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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50)화 (50/110)

50화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각하.”

“이 아침부터?”

무레닌 성의 축조 결과와 영지 운영 계획에 대한 보고를 검토하던 알렉시스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해. 아직 캐슬린은 식사도 끝내지 않았을 시각이니까.”

약속도 없이 식사를 함께하려고 밀어닥친 거라면 받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알스도프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했다.

“저, 마님이 아닌 각하를 뵙고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것까진 잘…….”

알스도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집무실 문이 열리고 페터가 들이닥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형님.”

무엇이 그리 좋기라도 한지 입가에 걸린 웃음이 밝았다. 심지어는 눈마저도 웃고 있었다.

“제 표정을 살피는 걸 보면 내칠 생각까진 아니신가 봅니다?”

제멋대로 집무실 카우치에 털썩 주저앉느라 진한 금발 고수머리에 아침 햇살이 비쳤다. 제 부모의 목덜미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이복형의 집에 찾아온 사람치고는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제 발로 찾아왔으니 제 발로 나가야지.”

알렉시스는 깃펜을 놓으며 알스도프에게 턱짓했다. 호위로 따라온 기사의 무심한 시선이 일순간 그와 마주쳤다가 이내 비껴갔다. 알스도프가 그를 데리고 집무실을 나가고, 알렉시스는 페터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로 왔지?”

“형님과 아침이나 들까 하고요.”

“안 하던 짓을 하는구나.”

“이제부터 해 볼까 합니다.”

페터는 팔걸이에 편하게 기대더니 덧붙였다.

“한 번도 형님과 그래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아서요.”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황태자궁으로 초대했다면 안 오셨을 테니까요.”

단조로운 듯한 말투가 조금 떨렸다.

“그래서 왔습니다. 직접. 어머니가 보내 주신 호위 기사에게 내 등을 맡기고서.”

알렉시스는 책상 앞에 앉은 채로 간격을 두고 앉은 페터를 내려다보았다.

알고서 하는 말이었다. 분명.

그렇지 않다면 제가 심은 황후궁의 호위 기사를 보란 듯 데리고 왔을 리 없으니.

“근무 배치표는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바꾸지는 않으려고요.”

페터는 변명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알렉시스는 깍지 낀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말을 굳이 내게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궁금해하실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형님이라서.”

“잘못 짚었다. 내가 궁금해할 일은 따로 있지.”

그는 이복동생의 미소가 조금 흐려지는 걸 보면서 말했다.

“남부의 소요 사태가 수그러들었다더군. 셴베르크 백작의 활약이겠지.”

“네. 그자가 제국에 충성하기를 택했습니다. 저희로선 다행인 일이지요.”

“얼마 안 갈 평화다.”

“저로서는 최선의 선택지였습니다. 형님을 출전시키지도 않고 귀족들의 반발도 최소화할 수 있는.”

“정략혼이었다면 그 결속은 더 오래갔겠지.”

“그건 제가 아직 생각이 없어서.”

“네가 그럴수록 의혹을 거둘 수가 없어.”

알렉시스는 차갑게 말을 잘랐다.

“누구보다 약혼을 서둘러야 하는 상황인데 늘 갖가지 이유를 대며 거절하기 일쑤지. 게다가 틈만 나면 공작저에 들락거리는데 소문이 어떻게 날 것 같아?”

“……형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설마 캐슬린, 아니 형수님과 제 사이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넌 그녀가 도망치는 것도 도왔고, 다른 남자와 애를 낳고 사는 것도 눈감았어. 그 새끼가 사라진 지금도 주위를 맴도는데 내가 어떻게 생각하길 바라?”

알렉시스에게 있어 페터는 저를 넘어설 수 없는 존재였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제 것을 넘보지 않는 하수란 뜻은 아니었다.

오래전에는 아니라고 여겼던 생각이 당황하는 금색 눈을 보는 순간 의심의 싹이 되어 머리를 치켜들고 자라났다.

“오해입니다. 전 절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지 않아요!”

“그럼 결혼을 피할 이유가 없지.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 아닌 셴베르크 영애를 거절한 진짜 이유를 말해.”

