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서랍에서 꺼낸 열쇠를 건네받은 알스도프가 물었다.
“곧 그믐인데, 괜찮으십니까?”
“뭐가.”
그는 부러 되물었다. 이미 서랍을 닫을 때 보았던 약병 때문에 상기한 사실인데도 모르는 척 그렇게.
“라일런트 자작님이 저번에 새로운 약을 전달하신 후 따로 말씀이 없으셔서요. 카벨 선생에게 따로 말하지 않아도 괜찮을지요.”
“별일 없어.”
부작용은 생각했던 것만큼 큰일은 아니었다. 해독 효과가 얼음꽃만큼 크지는 않은 대신 각성 효과가 꽤 길다고 했다. 그만큼 중독성이 강하다고는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타사르트 약초는 얼음꽃보다는 구하기 쉬운 편이었으니까.
“다행입니다. 그래도 에디스 양에게 그 약을 좀 더 연구해 보라고 하는 건 어떠십니까? 제가 한번 연락을…….”
“약 따위 말고 다른 일에나 신경 써.”
알렉시스는 노집사의 말을 자르고 의자를 돌려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햇살이 내리쬐는 화창한 가을, 에밀리의 품에서 벗어난 사내아이가 풀밭을 기고 있었다.
“서재에 가 보고 싶다고 했으니 서두르는 게 좋겠군.”
“예. 마님께 전달하겠습니다.”
알스도프는 열쇠를 품 안에 챙겨 넣다가 말했다.
“아, 오늘 아침에 라일런트 자작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무레닌 성의 보수가 모두 끝났다고 합니다. 이참에 영지 시찰 일정을 잡을까요?”
“자작에게 일임하겠다고 전해.”
“예?”
“무레닌 근방뿐 아니라 전체 영지 다.”
“직접 가시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지방 영지 시찰은 알렉시스가 발텐 공작위를 받은 직후부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 중 하나였다. 마이어에서 먼 영지일수록 황후에게 대적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에 지금껏 보수에 힘을 들였다.
그러나 지금은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기존 성의 보수 공사는 모두 끝났으니 자작은 최종 점검만 하고 올라오라고 전해. 부관이니 그쯤은 혼자 진행할 수 있겠지.”
자리를 비운 사이 잡아 둔 그녀가 또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한 번 더 도망치면 다시는 잡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알렉시스는 제 안에 도사린 미약한 공포를 외면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녀의 곁에서 맴돌 심산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기존에 마련하던 물품은 어떻게 할까요?”
“계속 채워 둬.”
“그리 전하겠습니다.”
알스도프는 주인이 결정한 사항을 모두 머릿속에 새긴 뒤 집무실을 나왔다. 그리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라일런트 자작에게 사람을 보내고, 지방 영지에 내려보낼 물품 목록을 추려 준비하게 했다.
그러고 나서야 안주인의 호출이 들어왔다. 알스도프는 준비한 문서를 들고 다시 위층의 침실로 올라갔다.
“너무 늦게 불러 미안하네. 아이가 늦게 잠들어서.”
연녹색 가운을 입은 캐슬린이 조용하게 사과했다. 알스도프는 아기 침대에서 잠든 어린 공자를 잠깐 응시하고는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아닙니다. 여기, 서재 열쇠와 서가 목록입니다. 아주 오래전에는 사서가 있었지만 사직한 이후로는 새로 뽑지 않아서 정리가 아주 잘 되어 있지는 않을 거라 송구합니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면 상관없어. 고맙네.”
열쇠를 집어 든 손이 머뭇거렸다. 알스도프는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안주인이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알스도프.”
“하문하십시오.”
“공작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대답이 없자 그녀는 설명하듯 덧붙였다.
“자넨 공작님이 작위를 받으셨을 때부터 이곳에서 일했다고 들었네.”
“발텐 저에서 근무한 것은 10년입니다. 하지만 각하께서 공작님이 아니실 때도 모시기는 했습니다.”
“그럼 혹시…….”
“황후궁에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캐슬린의 얼굴이 당혹스러워졌다. 알스도프는 계속해서 말했다.
