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44)화 (44/110)

44화

“어디가 아픈지 말해 봐.”

정신없이 저를 살피는 알렉시스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아프지 않아요.”

캐슬린은 분수대 안에 벌겋게 번지는 핏물을 보며 몸을 떨었다. 알렉시스는 기괴하게 팔이 꺾인 윈스턴 백작을 그녀가 보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여긴 어때?”

손가락 사이의 힘줄과 손등의 작은 뼈까지 세심하게 문지르며 확인하는 그의 손에선 온기가 묻어났다.

“괜찮아요.”

얼떨결에 대답한 캐슬린은 들려오는 윈스턴 백작의 신음에 움찔했다. 그와 동시에 알렉시스에게 잡혀 있는 오른손이 싸늘해지더니 작은 얼음 결정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셴베르크 백작에게 장갑을 건네주어 맨손인 탓에 그 모습이 더욱 적나라했다.

“아…….”

한동안 이렇게 조절하지 못한 적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잡힌 손을 빼내려는데 알렉시스가 그대로 감싸 쥐었다. 순식간에 얼음이 돋친 손이 그의 손안에 숨겨졌다.

“돌아가지.”

알렉시스는 짧게 말하더니 그대로 연회장 밖으로 나섰다. 입구에는 공작가의 마차가 그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캐슬린을 먼저 들여보내더니, 올 때와는 달리 맞은편에 앉아 뚫어질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샅샅이 훑다가 손을 뻗었다.

“이게 떨어졌군.”

그는 드레스 프릴에서 귀걸이 한 짝을 찾아내 건넸다. 아마 몸싸움을 하느라 빠진 모양이었다. 캐슬린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귀에 걸었다.

“윈스턴 백작이었나?”

이윽고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그가 물어 왔다.

“아까 그 작자. 네 아비냐는 말이야.”

“네.”

캐슬린은 손에서 얼음 결정이 녹아 사라지는 걸 느끼며 대답했다.

“이전에도 널 때린 적이 있어?”

“…….”

“대답해.”

마차 창틀을 쥔 그의 손에 푸른 힘줄이 불거졌다. 악문 턱에도 역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하는 걸까.’

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

“일부러 꺼내 말할 만큼 유쾌한 주제는 아니니까요. 물어보신 적도 없으셨고요.”

“…….”

“굳이 공작님께 알릴 필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알렉시스의 시선은 가지런히 모아 쥔 그녀의 두 손으로 향했다. 아직 남아 있는 떨림을 들킬까, 캐슬린은 드레스 자락에 손을 숨겼다.

“내가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얼마나 더 있어?”

한참 만에 들려온 목소리는 뜻밖에도 허탈함을 담고 있었다. 그 말이 마치 자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말에 감동하여 기다렸다는 듯 주절거리기엔 우스웠다.

“공작님이 저에 대해 아시는 게 있긴 하셨나요?”

짧은 반문에 그의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일렁이는 금안은 그를 안 이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알렉시스는 재차 물었다.

“신세를 고쳐 보려고 내 침실에 들어왔다고 했던 것도 네 아비 때문이었나?”

당시에는 얼결에 둘러댄 말이었지만 아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옛 주인이었던 발텐 공작을 살린 이유는 아버지를 피해 온 공작저에서 에밀리와 함께 안전하게 살아남기 위해서였으니까.

“네.”

“그러면.”

그가 다급하게 무언가 물으려는 순간 마차가 멈추었다. 캐슬린은 마부가 자리에서 내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숨을 죽였다.

그가 말했다.

“왜 공작 부인이 된 후 나를 사랑했어?”

마부가 문을 가볍게 두들겼다.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캐슬린은 대답하지 않은 채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닥쳐 머리칼이 휘날리는 바람에 그를 가려서 다행이었다.

“……왜 갑자기 그게 궁금해지셨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마부가 내민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여전히 뒤는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이제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사실일 뿐인데요.”

마차에서 내린 캐슬린은 그대로 침실로 향했다. 알렉시스는 그녀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이가 없어 웃다가 눈물이 났다.

그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이제야 과거를 곱씹어 보고 있었다. 제겐 상처만 남았던 그 시간을.

캐슬린은 축축해진 눈가를 닦았다. 이젠 그가 무슨 말로 저를 녹이려 들어도 속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순간의 변덕을 믿고 인생을 거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지, 더는 알고 싶지 않았다.

* * *

페터는 불쑥 나타난 장신의 미청년에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셴베르크 백작?”

“황태자 전하.”

그는 능청스럽게 미소 지으며 무릎을 굽혔다.

“인사는 그만두게. 이미 연회장에서 받았으니.”

“사적으로 뵙는 것은 처음이니 다시 예를 차리는 것이 맞지요.”

“자네가 여긴 웬일이지?”

“글쎄요. 저는 서쪽 테라스가 있는 휴게실을 찾아왔습니다만.”

이곳은 연회장에서 제일 먼 데다 좁기까지 해서 거의 이용하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황궁에 처음 왔다면 길을 잃어도 쉽사리 발을 들일 수 없을 정도로 외진 곳이었다.

턱 끝을 약간 든 채로 두 손을 모으고 선 그를 훑어보던 페터의 눈에 흰 장갑이 들어왔다. 캐슬린의 것이었다.

“그건 무엇이지?”

“이곳의 통행증이라고 들었습니다.”

공손하게 장갑을 내미는 셴베르크 백작은, 이제 입가와 다르게 눈에는 웃음기를 거둔 채였다.

“앉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었으나 페터는 그것을 받아 들고 소파로 가 앉았다.

