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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53)화 (53/110)

53화

요제프의 생사를 알았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과 알렉시스의 과거를 알게 된 혼란스러움이 뒤섞여 마음이 복잡했다.

게다가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루치가 그 과거에 연관되었을 수도 있다니.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말을 꺼내기까지 홀로 고민했을 페터의 심정을 모를 수 없어서, 캐슬린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럼 해독은 끝난 건가요?”

“잘 모르겠어요. 형님은 그 일에 관해선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중독이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는지, 치료를 진행 중인지도요. 어쩌면 숨기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독을 먹여 온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어머니임을 되새긴 페터가 우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 뭐라 해야 좋을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남부 전갈의 독이 어떤 성질을 지니며 해독은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북부에서 태어나 자랐고 최근까지 수도 마이어에서 생활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남부에 접점이 없다면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했을 생소한 동물의 독이었으니.

잉태되었을 때 전해진 독이 아직도 루치의 혈관에 흐르고 있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다. 그가 전장에서 돌아온 이후 완벽히 독을 치료했다면 루치에게 전해지지는 않았을지도 몰라.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캐슬린, 우선 북부 신전과 카르미네에 다시 사람을 보내 접촉을 시도할 거예요. 하지만 요제프가 신분을 숨기고 있는 만큼 내 신분을 드러낼 수도 없어요. 그러니 그를 찾고 있다는 증표가 필요합니다.”

“증표라면.”

“이곳을 떠나 그곳으로 가겠다는 캐슬린의 뜻이 담긴 것이면 됩니다.”

페터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슴이 쿵쾅거렸다. 동시에 알렉시스가 있던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재빨리 보닛을 벗어 살피는 척하면서 끈을 떼어 냈다. 주홍색 실크 리본에 연하늘색 꽃잎 자수가 놓인 끈이었다.

그녀는 테이블 아래로 그 끈을 페터의 손에 쥐여 주고 속삭였다.

“켈리의 물건이라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페터도 가까이 다가온 알렉시스의 기색을 알아채고 재빨리 끈을 손안으로 감추며 속삭였다.

“혹시라도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 알려 주시고요.”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알렉시스가 부드럽게 캐슬린의 팔꿈치를 잡아 일으켰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정답게 하고 있지?”

날카로운 금안이 이복동생의 붉어진 눈가를 훑었다.

“게다가 눈물까지 흘리고.”

“루치의 소식을 들어서요.”

페터가 서글프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닛 끈은 이미 소맷자락 안으로 숨긴 후였다.

“대화는 다 끝나셨습니까?”

“그자는 저기 있다.”

건성으로 대답한 알렉시스의 눈빛은 캐슬린의 얼굴로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페터가 한숨을 쉬며 나직하게 말하며 대화의 주도권을 가로챘다.

“보아하니 오늘 자선 모임은 끝까지 참석하지 못할 것 같군요. 참석자가 없어 셴베르크 백작이 원하는 그림이 아니다 보니. 남부의 일이 성공적으로 수습된 걸 알리고 싶어 했는데 말입니다.”

“그자를 부관으로 두기로 했나?”

“권유한 적은 없지만 저자가 스스로 청하더군요. 나쁘지는 않아서 데리고는 다닙니다.”

페터의 말에 알렉시스는 캐슬린의 손가락을 파고들며 맞추어 잡았다.

“곧 예배가 시작된다던데. 여기까지 온 김에 참석할 생각이면 지금 가지.”

“……네. 가요.”

다행히 평소와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캐슬린은 그와 손을 맞잡은 채로 정원을 나왔다.

“페터가 올 걸 알고 있었나?”

수습 신관의 안내를 받아 신전의 복도를 걸어가면서 알렉시스가 물었다.

그의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였다. 캐슬린도 앞을 바라본 채 대답했다.

“전 몰랐어요. 먼저 자선 모임에 가자고 한 건 공작님 아니셨던가요?”

“그랬지.”

평행선처럼 길게 늘어진 복도를 따라 침묵이 흘렸다. 멀리서 낮게 울리는 제식용 종소리가 들렸다.

물어볼까.

캐슬린은 예배당으로 들어서는 짧은 시간 내내 갈등했다.

전갈의 독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할까. 치료는 받은 적 있느냐고, 받았다면 해독은 어느 정도까지 되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후계자를, 당신의 피를 이은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던 건 혈관에 흐르는 그 독 때문은 아니었을지.

간절히 바라던 요제프의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기쁜 마음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누군가를 향한 것인지 구별할 수 없는 걱정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머릿속에 가득 차 버린 것만 같았다.

신전에서 돌아와 마차에서 내릴 때도 알렉시스는 한결같았다. 먼저 손을 내밀어 안듯이 그녀를 내려 주었다. 가까이 닿은 금안은 따뜻하지는 않았으나 예전처럼 서럽도록 냉정한 빛은 아니었다.

혼란스러웠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그가 물었다. 캐슬린은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네?”

“아까부터 나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길래. 아닌가?”

“아.”

아직도 그녀의 허리엔 그의 팔이 감겨 있었다. 캐슬린은 재빨리 그의 가슴을 밀어 벗어났다.

“허락을 받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뭐지?”

“서재에 출입해도 될까요?”

“공작저 안에서 네가 가지 못할 곳은 없어.”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말했잖아. 포로가 아니라고.”

“…….”

“하지만 궁금하긴 하군. 무슨 책을 읽고 싶은데?”

“아이 교육과 관련된 서적이요.”

변명거리를 생각할 새도 없이 말이 먼저 나갔다.