“키아나 양은 저와 맞지 않았습니다. 신사답게 거절했고, 셴베르크 가도 받아들였어요. 문제는 없습니다.”

“네 도피 때문에 황후께서 네 핏줄이 아닌 내 핏줄에 집착하는데도 문제가 없다고 할 건가?”

페터의 입이 닫혔다.

흐르는 침묵 가운데 집무실 문이 열리고 알스도프가 들어왔다. 그는 조용히 트롤리에 담아 온 간단한 아침 식사를 테이블에 내렸다.

따뜻한 차와 오믈렛, 식전 빵과 수프 따위가 차려졌다. 식기는 한 벌이었다.

트롤리가 다시 나가기까지 알렉시스의 몫은 차려지지 않았다.

“마주 앉을 생각 없다. 식사하러 왔다 했으니 들고 가.”

페터는 입술을 잘근거리다 스푼을 쥐었으나 곧 다시 내려놓았다.

“사실은 사과하러 왔습니다.”

“…….”

“어머님이 형님께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았습니다. 제가 말 몇 마디 한다 해서 이미 형님이 겪은 일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겠죠. 그래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알렉시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다시 보고서를 검토했다.

“제가 어떡하면 될까요?”

페터는 계속해서 말했다.

“형님께 황태자 자리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낮아진 목소리는 침통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결국 알렉시스는 서류를 소리 나게 덮고 그를 응시했다.

“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들려온 말은 냉정했다.

“아무도 네게 사과나 포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형님.”

“황위는 내게 아무 쓸모 없다는 걸 알아 둬. 그러니 네 사과도 마찬가지야.”

알렉시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페터의 앞에 마주 섰다.

“제왕학에서 배우지 않았나? 군왕은 결코 고개 숙여 협상하지 않는다는 것.”

“그 말은 저희에게 해당하지 않아요. 전 아직 황제가 아니고 형님도 적이 아닙니다.”

페터의 항변에도 알렉시스는 변함없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황태자였던 네가 황제가 되길 포기할 수 있을 리 없다. 지위는 버려도 그 열망까지 버릴 순 없지.”

멍하니 선 이복동생에게 알렉시스는 스푼을 다시 쥐여 줬다.

“원한 대로 아침 식사를 하고 돌아가라. 앞으로는 다시 찾아오지 마.”

“…….”

“피차 엮이지 않아야 할 사이다, 우린.”

페터의 고개가 천천히 떨구어졌다. 그때 집무실 문이 요란하게 열리더니 알스도프가 뛰어 들어왔다.

“각하, 큰일 났습니다!”

웬만해서는 평정심을 잃지 않는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페터의 시선이 닿는 것을 본 알렉시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집안 사정은 외부 손님이 돌아간 뒤에 보고하지.”

“하지만 각하. 도련님의 일입니다.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렉시스는 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대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바람마저 일 정도로 급한 걸음이었다. 그 뒤를 알스도프가 허둥지둥하며 따랐다.

호위 기사와 함께 집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셴베르크 백작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야기는 다 끝나셨습니까, 전하?”

셴베르크 백작은 정략혼 무효를 설명하기 위해 함께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무실에 발을 들여놓을 참도 없이 공작이 나가 버리고, 심지어는 문 앞에 서 있는데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지나갔다.

“잠깐 들어 보니 무슨 일이 생겼나 싶은데요.”

“공작가 내부의 일이니 백작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정략혼 건은 잘 이야기했네.”

페터는 착잡한 심경을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치에게 일이 생겼다니 덜컥 걱정이 들었지만, 저와 캐슬린의 사이를 묻던 형의 얼굴을 떠올리니 가 볼 순 없었다.

“우리도 이만 돌아가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전하,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만.”

“그 말을 굳이 꼭 여기서 해야만 하나 싶은데. 다음에 듣지.”

페터는 깊은 한숨을 쉬며 집무실을 나왔다. 복도를 지나는 걸음이 처음과는 달리 많이 지쳐 보여서 셴베르크 백작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의문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는 발텐 공작이 향한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눈 색이 미묘하게 다른데.’

파티에서 만났을 때는 불빛이 어두워 몰랐다. 그리고 황실의 핏줄을 본 것이 처음이라 그저 그렇구나 하고 넘겼고.

