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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45)화 (45/110)

45화

황궁 파티에서 또다시 도망치다시피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반응이 쏟아졌다.

“마님, 이게 다 초대장들이에요.”

에밀리가 알록달록한 봉투를 한 아름 안고 들어와 내려놓았다. 이미 눈앞에도 소복하게 쌓여 있는 초대장 무더기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캐슬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내게 온 게 맞아?”

“네, 그럼요. 여기 수신자 란에 마님의 성함이 똑똑히 쓰여 있는걸요.”

캐슬린 발텐 공작 부인 귀하.

의심할 여지도 없이 큼직하게 쓰인 글씨가 명확하게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도 힐난의 눈초리가 쏟아졌다. 겨우겨우 자리를 지켰다 돌아오면 다음 초대장은 한두 달이 지나야 도착할까 말까였다.

그런데 지금은…….

“카비르 후작가에서는 티타임 초대장을 벌써 여섯 번이나 보내셨어요.”

가문별로 초대장을 분류하던 에밀리가 감탄하며 물었다.

“여기엔 참석하실 생각이세요?”

“아니.”

캐슬린은 카비르 후작 부인이 보낸 초대장을 펼쳐 읽다가 다시 치워 버렸다. 누가 목에 칼이라도 들이민 듯 간절하게까지 보이는 필체에도 마음은 동하지 않았다.

- 몸으로 지위를 얻었는데, 얼굴이 웬만큼 두껍지 않고서야 이런 자리에 나타나겠어요?

카비르 후작 부인은 트리벨리언의 수도 마이어 사교계에서 공공연하게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했었다. 황후와 공작 부인을 제외하면 사교계의 정점에 선 자신의 말이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 잘 알면서도.

이전에는 그녀가 저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신경 쓰느라 괴로웠다. 어찌해서든 발텐 공작 부인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에.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다 치워 버려.”

에밀리는 재빨리 하녀에게 눈짓해 초대장을 벽난로에 태우게 했다.

“마님, 그리고 마담 메텔린이 방문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 왔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마담 메텔린?”

그녀는 마이어에서 최고위 귀족들만 상대하는 재단사였다.

본디 귀족들은 대부분 가문에 소속된 재단사를 두었으나, 고위 귀족가에서 근무하다 계약 기간이 끝나 자유로워진 이들 몇몇은 주문 제작을 받는 의상실을 꾸리기도 했다. 메텔린도 그런 경우였다.

그녀는 고급스러운 실크만 취급할 뿐 아니라 독특한 디자인으로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제작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아, 사교계의 유행을 이끌고 싶다면 그녀의 손을 꼭 거쳐야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런 만큼 자부심도 대단해서 황실의 제작 의뢰라 해도 무조건 수락하지는 않는다고도 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이곳에는 왜 온다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 기억으론 따로 제작 의뢰를 넣은 적은 없는데.”

“아아, 마담 메텔린이 제작 범위를 넓히려고 한대요. 드레스나 액세서리 말고도 유아용품을 제작하려고 한다는 이야길 들었어요. 아기 옷이나 턱받이, 그런 것들요.”

에밀리는 평소답지 않게 한껏 들뜬 얼굴로 소개서의 한쪽 면을 펼쳐서 내밀었다.

“마님과 도련님께 미리 선보이고 싶다는 뜻이 아닐까요?”

받아 든 소개서에는 어머니와 아이가 함께 착용할 수 있는 옷과 액세서리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3년 전에 이 연락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발텐 공작의 아이가 인정받을 기회라고 생각해서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받아들였겠지.

아직 성별도 모르고 이름도 없었지만 그만큼 캐슬린은 아이를 사랑했고, 제가 아이를 사랑하는 만큼 알렉시스도 그래 주길 바랐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아이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받아들여서 좋을 것은 없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한다고 전하렴.”

“정말 거절하시려고요?”

