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그는 붙잡을 새도 없이 캐슬린의 품에 쓰러졌다.
“각하, 계십니까?”
대리석 복도에 구둣발이 바쁘게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알스도프가 나타났다.
“아, 마님.”
그는 쓰러진 발텐 공작의 한쪽 어깨를 안은 캐슬린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했다.
“집사님,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당황한 나머지 캐슬린은 하대하는 것도 잊고 알스도프를 향해 말했다. 발텐 공작은 이미 목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이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공작님께서 기절하셨나 봐요.”
“예, 제가 옮기겠습니다.”
알스도프는 다소 서두르며 발텐 공작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운 후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만 들어가 보시지요. 밤이 늦었습니다.”
“아. 네. 늦은 시간인데 깨어 있으셔서 다행이에요. 저 혼자서 어찌해야 하나 걱정했거든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
알스도프가 부드럽게 공대에 대한 지적을 했을 때야 캐슬린은 제 실수를 깨달았다.
6년 동안 하녀로 살았던 캐슬린에게 공작저를 통솔하는 집사는 몇 계급이나 높은 상관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알스도프는 윈스턴 백작보다도 나이가 많아, 아무리 신분이 바뀌었다고 해도 바로 하대하기가 어려웠다. 알스도프는 그 사실을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웃어 준 후 발텐 공작을 부축하여 사라졌다.
“바보 같아.”
정원을 거닐며 캐슬린은 입 안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미 발텐 공작이 내민 손을 잡았으면서 왜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 모든 게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는데 조금 외로워지는 기분이라는 이유만으로 울적해지다니.
‘배부른 소리지. 이렇게 되길 선택하지 않았다면 이미 죽었을 텐데.’
혼자 죽으면 다행이지, 에밀리까지 죽게 될 거다. 그리고 그 전에 발텐 공작이 죽겠지.
정원의 흔들의자에 앉아 그렇게 스스로 위로해 봐도 울적한 기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애써 다르게 생각해 봤자 캐슬린의 눈앞에 닥친 현실은 분명했다. 그녀는 그날 밤의 선택으로 같은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며 늘 함께 있어 줄 사람들을 포기했다.
친구였던 에밀리는 그녀를 주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마음을 열어 주던 동료들은 돌아섰다.
칼자루가 목에 들어오거나 치마를 걷으라는 불호령보다는 견디지 못할 일도 아니었으나 캐슬린은 우습게도 서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저는 아마 죽을 때까지 유대의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점차 무뎌지겠지.’
이런 어리광도 살 만하니 드는 생각일 거다. 캐슬린은 그렇게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침실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다.
찬 바람에 오스스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막 본관에 들어서려던 찰나, 희미한 불빛이 반짝거렸다. 발텐 공작의 침실에서 비친 것이었다.
‘아직 의사를 안 불렀나?’
커튼 너머가 어두운 것으로 보아 불을 켠 게 아닌 듯했다. 아까 보니 당장이라도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은 상태던데 설마 혼자 있는 걸까?
캐슬린은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어 안으로 들어왔다. 계단을 올라 그와 그녀의 침실이 있는 복도 앞에 이르기까지 희한한 고요는 계속되었다.
저택의 주인이 펄펄 끓는 몸을 하고서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저택 안은 어두컴컴했으며,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노련한 집사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싶기도 했으나 이대로 침실로 돌아가 버리기엔 마음에 걸렸다. 뺨을 감쌌던 뜨거운 손이 맥없이 떨어지던 광경이 자꾸 생각나는 탓이기도 했다.
결국 캐슬린은 잡았던 침실 문 손잡이를 놓고 발텐 공작의 침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망설이며 살짝 문을 두드렸는데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어쩌면 잠에 빠졌는지도 몰라.
집사님은 공작님을 예전부터 모셨으니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아실 거야. 나까지 있을 필요는 없겠지.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어쩐지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제가 먼저 발텐 공작의 침실에 발을 들였단 사실을 유모가 알면 별관이 또 뒤집힐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캐슬린은 고민 끝에 문을 살짝 밀어 보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저…….”
열린 문틈 사이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작게 불러 보았으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방은 어두웠고 흔들리는 촛불 하나만 침실을 밝히고 있었다.
고요한 침실에 가쁜 호흡이 미약하게 울렸다. 캐슬린은 그게 출입문에서 멀리 떨어진 침대 쪽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날 밤과는 확연히 다른 환자의 숨소리였다.
캐슬린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침대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마에 다시 손을 얹어 보는데 술 냄새가 훅 풍겼다.
‘……아깐 안 났는데.’
