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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48)화 (48/110)
  • 48화

    “각하, 말씀하신 대로 마님께 전했습니다.”

    알스도프가 흰 편지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짧게 말했다.

    “대답은?”

    “승낙하셨습니다. 도련님께서는 낮잠을 주무실 시간이니, 말씀하신 시간에 함께 차를 들겠다 하셨습니다.”

    알렉시스는 그제야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황실의 붉은 인장에 작은 장미 문양이 덧붙여져 있었다.

    황후궁에서 온 편지였다.

    그는 냉소를 지으며 더 보지도 않고 옆에 선 라일런트 자작에게 건넸다. 자작은 당황하며 봉투의 인장을 뜯어 편지를 꺼내며 목을 가다듬고 읽을 준비를 했다. 황후의 편지는 장장 다섯 장에 걸친 대단한 양이었다.

    “발텐 공 보라.”

    첫 문장부터 예의와 격식은 내다 버리고 본론부터 들어갔다. 라일런트 자작은 괜히 뒷목을 문지르며 알렉시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앉아 정면만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 앞에 황후가 그대로 앉아 있는 것처럼.

    라일런트 자작은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착각이 들며 노집사에게 제발 도와 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알스도프는 모르는 척 꾸벅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그는 하는 수 없이 편지를 계속 읽었다.

    “공의 후계자가 탄생하였다는 소식이 수도에 한참인데, 황실에는 알려 오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가? 공자의 존재가 사실인지조차 소명하지 않으니 유감스럽기 그지없네.”

    “…….”

    어쨌든 병석에 누운 폐하께서도 공자의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셨으니 보여 드려야 하지 않겠나? 이틀 안에 황궁으로 들어 알현하게.”

    “왜 그 말을 안 하나 했군.”

    알렉시스는 조소 가득한 낯으로 비아냥거렸다.

    라일런트 자작은 괜히 찔끔한 마음이 되어 읽기를 그만두었다. 어차피 다음 장의 내용도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어 있을 것이 뻔했다. 그는 편지를 다시 접어 내밀었으나 알렉시스는 그걸 손도 대지 않았다.

    “발신일이 언제로 돼 있었나?”

    “열흘 전입니다, 각하.”

    황후가 보낸 편지가 중간에서 길을 잃었을 리는 없으니 일부러 치워 두었던 게 분명하다, 고 라일런트 자작은 생각했다.

    “버려.”

    “예? 하지만 황실의 인장이 찍힌 편지인데요, 각하.”

    “아니면 태우든가.”

    알렉시스는 눈 깜짝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겉옷을 걸치기에, 늦었지만 황궁으로 가려나 싶어 라일런트 자작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뒤를 따르며 말했다.

    “전시작전권 회의까지는 아직 두 시간 정도 남았으니 황후궁에 들르시기엔 넉넉하실 겁니다.”

    아니, 따르려 했다.

    알렉시스가 문 쪽을 향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는 통에 라일런트 자작은 걸음을 멈췄다.

    “왜 따라오지?”

    “지금 출발하시는 것 아니셨습니까? 황후 폐하를 알현하실 때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 여자를 보러 갈 시간 따윈 없어. 회의에 필요한 자료나 챙겨서 나중에 입궁해.”

    그는 망설이지 않고 집무실을 나와 황궁으로 향했다. 캐슬린과 약속한 시각에 만나려면 서두르는 편이 나았다.

    예정된 시각보다 이르게 입궁했기 때문에 다른 귀족들은 아직 도착해 있지 않았다. 알렉시스가 회의실로 들어가자마자 기사 한 명이 조심스레 기척을 죽이고 접근했다.

    “각하. 명하신 대로 근무 배치표가 변경되었습니다.”

    그는 종이 한 장을 조심스레 건넸다. 황제궁과 황후궁에서 근무하는 황실 기사의 명단과 경계 근무 배치표였다. 황후가 20년 동안 직접 양성하였던 인력들은 하나둘씩 노후를 핑계로 은퇴하거나 차출되어 수도 방위대로 근무지가 바뀌었다. 그리고 빈자리는 알렉시스가 10년 전부터 꾸준히 영입했던 인사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비로소 황후와 황제를 근거리에서 호위하는 기사는 모두 발텐 가에서 발탁한 이들로 채워졌다.