“각하께서 일곱 살이실 때 황후께 그분을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듀록 남작 부인과 함께였지요. 전장에는 동행하지 못했으니 쭉 모신 것은 아닙니다만, 각하의 곁에 있은 지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럼 더더욱 궁금해지는군. 자네는 왜 듀록 남작 부인처럼 나를 경계하지 않았나?”
“각하께서 귀환하셨을 때 제 주인은 바뀌었습니다. 하여 그분을 모셨고, 주제넘은 말입니다만…… 마님은 각하께서 처음으로 선택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이 나를 선택했다고?”
“예.”
그의 눈빛은 거짓이나 포장의 뜻이 비치지 않았다.
“황후께서 떠민 선택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캐슬린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어젯밤 그의 혼잣말과 알스도프의 말이 뒤섞였다. 그녀는 좀 더 나아가 보기로 했다.
“자네와 달리 나는 공작님과 지낸 날이 많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 혹시, 그분이 드시는 약이 있는가?”
“약이라면 어떤 것을 이르시는지요.”
“어느 것이든. 자넨 알 게 아닌가?”
“건강 상태에 관해서는 카벨 선생을 불러 하문하시면…….”
“내가 뭘 묻는지 알고 있지 않나.”
알스도프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답했다.
“각하께서 먼저 말씀하시지 않은 일을 제가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말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긍정에 가까운 말이었다. 황후의 사람에서 발텐 공작으로 넘어온 사람답게 심지가 곧은 태도여서, 캐슬린은 더 캐어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만 나가 보아도 좋네. 서재 열쇠는 공작님께 돌려 드리지.”
“예. 아, 그리고 마님. 한 말씀만 더 드려도 될까요?”
인사 후 돌아가려던 노집사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 말했다.
“말해 보게.”
“각하께선 마님을 훨씬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이 저택에 처음 오셨을 때부터 말입니다. 제가 보았던 각하는 그러셨습니다.”
다시 인사를 올린 알스도프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역시 곁에서 모시며 보았던 일입니다.”
“……알았네.”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캐슬린은 아까 에밀리가 전해 주고 갔던 장부를 펼쳤다.
곧 지방 영지로 보내질 물품 목록이었다. 몇 장을 넘기자 일상적인 내용 외에 3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성용 의복과 물건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영주의 지시 없이는 단독으로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면서 루치가 당신 아이면 좋겠다고요?’
설명도 반성도 없는 독단은 와 닿지 않았다. 캐슬린은 그의 고백이 진정 사랑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침대에서 잠든 아이의 평화로운 숨소리가 어지러운 심경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다시 장부를 덮고 서재 열쇠와 문서를 집어 들었다. 굳이 먼저 들춰내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겐 유효 기간이 지난 과거의 감정에 매달리는 것보다 현재를 살아내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 * *
서재 출입권을 주었더니 캐슬린은 내내 거기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알렉시스는 그녀의 행적을 내내 보고받고 있었으나 무슨 일을 하는지까지는 몰랐다. 그녀는 서재 안에서 한동안 머무르다가 시간이 흐르면 빈손으로 나오곤 했고, 그녀가 떠난 자리는 책을 건드리긴 했는지 싶게 말끔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캐슬린이 아침나절부터 서재에 머무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알렉시스는 시종과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육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서재에선 묵은 종이 냄새가 풍겼다.
‘청소를 다시 하라고 해야겠군.’
서재는 그가 발텐 저를 하사받은 후 몇 번 걸음 한 적 없는 곳이었다. 필요한 자료는 라일런트 자작이 정리해 가져왔으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서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이제는 관심을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어수선한 소리에 기척을 느꼈는지 서가 사이에서 캐슬린이 나타났다. 하나로 묶어 내린 머리칼에는 뽀얀 먼지가 묻어 있었다. 알렉시스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으나 그녀는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오늘 서재에 볼일이 있으셨어요?”
“응.”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번거롭지 않게 해 드렸을 텐데요.”
“금방 나갈 거야.”
알렉시스는 시종들 쪽으로 턱짓했다.
