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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46)화 (46/110)
  • 46화

    이사벨라는 틀어 잡힌 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알렉시스는 캐슬린과 전혀 닮지 않은 윈스턴 백작의 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얼마든지 제적시켜. 윈스턴 따위에 캐슬린 발텐이 묶여 있는 것,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안 들었거든.”

    헤아려 올라갈 시간은 아득했다. 알렉시스는 열다섯 이전의 캐슬린 윈스턴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북쪽 국경에 가까운 윈스턴 영지에서는 전해지는 소식도 적었다. 결혼 전 사람을 보내 모아 온 정보는 극히 피상적이었다. 족보에는 적녀로 기재되어 있으나 사실은 사생아이며 모친은 북부 이민족이라는 사실뿐이었다.

    북부의 삶이 싫증 나서 수도로 도망쳐 왔다고,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다. 진짜 백작 부인의 딸인 이사벨라 윈스턴과 비교당하는 삶이 싫어 차라리 공작저의 하녀로, 황후의 첩자가 되기를 선택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최근에 다시 윈스턴 영지로 사람을 보내 알아 온 정보에 이사벨라 윈스턴이 그의 부모와 함께 그녀에게 어떤 짓을 했었는지 상세히 적혀 있는 걸 보았다. 알렉시스는 그제야 제가 없던 그늘에서 살아온 그녀가 어떤 시간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알아서 꺼져 주겠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지. 이제 앞으로 윈스턴은 북부에도, 마이어에도 발붙일 일 없겠군.”

    손에서 힘을 빼자 이사벨라는 거센 기침을 뱉어 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마부가 황망하게 달려와 그녀를 일으켰다. 손자국이 남은 목을 더듬으며 저를 올려다보는 붉어진 흰자위가 원망으로 가득했다.

    “정말, 정말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각하의 부인이 백작가의 사생아가 되어도요?”

    “달라질 것도 없지. 나 역시 황제의 사생아인데.”

    알렉시스는 무감한 낯으로 이사벨라가 제출한 증명서를 그녀에게 던졌다.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변경백의 적녀라는 신분 따위는 하등의 쓸모도 없다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이사벨라는 모욕감에 몸을 떨며 치맛자락에 떨어진 증명서를 구기듯 집어 들었다.

    황제에게 인정받은 사생아. 전장에서 피를 흘리고 결국은 제국의 최고위 귀족 자리를 성취한 사내.

    그에게는 어쩌면 처음부터 백작가의 신분 따위는 발길에 채는 자갈처럼 하잘것없는지도 모른다.

    “내 아내의 얼굴을 봐서 이쯤하고 보내 주지. 더는 여기서 얼쩡거리지 말고 사라져.”

    비틀거리며 일어선 이사벨라를 벌레라도 되는 듯 보던 알렉시스가 말했다.

    “한 번만 더 이딴 짓거릴 했다간 변경백 자리가 아니라 목 내놓을 각오를 해. 네 아비든 너든.”

    알렉시스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이사벨라는 눈앞에서 철옹성처럼 견고하고 높은 쇠문이 열렸다 닫히는 것을 보았다.

    저는 한 번도 디뎌 보지 못한 화려하고 안락한 공간. 그곳에서 호화찬란한 것들에 휩싸여 시간을 보낼 여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캐슬린 윈스턴.”

    이사벨라는 붉은 입술을 짓씹는 잇새로 원수 같은 이름을 되새겼다. 천하고 더러운 핏줄이 그 모든 것을 소유하도록 두어선 안 됐다. 처음부터 그리 놓아주는 게 아니었는데…….

    트리벨리언의 최고위 귀족을 낚아챈 것만으로도 모자라 그의 후계자를 낳았다. 앞으로 그녀에게 주어질 길이 실크보다 부드러울 것이라 생각하니 숨이 막혀 죽고만 싶었다.

    ‘내가 그렇게 둘 것 같아?’

    윈스턴 백작가의 적녀는 저였다. 이사벨라는 험난하고 고된 길을 순순히 걸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다행히 그녀에게는 마지막으로 남겨둔 선택이 있었다. 아주 좋은 패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쓸 만했으며, 무엇보다 캐슬린 윈스턴에게 제대로 본때를 보여 줄 수 있을 거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었다.

    “호프웰 백작께 가자.”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마차에 올라탔다.

    * * *

    캐슬린은 남편을 사랑하게 된 날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편이었다.

    급작스레 결정된 결혼은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았다. 서로 주고받을 조건이 명확했기에 더욱 그랬다.

    “켈리…… 아니, 마님. 주인님께서는 오늘도 늦으신다는데요.”

    며칠 전 보직이 변경되어 시녀가 된 에밀리가 조금 어색하게 말을 높였다.

    “먼저 주무시는 게 낫겠어요.”

    캐슬린은 흘깃 창밖을 봤다. 이미 해는 어둑하게 지고 있었다.

    벌써 결혼한 지 한 달이 지났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치른 결혼을 반기지 않는 이들은 많았다. 황실은 물론이고 고위 귀족들, 그리고 공작저 내부의 사용인들이 그랬다.

    “유모님이 부르기 전에 얼른 잠든 척하자.”

    에밀리가 밖을 지나다니는 사용인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결혼을 제일 크게 반대한 장본인이자 실질적으로 이 저택의 안주인 행세를 하는 유모는 캐슬린의 조그만 실수라도 잡아내려고 혈안이었다. 겉으로는 드러내 표현하지 않아도 그런 유모에게 동조하는 사용인들도 여럿이었다.