한데 황태자의 눈과 함께 가까이서 비교해 보니 무어라 짚어 말할 순 없어도 미묘하게 다른 점이 보였다. 아무리 이복동생이라 해도 트리벨리언 황가의 상징을 물려받았으니 똑같아 보여야 하는데 말이다.

‘발텐 공작 쪽이 좀 더…….’

무어라 짚어 말하기는 어려운 애매한 점이 신경 끝을 건드렸다. 분명 어디서 보았거나 들은 적이 있는데 기억이 날락 말락 했다.

“셴베르크 백작, 뭘 하고 있나?”

아래층에서 페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니다!”

황태자와 공작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 그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 * *

“지금은 잠드셨습니다.”

카벨 선생이 진찰을 마친 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경련이 왔을 때 바로 눕히셔서 다행입니다. 5세 이하의 어린아이들은 흔히 이런 경련 증상을 겪을 수 있어요. 아주 드문 경우도 아니고, 커가면서 차차 나아질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캐슬린은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정말 괜찮은 건지, 다른 병이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은데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커가면서 나아질 수 있다, 라. 그럼 지금 상태로는 안심할 수 없다는 말이군.”

알렉시스가 말꼬리를 늘이며 반박했다.

“처음 진찰했을 때는 아무 문제 없이 건강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랬습니다. 하지만 영아의 경우에는 자세한 진단이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외형상으로 큰 문제가 없으면 보통 커 가면서 파악을 하는 게 대부분이지요.”

“그건 보통 아이들의 말이고. 공자를 그런 모호한 기준으로 보살피겠단 말인가, 지금?”

“아닙니다. 제가 어찌 도련님을 소홀히 돌보겠습니까?”

“그럼 상세히 말해 봐. 괜찮아질 수도 있다, 이런 말 말고. 아이를 어찌 돌봐야 하는지, 경련 말고 또 어떤 증상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는 집요하게 아이의 상태를 물었고, 카벨 선생은 진땀을 흘리면서도 상세히 답했다. 그제야 캐슬린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카벨 선생에게 이것저것을 더 물어볼 수 있었다.

캐슬린이 질문하는 동안 알렉시스는 노집사에게 명했다.

“주치의를 더 고용해야겠어. 어린아이를 중점으로 진료하는 의사를 찾아봐.”

“예, 각하.”

그러고는 울먹거리는 에밀리를 손짓해 불렀다.

“혼자 공자를 돌보기엔 무리다. 내 생각이 짧았군. 너는 다시 캐슬린의 시중을 들고, 공자를 돌보는 전담 시녀를 추가 배치해야겠으니 목록 뽑아서 올려. 네가 믿고 맡길 수 있다는 판단이 드는 이들로.”

“네, 알겠습니다.”

에밀리 역시 루치를 제대로 돌보려면 다른 손이 더 필요하다고 느끼던 차라 얼른 대답했다.

말을 마친 알렉시스는 잠든 루치를 한번 들여다보고는 카벨 선생과 함께 돌아갔다.

에밀리는 훌쩍이면서 캐슬린에게 다가갔다.

“마님, 괜찮으세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 제가 물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캐슬린은 루치의 머리맡에 앉아 보드라운 머리칼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큰일이 아니라니 다행이었지만 아이가 아픈 것이 다 제 잘못인 것 같아서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님. 그래도 마님이 빨리 조치하셨고 카벨 선생님도 얼른 도착하셨잖아요. 주인님께서 카벨 선생님을 별관에 머무르게 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아까 들으니 주치의를 더 고용하고 시녀도 더 붙여 주신대요.”

“그래. 그러는 편이 낫겠지.”

이전이라면 거부감부터 일었을 테지만 루치를 생각하니 거절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혼자서도 아이를 잘 돌볼 거라고 자만했던 게 부끄러워졌다.

“주인님께서 도련님을 많이 아껴 주시니 다행이에요.”

에밀리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도련님이 경련하신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렇게 바로 오실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캐슬린도 보았다. 소식을 듣자마자 문을 부수다시피 열고 뛰쳐 들어온 그를.

적어도 그때 보았던 알렉시스의 표정은 꾸민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아들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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