눈을 동그랗게 뜬 에밀리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마담 메텔린이 처음 만든 아기 옷을 도련님이 입으면 정말 예쁠 것 같은데요.”

“그녀가 그런 제안을 해 온 이유가 뭐일 것 같아?”

캐슬린의 얼굴이 기뻐 보이지 않자 에밀리가 손짓해 다른 하녀들을 내보냈다.

“다들 루치가 발텐의 후계자라고 여겨서 다가오는 거야.”

“마님…….”

“알잖아, 에밀리. 나는 언제까지나 여기 있지는 않을 거야. 루치도 마찬가지고.”

소개서에 그려진 연하늘색의 아기 옷은 정말로 귀여웠다. 어머니에게 추천하는 실내용 드레스도 같은 색이었다. 그러나 캐슬린은 그것을 뒤집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약간 실망감이 어린 얼굴이었지만 에밀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이런 제안이 오면 잘 거절해 주렴.”

캐슬린은 초대장을 보내온 가문이 정리된 목록을 한번 들여다보고 그것마저도 치워 버렸다. 답장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것으로 공작 부인의 평판이 떨어지고 세간의 관심이 줄어드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바라는 바였다.

* * *

“죄다 거절했다고?”

“네, 주인님.”

캐슬린의 침실과 응접실 청소를 담당하는 하녀가 조심스레 그을음이 묻은 종잇조각 몇 개를 내밀었다.

타다 만 파티 초대장과 마담 메텔린의 의상 소개서였다.

“초대장에는 답신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알았다. 이만 나가 봐.”

하녀가 나가자마자 알렉시스는 지끈거리기 시작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헛소리를 지껄인 장본인 카비르 후작 부인이 갱생의 기회를 잡고자 보낸 초대장을 무시할 것은 알고 있었다. 여태껏 주제도 모르고 날뛰었으니 이번에는 캐슬린이 그녀를 짓밟을 기회를 준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초대장까지 무시할 줄은 몰랐다. 아니, 차라리 외면에 가까웠다. 사교계에서 발텐 공작 부인이 원래 가져야 할 권위를 되찾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마이어에서 제일로 손꼽힌다는 디자이너의 방문도 거절했다. 아이까지 함께 드높은 권위를 다시 얻을 기회였는데 고민하지도 않고 걷어찼다.

‘대체 어떻게 해야 널 붙잡을 수 있는 걸까.’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떠날 것처럼 모든 걸 정리하는 그녀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알렉시스는 숨통이 졸리는 착각이 들어 목을 죄는 크라바트를 다소 거친 손길로 풀어 헤쳤다.

“각하, 방문객이 찾아왔습니다.”

알스도프가 다소 경직된 얼굴로 집무실로 들어왔다. 알렉시스는 물 잔을 잡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미 캐슬린이 모두 거절했을 텐데. 누가 굳이 찾아오기까지 했지?”

주제도 모르고 감히 발텐을 모욕한 버러지 같은 것들이 기웃거리다니, 남부가 아니라 수도에서 박살을 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알스도프가 내민 방문자의 증명서에는 예상치 못한 가문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윈스턴?”

“예. 이사벨라 윈스턴 양이 정문에 도착했습니다. 마님을 뵙고 싶다고…….”

“돌려보내.”

알렉시스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말을 잘랐다. 파티에서 돌아온 이후 그녀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카벨 선생의 말로는 심리적인 긴장 상태가 심해져서 그러는 것이라 했다. 그 이유가 윈스턴 백작 때문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복동생의 얼굴을 볼 이유는 없었다.

“마님을 뵙지 못하면 이대로 황궁으로 가겠다 합니다. 각하께서 윈스턴 백작에게 보복한 것을 정식으로 고발하겠다고요.”

“부녀가 쌍으로 꼴사나운 짓을 하는군.”

