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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52)화 (52/110)
  • 52화

    “초대장을 조작했다는 걸 각하께서 아시면 화를 내실 텐데요.”

    셴베르크 백작이 흥미로운 듯 중얼거렸다. 페터는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잔소리 그만해. 어차피 증거도 없는데 형님께서 뭘 어쩌시겠나.”

    “그런가요?”

    “그렇다니까. 아니, 그런데 자넨 왜 대체 아직도 안 돌아가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가?”

    정원을 산책하던 페터는 걸음을 멈추고 홱 돌아섰다. 흘러내린 호박색 머리칼을 쓸어 올린 셴베르크 백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빈민 실태를 알아보려고 왔지요.”

    “그럼 대신관을 만나 보든가. 분명 델라포스까지만 동행하겠다고 했으면서 왜 날 따라다니지?”

    “전하께 제가 필요하실 듯해서요.”

    페터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더니 턱짓으로 발텐 공작 부부 쪽을 가리켰다.

    “그럼 도움이 되어 보게. 아무래도 형님은 저 자리에서 조금도 떨어질 생각이 없으신 것 같으니까.”

    “그리하죠.”

    바라던 바였다. 셴베르크 백작은 냉큼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황태자가 정략혼을 없던 일로 하는 대신 남부에 내려가 반군에 합류하는 세력을 설득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미 사라진 구 왕실의 일원이라 할지라도 셴베르크 가의 영향력은 지대해서 반군의 세력과 소요 사태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라고, 트리벨리언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키어런 셴베르크는 그렇게 시간을 벌었다. 반군은 처음에는 사병뿐이었으나 합세한 유민이 섞여들면서 수가 늘었을 뿐 아니라 세력의 구성을 희석하기 쉬워졌다. 이제 남부 반군은 셴베르크의 군사가 아닌 백성들이 주축을 이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실질적인 구심점이자 지도자인 키어런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실의 신뢰가 필요했으므로, 셴베르크는 황태자와 더 가까워질 작정이었다.

    “각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셴베르크 백작은 공작 부부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알렉시스의 금안이 못마땅한 듯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당장 꺼지라는 듯한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그는 모르는 척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어차피 중요한 건 황태자의 신뢰였다.

    ‘겸사겸사 알아보면 좋을 것도 있고.’

    아닌가 싶어 잊고 있었는데 황태자와 번갈아 본 발텐 공작의 눈에는 역시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트리벨리언 사람들이라면 특별히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 테지만, 남부 출신인 사람이 본다면 고개를 갸웃할 만한 그 무언가가.

    아마 남부 출신 사람 중 황실의 금안을 가까이서 볼 만한 신분을 지닌 이가 없었기에 아무도 의혹을 제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말해 보게.”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듯 알렉시스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셴베르크 백작은 일부러 캐슬린을 힐끗 본 뒤 곤란한 표정을 했다.

    “그러기엔 곤란한 일이라…….”

    그러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캐슬린이 쥐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산책하고 올 테니.”

    가뿐하게 몸을 일으킨 그녀가 천천히 자리를 떴다. 순간 그녀를 붙잡으려는 듯 알렉시스의 손이 올라갔지만, 곧 다시 내려갔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셴베르크 백작에게 서늘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 할 말이 쓸모 있는 말일지 궁금하군. 한번 해 보게.”

    긴장하며 자리에 앉으려는데 알렉시스가 의자를 치워 버렸다.

    “서서.”

    “……예.”

    “간단명료하게.”

    “……예.”

    제발 황태자가 공작 부인을 빨리 돌려보내 주길 바라면서 셴베르크 백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 * *

    “초대장을 페터가 보낸 거라고요?”

    “네. 다행히 형님께서 속아서 다행이네요. 한 번도 자선 모임에는 참석한 적 없는 사람답죠?”

    천연덕스럽게 웃는 페터의 모습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따라서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공작저로 바로 오지, 왜 신전으로 불렀어요? 설마 공작님이 출입 금지령을 내리셨나요?”

    “그건 아닙니다. 사정이 조금 있었어요.”

    아니라고 말하는데 뭔가를 숨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페터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루치는 어때요? 들어 보니 아팠다면서요.”

    “이젠 괜찮아졌어요. 그맘때 아이들은 가끔 한 번씩 그러곤 한대요. 주치의도 새로 고용했고, 잘 살펴보고 있어요.”

    “다행……이네요.”

    페터의 말끝이 묘하게 늘어졌다. 그는 그늘 가에 놓인 의자를 빼 주었다.

    “여기 앉죠. 형님의 시야에서 너무 멀어지면 심기를 건드릴 거예요.”

    “네, 고마워요.”

    페터는 자리에 앉았으면서도 쉽사리 말을 먼저 꺼내지 못했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죠, 페터?”

    걱정스러워진 캐슬린이 재차 묻고서야 그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캐슬린에게 알려 줄 사실이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캐슬린이 궁금해했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캐슬린이 몰랐던 일이에요. 뭘 먼저 듣고 싶습니까?”

    “뭐가 더 중요한 일인데요?”

    “제가 감히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물어본 겁니다. 하지만 분명히 둘 다 아셔야 해요.”

    “그럼 제가 궁금해했던 일을 먼저 알려 주세요.”

    캐슬린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전자는 요제프에 관한 이야기일 거고, 후자는…….

    그녀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무슨 일인지 듣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은 일이니까. 다행히 페터가 빠르게 설명했다.