    사실 캐슬린은 유모나 황후는 크게 두렵지 않았다. 이미 발텐 가의 일원이 된 사람에게 크게 위해를 가하지는 못할 테고,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 사람들도 아니었으니까.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그런데 사용인들은 달랐다.

    주방 하녀일 때는 친분이 없는 사이라 하더라도 마주치면 싱긋 웃으며 인사 정도는 먼저 건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로는 밤늦게 김빠진 맥주나 다 식은 구운 감자 따위를 나눠 먹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자신의 근무가 일찍 끝나 시간이 남으면 서로의 일을 도우며 통성명을 하고, 정원을 산책하며 살갑게 지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공작 부인이 되고 나니 저를 보는 눈빛은 차가워졌다. 복도를 지나다 마주친 이들의 낯이 익어 인사라도 건넬라치면 고개를 숙이고 눈조차 마주치기 싫어했다. 멋쩍어진 그녀가 멀어지면 그들은 저희끼리 무어라 수군댔다.

    주방장도, 정원사도, 주방과 빨래방 하녀들도.

    그리 친하지는 않았어도 6년 동안 동료 의식을 나누었던 이들이 겨우 한 달 만에 뒤바뀌어 버린 게 낯설었다. 캐슬린이 편하게 생각해 달라고 말해도, 그들은 입을 다물고 듣지 못한 척했다.

    빨래방 하녀에서 단박에 공작 부인의 시녀가 된 에밀리의 사정도 비슷했다. 그래도 에밀리는 빨래방 하녀들과는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인들의 태도가 변한 이유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 마님이 자신들을 이용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주인님과 결혼하려고 백작 영애인 걸 감쪽같이 속이고 수를 쓴 거라면서요.

    적의의 이유를 알고 나니 맥이 풀렸다.

    동료들을 속인 건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평민 출신이라고 거짓말했고, 익숙지 않은 일을 하면서 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니 제 잘못이 맞았다. 캐슬린은 허탈해지는 기분을 추스르려 애쓰면서 시간이 지나면 그들과 다시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커다란 저택 안에서 홀로 남겨진 기분을 떨쳐 낼 수는 없었다. 친구였던 에밀리조차 이제는 깍듯이 선을 지키려 노력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럼 좋은 꿈 꾸세요, 마님.”

    에밀리가 잠자리를 봐 준 뒤 문을 닫고 나갔다. 캐슬린은 커다란 침대에 홀로 누운 채 잠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나도 정신은 더욱 맑아지기만 하고 잠은 오지 않아서, 몇 번이고 뒤척이다가 결국은 일어나서 창가에 앉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그믐이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만 기분에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얇은 깃털 이불을 그러모아 덮다가 문득 남편은 무얼 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발텐 공작은 황제의 장남이니만큼 맡은 업무가 많았다. 황태자가 어린 만큼 그를 보좌하는 일이 주 업무였으나 실상은 대부분의 일을 전담한다고 들었다.

    ‘그럼 오늘도 안 올 수도 있겠지.’

    저택의 사람들이 모두 잠든 듯 고요했다. 캐슬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이불을 걷고 침실 밖을 나섰다.

    하녀였을 때는 맡은 일만 해내면 되니 자유로웠다. 그러나 지금은 한 발짝만 걸음을 떼도 온갖 시선이 날아들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물 마시는 것 한 모금, 산책 한 번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 캐슬린에게 그믐날 어둠은 절호의 기회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어둡긴 했지만 정원에 나가 잠깐 산책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죽여 가며 막 본관의 입구에 다다라 육중한 문을 살짝 밀었을 때였다.

    ‘어?’

    석조 계단 아래, 바로 문 앞에 누군가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남자 같았다.

    순간 침입자인가 싶었으나 공작저의 보안이 그리 허술할 리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게다가 정말 자객이라면 정문 앞에 주저앉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문 틈새로 빠져나왔을 때였다. 남자의 몸이 옆으로 스르르 무너졌다.

    ‘저대로 넘어지면 이마가 깨질 거야.’

    혹시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정원사 아저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뛰어나가 남자의 한쪽 어깨를 잡았다.

    “괜찮…….”

    가까이 다가가 본 남자의 얼굴은 캐슬린이 이 저택에서 본 사람 중 가장 낯설었다.

    알렉시스 발텐.

    그녀의 남편이었다.

    얼떨결에 그의 어깨를 안듯이 받친 캐슬린은 당황했다.

    “저기…….”

    작은 소리로 불러 봤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공작님?”

    감긴 눈은 뜨일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대로 잠들어 버린 건가, 하고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이던 캐슬린은 문득 그의 이마가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상에. 열이 나잖아.”

    이마는 불덩이였다. 과로해서 병이라도 난 걸까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일단 그를 안으로 데려다 놔야겠다고 결심했다.

    “공작님, 잠깐만 정신 차려 보세요.”

    소맷자락으로 이마를 닦으면서 몸을 흔드니 눈꺼풀이 움칠 떨렸다. 이윽고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다.

    이유 모를 열기에 휩싸인 황금색 눈동자는 당황 어린 연청색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한쪽 뺨을 감쌌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질 않았다. 결혼식 때도 서약을 읊기 위해 손을 잡았었는데 새삼스레 긴장할 것 없다고 되뇌어 봤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공작님?”

    감히 손을 쳐 낼 엄두는 나지 않아 그의 다른 어깨를 잡던 참이었다.

    툭.

    뺨을 감쌌던 손이 떨어지고 그의 몸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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