“몇 번이고 독대를 요청해도 묵묵부답이셔서 못 뵙고 돌아가는 줄 알았습니다.”

셴베르크 백작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역시 발텐 공작 부인께 부탁드리길 잘했네요.”

“그분께 접근하지 말게. 형수님은 이 협상의 대상이 아니니까.”

다소 의외라는 듯 셴베르크 백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공작 부인께선 전하께 누가 될까 말 얹기를 꺼리시고, 전하께선 공작 부인이 엮일까 걱정하시는군요. 황실의 가족애가 이리도 도타울 줄은 몰랐습니다.”

“셴베르크 왕가와는 다른 분위기여서 흥미로운가?”

가볍게 건넨 말에 유들유들한 낯에 금이 갔다. 페터는 팔걸이에 턱을 괴곤 흥미롭게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순식간에 다시 표정을 갈무리한 셴베르크 백작이 말했다.

“왕가가 사라진 지 오래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황실의 가족끼리 가까운 모습이 기뻐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오해하지 마시지요.”

“오해라면 다행이군. 다만 백작이 황실의 분위기까지 살피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페터는 태어난 순간부터 황제의 후계자로 길러졌다. 그래서 협상의 당사자가 조바심을 내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고, 본능적으로 그 위에 올라서야 함을 알았다.

“키아나 셴베르크 양이 황실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설마하니 내가 자네의 유일한 혈육을 박대하겠나?”

“그리 말씀해 주시니 한시름 덜었습니다만, 사실은 오늘 전하께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어떤?”

“황태자 전하께 제 누이동생은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디 이 결혼, 재고해 주십시오.”

셴베르크 백작의 말은 페터도 바라는 바였으나,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쾌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 말을 하러 날 보자고 했나?”

“송구합니다. 하지만 키아나는 전하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는 아이입니다. 황태자비가 되기엔 성정도 유약할뿐더러…….”

“황태자비로 태어나는 이는 없어. 교육받는 것이지.”

“셴베르크 가는 백작가일 뿐입니다. 트리벨리언 황가에 댈 수 없을 정도로 한미하여 부끄럽습니다.”

“작위야 얼마든지 올릴 수 있는 법. 망국이긴 하나 왕손이니 한미하다는 말엔 동의할 수 없군.”

“몸도 무척 약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병을 앓아 방 밖으로 자주 나오지도 않는 아이입니다. 황태자비가 된다면 그 자리를 얼마나 지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는 더더욱 황궁 생활이 필요하겠군. 트리벨리언에서 제일 뛰어난 의사가 있으니 말이야.”

한 치도 물러섬 없이 맞붙는 대화는 점차 과열되기 시작했다. 페터는 아는 것이라곤 이름밖에 없는 셴베르크 백작의 여동생에게 대단한 관심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대체 백작은 왜 이리 동생의 결혼을 반대하는지 모르겠어. 동생이 너무 소중해서 떼어 놓고 싶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내가 눈에 안 차서인가?”

“저는 정말로 전하를 생각하는 충심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둘밖에 없는데 그런 입에 발린 소리는 그만두고.”

페터는 소파에 좀 더 몸을 기대며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진짜 자네 생각을 말해 봐.”

“무슨 말씀이신지…….”

“셴베르크 영애가 아니면 자네가 황실과 결혼하는 건 어떤가.”

“예?”

“그것도 싫다고 할 작정이지?”

셴베르크 백작은 말없이 황태자를 건너보았다. 형제인 발텐 공작과는 다르게 선이 가늘고 예쁘장한 외양인데도 성격만은 그와 똑 닮아 집요한 데가 있었다.

현재 트리벨리언에는 직계 황녀도 없는데 저까지 끌어들여 기어코 정략혼을 운운하다니, 근성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한번 문 걸 놓지 않는 건 이 황실의 특성인지도 모른다.

셴베르크 백작은 웃으며 말했다.

“황실 방계라면 공주님이니 저에게는 분에 넘치는 상대지만, 아직은 자유로운 삶이 좋아서요.”

부러 농담처럼 던진 완곡한 거절에도 페터는 웃지 않았다.

“그럼 셴베르크는 제국에 어떤 방식으로 충성할 생각이지?”

페터는 소파에서 일어나 싸늘하게 말했다.

“과거에 다스렸던 백성의 폭동을 진압할 힘도 없고, 가짜 영애의 이름을 빌려줄 의지도 없고. 과연 충심이라는 게 있긴 한가?”

“전하!”

셴베르크 백작이 얼어붙은 낯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짜 영애라니, 뭔가 오해가…….”

“아. 이미 죽고 없는 여동생이라 해야 옳은가?”

키아나 셴베르크의 죽음은 남부에서도 아는 이가 몇 안 될 정도로 극비 사항이었다. 어떻게 알아낸 건지 감도 안 잡혔다. 만약 그가 잡아뗀다면 황태자는 그대로 셴베르크 영지로 직행해 결혼하겠다고 선언하기라도 할 눈빛이었다.

“숨길 거면 끝까지 숨겼어야지. 그러면 내가 파혼장을 보냈을지도 모르는데.”

순식간에 승자로 올라선 페터는 셴베르크 백작에게 다가왔다.

“그대는 거절할 명분 따위 없어. 셴베르크 영애는 내 약혼녀가 될 거야. 그게 싫으면…….”

그는 손을 뻗어 백작의 어깨 위에 매달린 문장을 내리눌렀다.

“이걸 달고 남부로 내려가 연설이라도 하든가.”

셴베르크 백작의 각진 턱에 힘이 들어갔다. 페터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선택해, 키어런 셴베르크. 제국에 충성하는 방법을 고르는 건 그대의 몫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