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42)화 (42/110)
  • 42화

    “셴베르크 백작, 무슨 짓이지?”

    그는 셴베르크 백작의 시야에서 캐슬린을 완전히 차단하다시피 가로막고 나섰다. 그녀의 손은 놓칠세라 꽉 붙든 채로.

    “아름다우신 공작 부인께 최상의 예를 갖추고자 했습니다.”

    발텐 공작이 언짢음을 여실하게 드러내는데도 셴베르크 백작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셴베르크의 예법이었는데,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망국의 예법으로 제국의 황족을 섬기려 하다니 의외군.”

    빈정거리는 알렉시스의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캐슬린은 잡혀 있던 손을 부드럽게 빼고 앞으로 나섰다.

    “최고의 예로 대해 주시니 기쁘네요. 셴베르크는 고아한 멋이 있군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다행히 셴베르크 백작은 캐슬린의 말을 받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사자들이 개의치 않아 하는 듯하자 주변의 귀족들도 긴장을 풀었다. 캐슬린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알렉시스의 옆으로 돌아갔다.

    “뭐 하자는 거지?”

    알렉시스가 낮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원하신 대로 황족으로서 예의를 지키려고요.”

    “돌발적인 신체 접촉도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이 황족의 예의라고는 하지 않았다.”

    “중요한 자리가 끝까지 잘 마무리되도록 노력했을 뿐이에요.”

    캐슬린은 태연히 대꾸한 후 주변에 몰려든 귀부인들과 다시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는 불만스러운 듯 보였지만 더 말을 얹지 않았다.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 드십니다!”

    얼마 안 있어 시종장이 파티 주최자의 등장을 알렸다. 귀족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무릎을 굽혔고, 알렉시스는 캐슬린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섰다.

    황족만 설 수 있는 연단의 계단 끝에 알렉시스와 캐슬린이 나타나자, 도도한 눈빛으로 모두를 내려다보던 황후는 얼굴이 살짝 굳은 채 입을 열어 인사를 건넸다.

    “발텐 공, 오랜만이군.”

    캐슬린은 깔끔히 무시하는 투였다. 먼저 숙이고 들어오라는 노골적인 압박이었다. 캐슬린은 늘 그랬던 것처럼 치맛자락을 잡은 채 무릎을 굽히려 했다.

    그때, 알렉시스가 그녀의 팔을 강하게 잡고 인사를 올리지 못하게 막았다.

    의아함에 옆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정면으로 황후를 쳐다보며 말했다.

    “황후 폐하, 발텐 공작 부인입니다.”

    기가 찬 듯 황후가 코웃음을 쳤다. 분위기를 읽은 페터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오랜만입니다, 형수님. 편찮으신 곳은 다 나으셨는지요? 지방 영지에서 쉬다 오셔서 그런지 전보다 훨씬 혈색이 좋아지셨습니다.”

    “네,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리 다시 뵙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요. 잠시 후 함께 담소라도 나누시지요.”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전하.”

    황태자의 변함없이 살가운 태도를 못마땅한 낯으로 지켜보던 황후는 그대로 뒤를 돌아 연단 위에 마련된 황후의 자리에 앉았다. 황태자의 재빠른 신호를 알아차린 궁정 악사는 재빨리 경쾌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얼른 가세요.”

    황태자는 캐슬린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인 다음 황후에게 돌아갔다.

    “가지.”

    알렉시스는 표정 변화 없이 캐슬린의 손을 잡고 연단을 내려갔다.

    막 연회장 중앙으로 나서자마자 귀족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간만에 파티에 참석한 발텐 공작을 노리는 이들이었다. 황실에 사사로운 연이라도 맺어 보려는 자들부터 남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대겠다는 자들까지 목적도 각양각색이었다.

    “저는 잠시 물러나는 편이 낫겠어요.”

    귀족들에게 의례적인 인사만 주고받으며 알렉시스의 옆을 지키고 있던 캐슬린이 작게 속삭이며 그의 손을 놓았다. 알렉시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딜 가려고?”

    “휴게실에요. 용건 다 보시고 퇴장하실 때 불러 주시면 찾아갈게요.”

    그리고 미련 없이 인파를 피해 사라졌다. 알렉시스는 붙잡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발텐의 안주인이 돌아왔다고 공표해 두었으니, 황후도 섣부른 짓을 하지는 못할 터였다.