“소파를 놓아두려고. 여기 의자는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아플 테니.”
10여 년 전 가져다 놓고 한 번도 교체하지 않은 의자라 벨벳 쿠션이 다 꺼졌을 터였다. 몇 개는 라일런트 자작이 궁정에서 쓰던 걸 가져다 놨다고 듣기는 했지만 성에 차진 않았다.
시종들은 고풍스러운 붉은 벨벳이 씌워진 큰 소파를 서재 한가운데 놓아두고 물러났다. 만족스럽게 소파를 손으로 쓸어 본 알렉시스가 물었다.
“더 필요한 건 없나?”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책을 내다 팔거나 훔쳐서 누구에게 전달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원한다면 가져다 팔아.”
“…….”
“아니면 네가 가져도 되고. 그러라고 열쇠 줬잖아.”
진심으로, 알렉시스는 캐슬린이 그리해도 괜찮았다. 서가에 꽂아 둔 책 중 값나가는 것이 있으면 그녀가 갖고 싶어 하길 원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저택에 그녀가 미련을 뒀으면 했다.
“공작님의 물건을 탐낼 생각은 없어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네 거야.”
“잠시 빌리는 거예요.”
당신이 내게 흥미가 떨어질 때까지.
캐슬린은 말을 삼키고 다시 서가 쪽으로 돌아섰다. 금방 나가겠다던 말과 달리 소파에 앉은 알렉시스의 시선이 끈질기게 그녀의 뒤로 따라붙었다.
크림색 모슬린 드레스의 목이 드러난 탓인지 시선이 닿아 살갗이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캐슬린은 서둘러 책 사이로 몸을 숨기곤 목덜미를 매만졌다.
“오페라 보러 갈까?”
책 사이로 한숨처럼 그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대답하지 않자 나직한 물음이 다시 울렸다.
“한 번도 같이 간 적 없잖아.”
근처 서가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 펼쳤다. 굴뚝 빵을 굽기 전 반죽을 가장 효율적으로 발효시키는 방법. 제국의 공작이 읽기를 기다리고 서재에 두기에는 지극히 서민적인 내용이었으나 캐슬린은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여유를 찾지 못했다.
“아니면 함께 사냥을 가는 건 어때.”
다시 책을 꽂아 넣고 다른 책을 펼쳤다. 파운드 케이크에 레몬 껍질을 갈아 넣으면 상큼한 향이 난다고 했다. 캐슬린은 빠르게 종잇장을 넘겼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만들려면 겨울날 아침, 양동이에 얼음을 깔고 그 위에 그릇을 하나 올린 다음 우유를 부어서…….
“토끼나 여우 새끼를 잡아 와서 기르는 게 사교계 유행이라던데. 강아지나 망아지보다는 그쪽이 더 흥미로운가 보지.”
도저히 책의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죄다 결혼 생활 동안 제가 염원했던 일들이었다.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 보지 못했던, 소박하고 일상적인 부부의 외출 말이다.
참을 수 없어진 캐슬린은 소리 나게 책을 덮으며 말했다.
“그렇게 해 드리면 흥미가 떨어지실까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캐슬린은 빠르게 서가 위치가 적힌 목록표를 살피며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왜 요리책 따위가 공작의 서재에 있는 거야. 사용인들에게는 허락되지도 않는 공간인데 굳이…….’
트리벨리언 남부 풍습에 대한 총론을 찾으려면 인류학 서가로, 생물의 독에 관한 개론서를 찾으려면 약학이나 자연생태학 서가로 가야 했다. 층을 터서 만든 거대한 서재의 구조를 정신없이 훑던 캐슬린의 손이 멈추었다.
신착 도서 대기 서가.
발텐 공작 각하 요청 도서.
아까 제가 보았던 요리책이 꽂혀 있는 서가였다.
캐슬린은 다시 발걸음을 돌려 그 서가로 향했다. 꽂아 넣은 책을 다시 펼치자 맨 앞장에 신청 날짜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10년 전.
아주 오래전의 발텐 공작이 요청한 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