    “먼저, 북부로 보낸 사람들이 카르미네 산맥 접근에 성공했습니다. 윈스턴 백작이 몇 년 전부터 그곳의 출입을 금지했기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웠는데, 최근에 형님이 그를 실각시키는 바람에 길이 열렸어요. 북부에 흩어진 영지에 다들 관심이 쏠려서 카르미네는 관심 밖으로 밀려난 거죠.”

    “아버지가 실각했다고요?”

    “모르셨습니까?”

    캐슬린은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시스는 제게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윈스턴 백작을 파티에서 그렇게 마주친 이후로는 따로 연락을 취한 적도 없고 사람을 보내지도 않아서 아예 잊어버렸었다.

    “윈스턴 백작은 보상금을 받고 영지와 북부 경계선 통제권을 모두 황실에 반납했습니다. 이후 어디에 몸을 의탁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네.”

    “황실에서 새로운 영주를 임명할 예정인데,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 행정관만 파견했습니다. 그래서 카르미네에 입산하는 것 역시 따로 기록이 남지는 않은 상황이고요. 따라서 요제프가 카르미네에 도착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윈스턴 영지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신전에 신관이 한 명 늘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가 살아서 그곳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말이겠네요. 북부의 신전은 신관들이 꺼리는 수련지로 유명하니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페터의 동조에 캐슬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꼭 잡았다. 낭떠러지에서 추락했는데 죽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신께 감사할 일이었다. 그런데 북부까지 무사히 간 거라면 크게 다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왜 혼자 북부까지 갔을까요? 함께 가자고 했는데…….”

    “형님을 상대하기엔 버겁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어쩌면 캐슬린을 위해서 먼저 그들을 찾으려는 건지도 몰라요.”

    목이 메어 뭐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저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가겠다고 한 요제프는 정말로 제가 한 말을 지키고 있었다.

    “요제프를 찾아서 연락이 닿으면 꼭 다시 알려 주겠습니다.”

    “고마워요, 페터.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페터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감싼 뒤 바로 놓았다.

    “다만 제게 고마운 마음이 있다면, 제 말을 끝까지 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몰랐던 일 말인가요?”

    “네.”

    페터는 심호흡을 한 채 캐슬린을 바라보았다.

    “끝까지 들어 주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이기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전 캐슬린이 꼭 그래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판단까지 강요할 생각은 아니에요.”

    “무슨 일인데요?”

    “루치아노가 아팠던 일, 그저 우연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네?”

    “그 아이가 형님의 아들이어서 아팠던 것일 수도 있다는 이야깁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전 이해가 안 돼요.”

    그녀를 바라보는 페터의 눈빛이 착잡했다. 그는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한 눈으로 찬찬히 설명했다.

    “형님은 여섯 살 때부터 남부 전갈의 독을 마셨어요. 어머님의 명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타난 형님을 견제하려고 하신 겁니다.

    열일곱 살에 소년병으로 차출되어 전장에 나섰을 때도요. 스물한 살에 마이어로 귀환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그랬습니다. 형님이 수행했던 기사도, 형님을 모셨던 종자도 어머님의 사람이었어요. 알게 모르게…… 자그마치 15년 동안이나 중독되었습니다, 형님은.”

    “…….”

    “그렇게 오래 축적된 독은 피와 섞여 몸 안에서 흘렀습니다. 신경을 마비시켰고…… 형님이 전장에서 공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살인에 익숙해지고, 감정에 무뎌지고, 그렇게 맹목적으로 살아가게 만들었어요. 만약 형님이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셨다면 루치에게도 그 영향이 갔을 겁니다.”

    페터의 말을 한 번씩 다시 곱씹어 본 뒤에야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독.

    신경을 마비시키고, 감정에 무뎌진다고…….

    감흥 없이 저를 내려다보던, 시릴 정도로 차가운 금안이 선명했다.

    “그럼 루치가 경련을 일으킨 것도 그 독 때문일 수 있다는 말인가요?”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캐슬린은 떨리는 눈으로 알렉시스의 쪽을 보았다. 그는 저를 등진 채로 셴베르크 백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절대 형님을 대변하고자 한 말은 아닙니다. 아마 형님도 제가 이 사실을 캐슬린에게 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거예요.”

    페터는 간절하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어머님이 저지른 잘못이니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형님도, 루치도, 캐슬린도. 따지자면 모두 그 일 때문에 아픈 것이니까요. 그저 외면하고 있을 순 없었습니다.”

    캐슬린은 맞은편에 앉은 페터를 다시 보았다. 그의 금빛 눈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어머님 때문에 형님은 고통을 겪었고, 캐슬린을 아프게 했습니다. 이제는 루치까지요.”

    “페터…….”

    “그래서 더 견딜 수가 없어요.”

    페터는 캐슬린이 살아오면서 본 제일 선량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저는 캐슬린의 선택에 따를 겁니다. 당신이 무슨 길을 택하든 제 모든 걸 이용해서라도 도울 거예요. 하지만 캐슬린을 돕는 것과는 별개로 형님께도 사죄할 생각입니다.”

    그는 분명하게 덧붙였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캐슬린은 다시 한번 알렉시스의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캐슬린은 고개를 돌리며 손을 뻗어 젖은 페터의 뺨을 닦아 주었다.

    “페터,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녀는 페터를 원망하지 않았다.

    “당신의 선택이 옳아요.”

    페터는 이미 캐슬린에게 가족이자 친구였다. 혼자 고통을 감내하겠다 결심한 이 앞에서 캐슬린은 모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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