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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43)화 (43/110)
  • 43화

    “여전하네요. 또 도망치는 걸 보면.”

    셴베르크 백작 쪽을 집중하고 있던 알렉시스를 지나친 귀부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순식간이었다.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잖아요?”

    “그러게요. 하도 당당해 보이길래 말이나 좀 걸어 볼까 했는데 말이에요.”

    그들은 부채로 입을 가리고 소곤대며 키득거렸다. 비아냥거리는 어조가 가득한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누구인지 정확하지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각하, 그래서 이번에 출정하시게 되면 군대 편성과 물자 보급에 대해서는…….”

    동시에 알렉시스를 둘러싼 이들은 발텐 공작의 남부 전선 출정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었다. 당사자의 의견은 나오기도 전에 타오른 불씨는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출정 따위가 어떻게 결론이 나든 관심 없었다. 그는 위정자들을 헤치고 나와, 서빙하는 시종에게서 샴페인 잔을 집어 드는 척하면서 귀부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지방 영지에서 낳아 왔다던데. 들으셨어요?”

    “그럼요. 공작저 사람 외에는 그 아이를 본 적이 없다고 하니, 황실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소문이 사실이지 않을까요?”

    “배를 맞춘 사람이 그녀처럼 북부 이민족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면 아이가 금안이 아니어도 변명거리가 되잖아요. 한번 가서 슬쩍 떠볼까요?”

    “좋아요. 휴게실로 간댔죠?”

    혈관에 흐르는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어느덧 눈길로 좇던 셴베르크 백작은 인파 사이로 종적을 감추었지만, 그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말없이 귀부인들의 뒤를 따랐다.

    휴게실은 테라스를 지나 이어진 긴 회랑 끝에 있었다. 알렉시스는 회랑 중간에서 그들을 가로막았다.

    “어머, 각하.”

    “여기서 다 뵙게 되네요, 각하.”

    샴페인 잔을 든 알렉시스가 앞에 나서자 귀부인 둘은 당황한 듯 보였다.

    “물을 말이 있어서.”

    기대감에 차서 서로를 쳐다보는 꼴이 우스웠다. 팔랑거리는 부채와 벗어서 쥔 장갑에 수놓인 문장은 어느 가문의 것인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조잡했다.

    그런 주제에 감히.

    알렉시스는 들불처럼 퍼지는 화를 잠재우고자 잔을 단숨에 비우고, 바닥에 던져 버렸다.

    날카롭게 깨지는 크리스털 잔의 소리에 그들의 낯빛이 얼어붙었다.

    “자주 도망쳤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캐슬린 발텐이 사교계 모임에서 자주 도망쳤느냔 말이야.”

    언젠가 그녀의 일정에 관해 물었을 때 알스도프는 ‘정해진 일정이 없다’고 했다. 지체 낮은 가문도 아니고 황족의 방계이자 공작의 작위를 지닌 발텐의 일원이면 그럴 수는 없었다.

    알렉시스는 단지 그것이 캐슬린의 선택인 줄로만 알았다. 황후의 지시를 따랐거나, 아니면 지레 황후의 눈치를 보아 사교계 활동을 삼갔거나.

    그런데 이제야 알았다.

    캐슬린은 철저히 사교계에서 소외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분명했다.

    ‘내가 외면했기 때문에.’

    칼을 삼킨 것처럼 속이 아팠다. 공작 부인의 자리는 제가 끌어올려 앉힌 자리였다. 도망쳤던 그녀를 데려다 방패막이로 살길 요구했다.

    우습게도 그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 허울뿐인 공작 부인 자리에서 캐슬린이 맞아야 했을 칼은 그가 전장에서 맞았던 칼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그렇습니다. 공작 부인께선 뭐라도 켕기는 게 있기라도 하신 것처럼 늘 먼저 자리를 뜨셨어요.”

    “맞아요. 아무래도 북부 출신이라 사교계에 익숙지 않아 더 그러셨겠지만, 공작 부인께선 유독 적응을 하지 못하셨어요.”