당황해서 잘못 기억하는 건가 싶었다. 어쨌든 이렇게 온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마셨다면 열이 오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수건을 가져왔습니다.”
어느덧 알스도프가 나타나 물수건을 내밀었다. 캐슬린은 그것을 받다가, 그에게서 발텐 공작과 같은 술 냄새가 난다는 걸 깨달았다.
‘집사님은 술을 안 드시는데. 부축하다가 묻었나?’
술이라곤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멀쩡한 발음으로 알스도프가 말했다.
“각하께서 요즈음 공무가 많으셔서 쉬질 못하셨습니다. 좀 쉬라고 말씀드렸더니 과음하신 모양입니다. 가끔 있는 일이지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일러 주는 목소리가 평온했다.
“정말 카벨 선생님을 부르지 않아도 괜찮나요? 열이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일로 소란 떨지 말라고 각하께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늘 온유하던 그가 일순 단호해졌다. 하긴, 결혼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아내보다야 십수 년을 함께 지낸 집사가 그의 심중을 더 잘 알 것이다.
“각하께서 깨실 때까지 계시겠습니까?”
“제가요?”
뜻밖의 말에 의아해하는 캐슬린에게 알스도프는 찬물이 담긴 수반에 새로운 수건을 적셔 건넸다.
“각하께선 열만 떨어지시면 편히 잠드셨다가 아침에는 멀쩡하게 일어나실 겁니다. 그래서 저도 늘 열이 떨어질 때까지만 살펴보곤 했습니다. 수건만 바꿔 드리면 됩니다.”
알스도프는 이 결혼이 사랑 없이 이루어졌으며 유모인 듀록 남작 부인이 하녀였던 그녀를 못마땅해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옆자리에 앉도록 권유하는 건 일종의 배려였다. 서류상으로만 부부인 그들의 사이가 가까워지길 바라는.
“네, 그럴게요.”
캐슬린은 순순히 물수건을 받아 들었다. 발텐 공작이 눈을 뜬 후 저를 보고 언짢아하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알스도프의 마음이 고마웠다. 어차피 발텐 공작이 잠드는 걸 보고 나서 다시 침실로 돌아갈 생각이기도 했다.
알스도프가 돌아간 후 캐슬린은 물수건을 만져 보았다. 이마에 놓인 수건은 벌써 미지근하게 변해 있었다. 캐슬린은 수건을 찬물에 적셔 다시 이마에 올려놓았다.
‘과로하셨으면 쉬셔야지 왜 몸을 괴롭히신담.’
뜨거운 이마에 놓인 수건은 빠르게 냉기를 잃었다. 수반에 담겼던 물도 어느덧 미지근해졌다. 아직도 열은 떨어지지 않아서 그대로 돌아가는 건 무리였다. 물 표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차갑게 만들어 보려 애썼지만 잘되지 않았다. 몇 번 시도하던 캐슬린은 한숨을 쉬며 수반을 다시 내려놓았다.
‘옷이라도 갈아입혀야겠다.’
술병이 났대도 환자는 환자니까 겉옷이라도 벗겨야겠다 싶었다.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상의 재킷을 잡아당겨 벗긴 후, 베스트에 손을 댔다.
툭.
베스트를 벗기다가 잘못했는지 셔츠 단추가 터졌다. 어두운 불빛 아래 드러난 발텐 공작의 가슴이 한결 편안해진 듯 크게 오르내렸다.
목깃 사이로 보이는 살갗에 괜히 얼굴이 붉어져, 괜히 침대 아래로 내려와 다시 물수건을 집었다. 그러다 수반에 손가락이 닿았는데 순식간에 물에 살얼음이 끼었다.
‘맨살을 처음 본 것도 아닌데 긴장할 건 또 뭐야.’
캐슬린은 애써 아무렇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다시 시원해진 물수건을 바꾸어 발텐 공작의 이마에 놓았다.
초의 허리가 반쯤 녹아 사라질 때까지 캐슬린은 몇 번이나 물수건을 바꾸었다. 그리고 뜨겁던 이마가 점차 열을 잃고 식어 갈 즈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막 해가 떠오를 즈음이 되었을 때는 침대 머리맡에 엎드린 채 완전히 수마에 빠져 버렸다.
“……으음.”
한참 동안 잠에 빠져 있던 캐슬린의 눈꺼풀이 느리게 위로 올라갔다.
‘세상에. 언제 잠들었지?’
아직도 제가 공작의 침실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캐슬린은 재빨리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미 해가 떴는지 사위가 훤했다.
‘어?’
그런데 침대에는 발텐 공작이 사라지고 없었다. 침실 안에도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부산하게 사용인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려 보니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는 침실을 나간 모양이었다.