    그의 생각처럼 연단에선 황후가 황태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심기가 불편한 모습을 보아하니 정략혼을 막을 수를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이제 덫에 걸려든 것은 황후 쪽이었다.

    * * *

    “안녕하세요, 부인.”

    “오랜만입니다.”

    휴게실로 향하는 동안 마주치는 귀부인들은 모두 먼저 인사를 보내왔다. 예전과는 달리 무척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러나 캐슬린은 모르는 척하며 그들을 지나쳤다.

    ‘피곤해.’

    수도 마이어의 사교계를 견디는 건 눈밭의 산사태에서 살아남는 것보다 지치는 일이었다. 어차피 오늘은 그의 요구대로 파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의무를 다했으니 빠져나와도 상관없었다.

    ‘그러고 보니 페터의 일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까 보았던 셴베르크 백작의 여동생과 결혼 이야기가 오간다고 했었나.

    황실의 일에는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그게 페터의 일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그녀는 저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페터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오늘 파티에서 분명 정략혼 이야기가 나올 텐데…….’

    셴베르크 백작이 만약 여동생을 황후 자리에 올리려는 야망이 있다면 벌써 알렉시스와 손을 잡았을 것 같은데, 아까 둘의 태도는 전혀 친밀해 보이지 않았다. 뜻을 같이하는 이라고 보기 어려운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정략혼에 뜻이 없다고 확신하기도 어려웠다. 열정적으로 사교계를 누비고 다니는 셴베르크 백작은 누구보다도 제국의 고위 귀족 작위를 갈망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캐슬린은 연회장 한가운데서 알렉시스를 끌어내기라도 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은 연회장을 나와 긴 회랑을 걷다가 정원으로 나갔다. 설화석고로 조각된 아름다운 분수가 음악에 맞추어 힘찬 물줄기를 뿜고 있었다.

    그 앞에 앉아 가만히 음악을 듣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부인.”

    “아, 셴베르크 백작.”

    어디선가 셴베르크 백작이 나타나더니 털썩 옆자리에 앉았다.

    “3년 만에 사교계로 복귀하신 화제의 주인공이신데, 왜 홀로 정원에 계신지요?”

    “오늘의 주인공은 백작이죠.”

    캐슬린은 물러나 앉으며 그의 말을 지적했다.

    “모든 귀족이 그대의 참석을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어요. 심지어는 황후 폐하께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어째서 여기 있나요?”

    “아마 부인과 같은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단숨에 비워 냈다.

    “골치 아픈 일에 엮이기 싫거든요. 정확히는 황실에. 그래서 몰래 빠져나왔죠. 각하께 관심이 쏠려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

    “그사이 발텐 공작 각하께서 벌여 놓은 판을 어떻게 깨 볼까, 고민 중입니다.”

    캐슬린은 저를 꿰뚫어본 셴베르크 백작에 조금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저 역시 황실의 사람이란 것을 잊으신 듯하군요, 셴베르크 백작.”

    “그렇기는 합니다만 부인께선 각하와 다른 생각이신 듯해서요.”

    “다른 생각이라니요?”

    “제가 보기에 부인께선 황실과 셴베르크 가의 정략혼에 반대하십니다.”

    잔을 분수대에 내려놓은 그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눈만은 냉정했다.

    “아까 보니 황태자 전하를 무척 걱정하는 낯빛이시던데요. 아닙니까?”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니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군요.”

    “전하와 사이가 가까우시다 들었습니다.”

    모르는 척 대꾸하는 캐슬린의 태도에 셴베르크 백작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흡사 초조하기라도 한 것처럼.

    “외람되지만 전하를 설득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설득을 말하는 건가요?”

    “정략혼을 거부하시도록 말씀드려 주십시오.”

    그와 황태자의 생각은 같은 방향이었다. 캐슬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하였으나 애써 그런 기색을 감추었다.

    “제가 감히 그런 말을 꺼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

    “부인께서 한마디라도 해 주시면 전하께서도 귀담아들으실 겁니다.”

    “그런 말이라면 백작이 직접 전하를 만나 보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여기서 반색하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페터는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없을 것이다.

    캐슬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 손을 모아 잡고 말했다.

    “왜 이 결혼을 원하지 않는지 전하께 직접 말씀드리세요. 당사자가 아닌 제가 끼어들 일은 아니니.”

    “부인, 하지만.”

    “전하는 제가 불러 드리죠.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예요.”