    “오늘도 그래서 자리를 뜨신 것 같아 찾아가 보려던 참이었습니다.”

    “네, 설득하여 다시 데려올 참이었어요.”

    가증스럽게도 그녀를 걱정하는 것처럼 꾸며 말하며 은근슬쩍 캐슬린을 헐뜯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얼굴을 더 맞대고 있으면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래, 그랬군.”

    알렉시스는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서 황족을 업신여겼다?”

    “예?”

    “네 입으로 방금 지껄이지 않았나? 카비르 후작가 따위가 언제부터 황족인 발텐을 동정할 수 있었지?”

    “도, 동정이 아니라 저는 단지…….”

    제 가문을 알아볼 줄은 몰랐는지 귀부인 중 하나가 횡설수설하며 허둥지둥 부채의 문양을 가리려 애썼으나 소용없었다.

    “제국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드는 데 카비르 가가 앞장서고 있었군.”

    알렉시스는 후작 부인이 떨어뜨린 부채를 구둣발로 짓밟았다. 부챗살이 힘없이 부러지고 나비 날개처럼 얇은 실크가 찢겼다. 후작가의 문장이 담긴 물건을 눈 깜짝하지 않고 망가뜨리는 그의 모습에 카비르 후작 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데비온 백작가는 신전보다 지혜가 뛰어나서 감히 내 후계자의 자격을 운운했나?”

    “가, 각하. 그게, 그게 아니라.”

    “발텐 공작 부인이 낳은 아들이 발텐의 후계자가 되지 못하면, 누가 후계자가 될 수 있는지 지껄여 봐. 내 데비온 백작가의 의견을 친히 들어 볼 테니까.”

    “잘, 잘못했습니다, 각하. 제가 잠깐 정신이 나갔는지 헛소릴 했습니다. 저는 카비르 후작 부인의 말씀이 진짜인 줄로만 알고…….”

    데비온 백작 부인은 정신없이 주워 섬겼다.

    “후작, 후작 부인께서 은근히 동조하길 강요하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맞장구쳤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아니었어요…….”

    “황족을 모욕하는 발언에 동조해 놓고 데비온 가는 죄가 없다? 지능이 있는지 의심되는 말이로군.”

    그는 백작 부인의 손에서 문장이 새겨진 실크 장갑을 빼앗아 던졌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장갑이 떨어져 두 여자의 드레스에 볼썽사나운 얼룩을 새겼다.

    알렉시스는 벌벌 떠는 그녀들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저들의 목을 따 버리고 싶었으나 황궁의 파티여서 무장을 해제하고 온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는 회랑 중앙 벽면에 걸린 종을 쳐 시종을 불렀다.

    “발텐 공작 각하. 부르셨습니까?”

    잠시 후 나타난 시종은 사색이 된 귀부인 둘을 마주하고 있는 발텐 공작을 보았으나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

    “궁정 회의 구성원들에게 알리도록. 남부 출정의 선발대를 조직할 가문 둘을 정했다고.”

    그의 말에 귀부인들의 얼굴이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정치를 잘 모른다 해도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야만적이고 흉포한 방법으로 전투를 벌이는 남부 이민족들이 수도를 향해 선전포고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트리벨리언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출정을 결정하지 않은 상태로, 근처 영주들이 사병으로 그들을 막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발대로 진압에 나서는 건 자살 행위였다.

    다른 이의 말이었다면 단순히 의견 제시로 받아들여지겠지만, 비공식적으로 남부 출정의 사령관으로 여겨지는 발텐 공작의 의견이라면 문제가 달라졌다. 게다가 그는 황족이니 카비르 가와 데비온 가는 항명할 수 없었다.

    알렉시스는 엉망이 된 부채와 장갑을 주워 시종에게 건넸다.

    “카비르 후작가와 데비온 백작가가 자원했다고도 전하고.”