‘그래도 괜찮아졌나 보네.’
몸은 찌뿌둥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캐슬린은 구겨진 잠옷 자락을 펴고 다시 돌아가려고 그의 침실에서 나왔는데, 바로 누군가와 마주쳤다. 빗자루와 먼지떨이를 들고 놀란 듯한 표정을 짓는 이들은 하녀였을 때 대화를 나누어 안면이 있는 하녀들이었다.
“어?”
“아. 좋은 아침이야, 모니. 그리고 줄리.”
캐슬린이 조금 반가운 기색으로 인사를 했는데도 그들은 얼떨떨하게 고개만 숙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님.”
유난히 딱딱한 몸짓에다 아래로 고정한 시선이 저를 반기지는 않는 듯했다. 캐슬린은 어색하게 흔들던 손을 거두고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또 주인님의 침실에 숨어들었나 봐?”
그러다 막 모퉁이를 돌자마자 뒤에서 들려오는 귓속말을 듣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제 결혼까지 했으니 눈치 볼 거 없겠지, 뭐.”
“주인님께선 별로 좋아하시지도 않는 눈치던데 배알도 좋다. 걔 예전에는 이런 애인 줄 몰랐는데 낯도 정말 두껍네.”
“원래 사생아들이 그래. 출신부터 천박해서 그런가.”
벽에 가려진 상태여서 그녀가 듣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 그들은 킬킬거리며 창문을 열고 청소를 시작했다.
“백작 부인 소생 영애가 있는데도 뻔뻔하게 백작가의 장녀 자릴 차지했다잖아. 귀족가 사생아들은 원래 그렇게 물불 안 가리고 출세에 미친다더라.”
“주제를 알아야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날뛰는 걸 보니 내 얼굴이 다 뜨겁네.”
이 저택의 사람들도 다 저렇게 생각하고 있겠구나.
윈스턴 영지에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오해라고 말하면 믿어 줄까?
‘아니, 그래도 조롱하겠지.’
윈스턴 영지에서도 그랬다. 억울함과 분한 마음이 뒤섞였다. 믿어 주지 않는다고 해도 한마디는 하고 싶어서 뒤를 돌았을 때였다.
“그래서, 사생아는 어떻게 하면 주제를 아는 거지?”
모퉁이 너머에 긴 붉은 망토 끝자락이 보였다.
“주, 주인님!”
“발 딛고 선 곳이 어딘지 잊었나 본데, 그런 소릴 당당히 지껄이는 걸 보니.”
고저 없이 나른한 음성이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처럼 들렸다.
“주인님, 그, 그게 아니라 저희는…….”
“각하, 진정하십시오.”
알스도프가 수습하려 끼어드는 것 같았으나 발텐 공작은 멈추지 않았다.
“원래 인간은 물불 안 가리고 날뛰어야 제 쓸모를 찾는 거다. 그래야 너희처럼 천박이니 뭐니 지껄이는 것들을 짓밟지.”
“주, 주인님…… 말실수를 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나도 내 부모를 잊고 날뛰어서 이 자릴 얻었거든. 그러니 너희 수준에서 안 맞는 이 천박한 가문에서 당장 꺼져라.”
모니와 줄리가 엉엉 울며 빌기 시작했지만 발텐 공작은 그대로 무시한 채 알스도프에게 명했다.
“발텐에서 고용한 저들의 가족까지 다 쫓아내.”
“예, 각하.”
“주인님, 제가 맨손으로 나갈 테니 제발 저희 아버지는 그대로 일하게 해 주세요. 제발요!”
발텐 공작은 그대로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리고, 알스도프가 그들을 데리고 내려갔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그렇게 점차 멀어질 때까지 캐슬린은 가만히 서 있었다.
‘원래 물불 안 가리고 날뛰어야 쓸모를 찾는 거라고…….’
그가 했던 말을 입 안으로 읊어 보는데 이상하게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마치 그게 저에게 묶여 있던 족쇄를 풀어 주는 말처럼 느껴졌다.
한평생 고통스러웠던 사생아라는 신분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며 당당한 그가 부러웠다.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와 자신이 생각보다 더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캐슬린은 가만히 심장 위에 손을 얹고 점차 빨라지는 고동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알렉시스 발텐이야말로 저를 세상에서 잘 이해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날 이후부터 캐슬린은 새끼 오리가 어미만 따르듯 남편의 뒷모습만 좇았다.
정말로 그가 저를 이해해 줄 사람이라면, 이 결혼도 얼마든지 버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마음도 열어 주겠지.
캐슬린은 더는 외로워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