    셴베르크 백작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 그만두었다. 캐슬린은 분수대 근처에 있는 작은 종을 울려 시종을 불렀다.

    “서쪽 테라스가 있는 휴게실로 이분을 모시고, 먼저 예약한 분께 알리도록.”

    “예, 알겠습니다.”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는 셴베르크 백작을 향해 캐슬린은 장갑 한 짝을 벗어 건네주었다.

    “이걸 갖고 가면 원하는 대화를 할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부인.”

    그는 그제야 캐슬린의 의도를 이해한 듯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시종을 따라 사라졌다.

    캐슬린은 한숨을 쉰 후 종을 멀리 치워 버렸다. 정원에 상주하는 시종을 셴베르크 백작에게 딸려 보냈으니, 이제 정말로 보는 눈 없는 곳에서 쉴 수 있을 것이다.

    평화롭게 물소리를 들으며 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듯해 휴게실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캐슬린!”

    등 뒤에서 누가 저를 반갑게 불렀다. 캐슬린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중년 남성의 들뜬 목소리는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잊을 수 없었다.

    “캐슬린, 이게 얼마 만이냐?”

    어깨를 짚는 손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돌아보자, 예상과 다르지 않게 윈스턴 백작이 서 있었다.

    “여긴…… 어떻게.”

    “나 역시 초대장을 받았지. 뭘 그리 놀라?”

    “……그러셨군요. 편히 즐기다 가세요.”

    소름 끼치는 얼굴을 더 마주하고 싶지 않아 캐슬린이 자리를 뜨려던 차였다.

    윈스턴 백작이 말했다.

    “소식 들었다. 애를 데리고 왔다지? 그것도 발텐 가의 후계자를.”

    씩 올라간 입꼬리는 묘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몸 굴릴 줄만 아는 줄 알았더니 머리도 꽤 돌아가는구나. 그래, 잘했다. 들키지만 않으면 돼. 발텐 공작도 냉혈한인 척하지만 결국은 제 자식을 원했던 게야.”

    “……가 봐야겠어요. 각하께서 찾으실 때가 되어서요.”

    “어딜 가? 아직 내 말 안 끝났는데.”

    “아!”

    변경백 윈스턴의 팔은 휘어잡은 가녀린 딸의 손목을 금방이라도 부러뜨릴 듯 억셌다.

    “어디서 훔쳐 온 애새낀지는 모르겠지만 입단속 제대로 해. 공작의 피는커녕 네 피조차 섞이지 않은 애라는 걸 들키면 우리 윈스턴 가까지도 화가 미칠 테니.”

    “놔주세요!”

    “대답이나 제대로 해!”

    루치를 모욕하는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온 힘을 다해 그를 떠밀었지만, 백전노장인 윈스턴 백작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넌 그 애새끼로 발텐 공작의 발목을 붙들어야 한다. 보아하니 소박맞아 쫓겨났던 모양인데,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란 소리야! 네 애가 소공작이 되면 나도 지긋지긋한 북부에서 내려올 수 있겠지. 그래야 이사벨라도 제대로 된 혼처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게 아니냐?”

    “제발, 제발 좀……!”

    혈관 속에 윈스턴 백작과 같은 피가 흐른다는 것이 지금처럼 끔찍한 적 없었다. 끝까지 저를 이용하는 데만 눈이 벌건 아비의 모습에 신물이 났다.

    “전 그럴 생각 없어요.”

    “뭐야?”

    “제 아이가 소공작이 될 일은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 헛꿈은 그만 꾸세요!”

    “이…… 이년이! 공작 부인, 공작 부인 하니 진짜 네가 귀한 줄 알아!”

    그녀의 팔목을 붙잡지 않은 윈스턴 백작의 다른 한쪽 손이 하늘 위로 올라갔다. 어릴 적 캐슬린을 잠식하고 있었던 무력감이 다시 피부로 느껴지며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차라리 맞자. 몇 대 맞으면 풀려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눈을 감아 버렸다.

    매서운 아비의 손이 뺨으로 날아들길 기다리며 체념하고 있는데, 갑자기 손목이 자유로워졌다. 그와 동시에 별안간 윈스턴 백작이 비명을 질렀다.

    “어억!”

    눈을 뜨자 분수대 안에 처박힌 윈스턴 백작이 보였다.

    “다쳤나?”

    그리고 성마른 낯으로 그녀를 끌어당겨 살피는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이였다.

    알렉시스 발텐.

    그녀의 남편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