    “황후 폐하께서는 별 이견이 없으셨습니다. 요사이 따로 신경 쓰시는 일이 있으신지 호위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듯했습니다.”

    “그렇겠지. 다행이군.”

    알렉시스는 근무 배치표를 접어 품 안에 집어넣었다. 기사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황태자 전하는 어찌할까요? 그쪽은 아직 경계가 심해서 따로 손대지는 못했습니다. 최근에는 전하께서 근거리 호위는 직접 고르셔서 각하께서 따로 말씀하시는 편이 더 쉬울 듯합니다.”

    “호위를 직접 골랐다고?”

    페터는 검술이나 무예 단련에는 별 소질이 없었다. 때문에 기사도 가까이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예. 한데 새로 발탁한 인사가 의외입니다. 알아보기로는 그자가…….”

    “황태자 쪽은 신경 쓸 거 없어. 그대로 둬.”

    알렉시스는 피아 식별이 확실한 편이었다. 열두 살 어린 동생은 그의 기준에서 적이라 하기 어려운 쪽이었고, 따라서 그쪽까지 손을 뻗을 이유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황후 쪽에서 따로 움직이는 대로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기사는 들어왔을 때처럼 조심스럽게 회의실을 나갔다.

    알렉시스는 미리 준비된 문서를 꺼내어 살폈다. 그의 도발이 충격이 되었던 것인지, 페터는 나름대로 수를 써서 정략혼을 없던 일로 했다. 따로 계획하고 있는 바가 뭔지는 자연히 알게 될 테니 그쪽에는 관심을 껐다.

    오늘 회의에서는 남부 전쟁보다 좀 더 효과적이고 확실하게 제국의 기강을 바로잡는 안건이 논의될 것이다.

    윈스턴 백작이 소유한 북부 영지와 국경선 구역의 통제권 회수.

    근 30년이 넘게 북부를 지킨 백작의 권한은 황실이 부여한 조건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북부 이민족을 토벌하고 영토를 넓힌 공을 크게 사 황제는 상관하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지만, 알렉시스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윈스턴 백작이 손에 쥔 작은 것까지 모조리 빼앗은 다음 홀로 쫓아낼 작정이었다. 북부의 왕 자리를 누릴 자격은 이제 그에게 없었다.

    윈스턴은 분봉 받은 영지를 빼앗기고 허울뿐인 백작으로 보상금 몇 푼만 쥔 채 제국을 떠돌게 될 것이다.

    흡족한 마음으로 문서를 다시 내려놓았을 무렵 출입문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폐하! 폐하, 잠시만 고정을…….”

    난처한 시녀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요란한 구두 굽 소리와 함께 거칠게 문이 열어젖혀졌다. 아니나 다를까 황후가 분기탱천한 낯으로 서 있었다.

    “발텐 공!”

    하늘을 찌를 듯 히스테릭한 목소리에 시녀들이 찔끔하며 얼른 문을 닫았다. 둘만 남은 회의실에서 알렉시스는 다시 문서로 시선을 돌리며 여상하게 말했다.

    “얼마 안 있어 궁정 회의가 시작될 겁니다. 무슨 일입니까?”

    “알현하라는 편지는 받지 못했는가?”

    “받았습니다.”

    “한데 왜!”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온 황후는 몸을 떨며 분노를 삼켰다.

    “왜 알현하지 않지? 공자는 어디 있나?”

    “황후께서 그 아이를 보실 일은 없습니다.”

    “황족을 그리 집 안에 가둬 두는 이유가 대체 뭔가? 하루빨리 후계를 공고히 하려면 황실과 귀족에게 인정을 받아야 함이 마땅하거늘!”

    알렉시스는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은발에 파란 눈입니다.”

    그 말에 황후가 다시 소리치려다 뚝 멈추었다. 황족의 표식인 황금안이 없다는 건 그녀의 예상에 없는 일인 듯했다. 그 반응에 조금은 통쾌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보실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그…… 그래도 공의 아들이니.”

    “내 피가 섞이지 않았다면요?”

    “뭐라? 그게 무슨 말인가. 내 듣기로는 분명 공이 그 아이를 싸고돈다고…….”

    알렉시스는 의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대리석이 긁히는 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날카로웠다.

    “내 아내가 낳은 아이면 내 아들입니다. 당신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를 아들로 입적했듯이.”

