 영토를 확장하길 꿈꿨다. 그런 황제가 오래된 남부의 혈통을 지닌 여자를 취해 아들을 낳았다면…….
머리가 어질해졌다. 페터는 알렉시스의 친모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황후궁의 하녀였다던 그녀는 이미 페터가 태어났을 때 세상을 떠난 후였으니까.
“자네의 말은 쓸데없는 망상이네.”
그러나 페터는 황태자답게 분란의 싹을 베어 냈다.
“형님의 친모는 트리벨리언인이고 발텐 공은 제국에 더 없는 충신이야.”
“그러길 바랍니다.”
아니라면 그가 남부 연맹의 수장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말은 이미 페터도 예상하지 못할 리 없었다. 셴베르크 백작은 이쯤에서 물러서기로 했다.
“하면 저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전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군요.”
“거기 서게.”
허리를 굽히고 돌아서려던 셴베르크 백작을 붙잡은 목소리는 다소 날카로웠다.
“다른 하실 말씀이라도?”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올랐어. 아마 백작도 흥미 있을 것 같은데.”
턱밑까지 다가온 황금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떤 일이신지요?”
“자네도 알다시피 곧 내 생일이거든.”
“아. 이르지만 축하드립니다.”
“성년식도 겸할 예정이야.”
뭔지는 몰라도 의도가 다분했다. 의례적인 축하로는 끝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페터가 폭탄을 던졌다.
“자네가 그 파티의 총책임자가 되어 주었으면 해.”
“예?”
“내 부관은 정사로도 바빠 신경 쓸 여유가 없거든.”
“하지만 그런 연회는 황후 폐하께서 주관하시지 않습니까?”
“요즈음은 어머님께서도 힘에 부치시는 모양이라. 게다가 자네처럼 안팎 정세에 밝은 사람이 거들면 준비가 더 수월할 테고.”
거절은 거절한다는 의도가 뻔히 읽히는 손길이 팔을 두드리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발목을 잡히다니, 뜻밖의 공격에 셴베르크 백작은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어린 황태자는 현명했다.
‘양초 밑이 제일 어둡다는 말이 있지.’
옆에 붙어 있다 보면 다른 기회도 있을 터였다. 셴베르크 백작은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멀어져 가는 황태자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