“주치의가 따로 한 말이 있었나?”

“아뇨. 그냥 더 알아보고 싶을 뿐이에요. 그 아이를 지켜야 하는 건 의사가 아니라 저니까.”

“그렇게 해.”

그는 마중 나온 알스도프에게 말했다.

“서재 열쇠와 서가 위치가 적힌 목록을 부인에게 전달하도록.”

“예, 각하.”

그리고 먼저 본관으로 들어섰다. 캐슬린의 눈길이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마님?”

서재로 안내하려던 알스도프가 의아한 듯 그녀를 불렀다.

“아, 알스도프. 서재는 천천히 들러 볼 생각이라 열쇠와 목록은 침실로 부탁하겠네. 자네가 직접 가져다주겠나?”

“예, 그러겠습니다.”

캐슬린은 끈이 사라진 보닛을 에밀리에게 넘기며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 * *

“전하께서 파견한 시찰단은 현재 북부에 머무르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라일런트 자작이 동선 보고서를 건네며 말했다.

“윈스턴 영지를 포함하여 북부 국경을 전체적으로 둘러보는 것 같습니다.”

“이상한 일은 아니군. 북부 통제권이 황실로 귀속됐으니.”

“하지만 시찰단을 왜 비공식으로 파견했는지가 걸립니다.”

“살피려는 게 북부의 사정뿐만은 아니기 때문이겠지.”

알렉시스가 보고서를 훑어보다 어느 한 지점을 짚었다.

“시찰단이 북부 신전에 방문했군.”

마땅한 숙소가 없으면 신전에 머무르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페터가 비밀리에 움직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고 여겼다.

육감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전장에서는 때때로 근거에 의한 합리적인 추론보다 육감에 의한 가정이 기막히게 들어맞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알렉시스는 지금과 그때가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2기사단 일원 중 정예병으로 소대를 편성해서 보내. 황태자의 시찰단을 쫓는다.”

“알겠습니다.”

“철저히 위장해서 드러나지 않게 하되 누구를 찾는지, 뭘 하려는 건지 상세히 보고하도록 해.”

“예. 소대 편성은 이미 어느 정도 마친 상태입니다. 내일 아침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라일런트 자작은 꾸벅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알렉시스는 보고서를 책상 위로 던졌다. 조사를 명하긴 하였으나 페터의 목적이 뭔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 신관이겠지.’

그의 시신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페터가 그리 움직이고 있다면 뭔가 단서를 잡은 것이 틀림없었다. 알렉시스는 그가 페터를 등에 업고 돌아와 캐슬린의 눈앞에 돌아오기 전에 먼저 막아설 생각이었다.

그를 캐슬린 앞에 데려다 놓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어야 했다. 캐슬린 발텐은 제 아내였다. 주제넘게 다른 사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원하는 만큼 가까워지게 할 수 없었으니까.

철저히 그가 허용하는 시야 안에서 거리를 두고 있어야만 했다.

페터가 델라포스의 종을 찾아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상당히 더러웠다. 실내에 있다가는 뭘 하나라도 부술 것 같아 산책이라도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느덧 밤이 되어 창문 너머로 달이 비쳐 보였다. 그는 본관을 나와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이전 같았으면 잡무를 다 처리하고 난 후 사냥터로 갔을 것이나 이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집을 비우지 않으려는 것이 그의 의지였다.

풀벌레 우는 정원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무심코 올려다본 본관의 3층에는 창문이 열려 있었다. 흰 오간자 커튼이 열린 틈새로 날리고 있었다. 달빛이 스민 천 자락이 그녀의 머리칼처럼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알렉시스는 실소하면서도 잠깐이라도 달빛에 비친 은발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여 발길을 돌려 층계에 발을 디뎠다.

내어 준 지 몇 해나 되었음에도 걸음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아 생소한 침실 앞에서 알렉시스는 잠시 갈등했다. 이 문을 밀고 들어가는 게 이리 어려운 줄 알았으면 예전부터 노력했어야 한다는 때늦은 후회가 밀려 들어왔다.

몇 번의 고민 끝에 그는 소리 나지 않게 문고리를 돌려 침실로 들어섰다.

기척을 죽이고 다가간 침대에는 흐트러진 은발이 달빛을 받아 요요하게 빛났다. 다만 생각했던 것처럼 하나는 아니었다.

아기 침대에도 반짝이는 은발을 가진 작은 생명체가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알렉시스는 달빛을 등지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원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워 마음에 들었다.

그는 충동적으로 허리를 숙여 캐슬린의 은색 머리칼 한 줌을 입술에 길게 눌렀다 떼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야 네가 옆에 있어 줄까.”

널 곁에 두려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 네가 타고난 능력을 빼앗고 네게 버팀목이었다던 남자를 잡아 와 시정 거리 안에 묶어 두는 방법밖에는 생각이 안 나.

그래야 내 몸뚱이가 독에 절어 버린 쓰레기라는 사실을 설사 네가 안다고 해도 도망치지 못할 것 같아.

“네가 낳은 애가 내 애면 좋겠어.”

만약 그러면 널 잡아 두고 싶다고 해도 정당할 수 있잖아.

그는 죄스러운 고백을 마저 삼키고 손안에서 미끄러지는 머리칼에 다시 입술을 누른 후 돌아섰다.

문이 다시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지자 가지런히 모여 있던 은빛 속눈썹이 움찔거리며 떨리더니 이내 연청색 눈동자를 드러냈다.

캐슬린은 그렇게 한참이나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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