    “발텐 공! 정녕 미친 건가? 어떻게, 어떻게 그런 천한 씨앗을 황실에 심어!”

    “나부터가 이미 천하니 황실의 품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황후가 숨 막히는 소리를 내더니 뒷목을 붙잡으며 허물어졌다. 알렉시스는 그녀를 외면하고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흠칫하며 돌아봤다.

    “황후께서 졸도하셨다.”

    “예? 아이고, 폐하!”

    혼비백산하며 회의실 안으로 뛰쳐 들어간 이들이 황궁의를 부른다고 큰 소리를 냈다. 회의 시간이 다 되어 먼발치에서 하나둘씩 다가오던 귀족들이 어안이 벙벙한 채로 사방을 살폈다.

    “각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라도 났습니까?”

    “황후께서 쓰러지셨소.”

    “예? 황후 폐하께서요?”

    웅성거리며 몰려든 귀족들은 실려 나가는 황후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후께서 갑자기 왜 이곳에서 실신을…….”

    “보다시피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회의는 생략하도록 하겠소. 다만 안건에 대해서는 정리한 문서가 있으니 살펴보시오.”

    “아, 예. 그러겠습니다.”

    귀족들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북부의 사령관 자리는 그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미 북부는 안정된 지 오래여서 변경백이었던 윈스턴이 물러난다 해도 황실에서 사령관을 파견하면 그만이었다.

    북부 영지는 윤택하지도 않고 광물도 없어 별 소득도 없으니 황실에 귀속된다 해도 다들 이견은 없었다. 그저 초대 변경백인 윈스턴 백작의 명예를 보아 궁정에서 마지막으로 한번 논의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만하면 황궁에서 처리할 일은 끝났다. 알렉시스는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시간을 살폈다. 조금 서둘러 돌아가면 캐슬린과 약속한 시각에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마차도 마다하고 직접 말에 올라타 박차를 가했다. 그 덕에 늦지 않게 공작저로 귀환할 수 있었다.

    조금 가빠진 숨을 가다듬으며 정원에 도착했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티타임이 예정되어 있는 공작 부부를 위해 미리 나와 있던 사용인들이 재빠르게 테이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주인님, 차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따르지 말고 그대로 둬.”

    그의 말에 시녀는 뜨거운 김이 오르는 티포트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윽고 갖가지 티 푸드가 담긴 접시가 서빙되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는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르긴 했으나 늦진 않았다.

    “부인은 뭘 하고 있지?”

    “도련님의 낮잠 시간이라 옆에 계십니다. 자다 깨시는 경우가 있어서 살펴보시나 봅니다.”

    시녀의 말에 알렉시스는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시간이 더 흘렀다.

    약속한 시각을 지난 지는 오래였다.

    알렉시스는 그녀가 있을 방을 올려다보았으나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어 안쪽은 보이지 않았다.

    “가서 확인하고 와.”

    “예, 주인님.”

    초조해하던 시녀가 명이 떨어지자마자 뛰어서 본관으로 들어갔다.

    알렉시스는 테이블 위에 차려진 것들을 살펴보았다. 이미 티포트는 미지근해져 있었고 갓 구워낸 티 푸드는 싸늘하게 식어 푸석해져 있었다.

    티타임은 완벽하게 실패했다.

    차야 다시 끓이면 그만이고 티 푸드 따윈 없어도 좋았다. 있어야 할 건 없고 없어도 좋은 것만 차려진 테이블은 그가 그린 모양이 아니었다.

    얼마 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캐슬린이 나타났다.

    흰 면 원피스에 회색 숄을 걸친 채 한쪽으로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은 누가 보아도 티타임에 어울릴 복장은 아니었다.

    시간을 착각했다면 다소 당황한 낯이어야 옳은데, 그녀는 무섭도록 침착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회색 숄만 여미는 손길은 무정해 보이기까지 해서 조바심이 일었다. 결국 알렉시스는 먼저 입을 열었다.

    “루치가 빨리 잠들지 않았나?”

    “평소와 같았어요.”

    “그럼?”

    “처리해야 할 다른 일이 많아서요.”

    사과도 없이 그 한마디뿐이었다.

    저와의 약속은 지킬 가치도 없다는 듯이 냉담한 낯을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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