황태자의 옛 약혼녀이니 황후가 내치지 못할 것을 알고서 발악하는 것이다. 그대로 궁정 회의에 달려가 저에 대한 처분을 안건으로 올린다 해도 알렉시스로서는 별 상관이 없었으나, 그리하면 캐슬린도 알게 될 것이다.

알렉시스는 짜증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내가 나가 보지. 캐슬린은?”

“침실에 계십니다. 도련님이 낮잠을 주무실 시간이라서 한동안 나오시지 않을 겁니다.”

“잘됐군. 다들 입단속 제대로 시켜.”

그렇지 않아도 윈스턴 백작의 팔을 꺾어 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느끼던 차였다. 알렉시스는 본관을 나와 정문으로 향했다.

“공작 부인을 만나야겠다 하지 않았느냐!”

“허가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윈스턴 영애. 물러서십시오.”

마차에서 내린 이사벨라가 쇠창살을 너머에 두고 출입자를 관리하는 기사와 맞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알렉시스가 가까이 다가가자 기사가 무장을 거두었다.

“문 열어.”

“예, 각하.”

그를 발견한 이사벨라는 반색했으나, 알렉시스가 열린 틈으로 나서자마자 다시 문을 닫게 지시하자 얼굴이 당황으로 굳어졌다.

“가, 각하.”

“할 말이 있다고?”

귀찮은 버러지 따위에 시간을 오래 내어 줄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이사벨라 윈스턴 역시 북부에서 제 아비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으니.

“들어가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윈스턴 백작가의 여식으로서 지나친 요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리 길가에 세워 두시는 건 예법에 맞지 않습니다.”

보랏빛 눈에 담긴 고집은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가 싶을 정도로 끈질겨 보여서 헛웃음이 났다.

“윈스턴 영애, 내가 왜 그대에게 예법을 차려 대해야 하지?”

파들거리면서도 이사벨라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

“저는 각하께 기회를 드리고자 찾아온 거예요. 캐슬린이라는 이름이 윈스턴 가의 족보에서 지워질 상황이라는 건 아시나요?”

캐슬린 윈스턴이 주방 하녀로 일했다는 결점에도 공작 부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백작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신분이 거두어진다면 발텐의 안주인은 평민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북부의 변경을 지키는 백전노장의 한쪽 팔을 기괴하게 부러뜨려 불구로 만든 대가치고는 약소했으나, 이사벨라는 이만하면 그에게 충분한 타격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발텐 공작은 별 반응이 없었다. 조금도 놀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두고 보실 생각이세요? 공자님은 생각지 않으시나요? 생모의 신분이 평민이면 차기 발텐 공작위 승계는 어렵다는 걸 아시잖아요.”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물었잖아?”

훅 가까워진 발텐 공작의 금안이 이상하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저도 모르게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캐슬린이 그의 약점인 줄로 알았는데, 공작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그래도 준비해 온 말은 꺼내야 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윈스턴 가는 그대로 몰락하고 말 테니까.

“각하께서 제안하신 변경백 권한 격하 건을 취소해 주세요. 아버님이 불의의 사고로 다치셨지만 곧 회복하실 거예요. 아버님은 변경백이 되신 후 줄곧 충성을 보이셨는데 이런 대우를 받는 건 부당해요!”

“불의의 사고라고 윈스턴 백작이 그러던가?”

“그, 그건…….”

아버지는 팔을 잃은 충격으로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러니 당연히 사고였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사실을 지적받으니 말문이 막혔다.

“애석하게도 윈스턴 영애. 그대의 아비는 사고를 당한 게 아니야. 응분의 대가를 받은 거지.”

“네? 그게 무슨.”

“아니군. 생각해 보니 처분이 모자랐나 봐. 팔 하나가 아니라 둘 다 꺾어 놨어야 하는데.”

“각하!”

설마 변경백의 팔을 그렇게 만든 게 당신이냐고 물으려는데 멱살이 잡히더니 순식간에 마차 벽에 밀어붙여졌다.

“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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