    두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물건까지 있으니 누구도 발텐 공작의 말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귀부인들은 울부짖으며 무릎을 꿇었다.

    “각하, 각하! 제발, 제발 말씀을 거두어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제가 공작 부인을 시기해서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출정만은 거두어 주세요…….”

    그는 조금의 변화도 없는 얼굴로 머뭇거리는 시종을 노려보았다.

    “얼른 안 가고 뭐 하느냐?”

    “아, 예!”

    시종은 재빨리 연회장으로 뛰어 사라졌다. 알렉시스는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는 귀부인들을 내려다보았다.

    “출정만으로 울면 쓰나. 아직 군수물자 보급선 편성은 시작도 안 했는데.”

    귀부인들의 울음이 뚝 멎었다.

    “남편은 전장에서 칼 맞아 죽고 아들은 굶어 죽으면 저 세상에서 빨리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런가?”

    남편의 목숨에다 가문의 재산까지 몽땅 털어 가겠다는 말에 그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아비가 된 처지에서 아량을 베푸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군.”

    알렉시스는 소매 끝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사교계가 지금과 달라진다면 아들까지는 살려 줄 마음이 들 텐데 말이지.”

    “그, 그리하겠습니다!”

    카비르 후작 부인과 데비온 백작 부인이 앞다투어 일어섰다.

    “발텐의 후계자님에 대해 떠도는 헛소문은 죄다 사라지도록 하겠습니다!”

    “공작 부인께 무례를 범하는 이들도 없을 겁니다!”

    진흙탕에 구르는 짐승도 쓸모가 있다면 구정물 한 컵은 부어 줄 수 있는 법이었다. 알렉시스는 들판에 사냥개를 풀어놓듯 고갯짓했다.

    “그리해 봐.”

    귀부인들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매만지며 정신없이 뛰어갔다. 알렉시스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다시 걸음을 떼었다.

    ‘한 군데도 없었어.’

    돈과 신분을 쥐여 줬으니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그녀는 그런 권리를 지니고도 무력했다.

    트리벨리언에서 캐슬린은 늘 불청객이었다.

    ‘그래서 그 새끼에게 마음을 주었을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 손안에 있는데 결코 저를 바라보지 않는 여자. 저를 품었던 마음을 없애고 다른 놈을 보는 여자.

    이미 실종되어 행방이 묘연한 상태인데도 그자를 없애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차라리 그를 선발대에 처넣어 남부로 보내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한 뒤 상심에 빠진 캐슬린의 마음을 다시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극단으로 치닫는 상상에 호흡이 가빠져 막 걸음을 멈추었을 때였다.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흥분된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이년이! 공작 부인, 공작 부인 하니 진짜 네가 귀한 줄 알아!”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분수 앞에서 캐슬린이 팔을 붙잡힌 채 떨고 있었다. 등을 보인 남자가 그녀의 뺨을 때리려는 듯 한쪽 손을 높이 올리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알렉시스는 당장에 달려가 그놈의 팔을 떼어 내 분수에 처박았다.

    “어억!”

    반항하려다 대리석 조각에 이마를 짓찧고 굴러서 물에 빠지는 이가 누군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놀라 커진 연푸른 눈이 저를 담았다. 알렉시스는 저만이 담긴 그 눈을 확인하는 순간 기묘한 만족감이 고양되는 걸 느꼈으나, 떨리는 은색 속눈썹에 다시 불안감이 치솟았다.

    “다쳤나?”

    대답이 들려오기까지 기다릴 수 없어 작은 몸을 끌어당겨 이리저리 살폈다.

    이 여자가 단단한 방패를 가진 줄 알았는데 실상은 전장에 맨몸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주할 때마다 분통이 터져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리 널 씹어 삼켜서라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손안에 쥐어서 놓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가진 알량한 작위로 널 감쌀 수 있을 텐데.

    그럴 기회를 버렸던 3년 전의 저는 한심한 쓰레기였다. 알렉시스 발텐은 작열하는 속내를 잠재울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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