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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41)화 (41/110)
  • 41화

    “이용하려고 데려온 게 아니야.”

    순수한 의문으로 가득한 질문을 듣는 순간 무저갱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알렉시스는 뻣뻣하게 굳은 목울대를 움직여 대답했다.

    “그저 네가 내 옆에 있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래서 찾았어.”

    “애초에 저와 결혼하신 것도 황후 폐하 때문이었잖아요.”

    저를 향한 일말의 원망도, 기대도 담기지 않은 연푸른색 눈은 공허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했다.

    “발텐 공작의 후계자 없는 결혼 생활이 황후 폐하께 고통스러울 거라고 생각해서. 아닌가요?”

    “……그땐 그랬다.”

    알렉시스는 그녀의 말을 조금도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으나 이내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황후와는 상관없어.”

    “그럼 왜 저를 데려오셨어요? 다른 남자와 아이까지 낳았는데. 아이까지 이용하려는 생각이 아니면 대체 왜 찾아서 데려오셨나요?”

    대답하는 것조차 죄스러웠다. 이유를 묻는 그녀에게 꺼내 놓을 사실이 제가 생각하기에도 염치없는 말이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반쯤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캐슬린.”

    “…….”

    “그래서 발텐의 이름 아래 묶어 두고 싶었다.”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붉은 입술은 달싹이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한때는 그의 부인이었던 여자의 흰 얼굴에서 어떤 감정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 줘.”

    그대로 기절이라도 한 게 아닐까 싶어 무서워진 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캐슬린은 뒤로 물러섰다.

    “이젠 저를 농락까지 하시는 건가요?”

    “아니야. 나는…….”

    속이 타서 성급하게 말을 이으려는데 그녀가 한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더는 말씀하지 마세요.”

    “캐슬린.”

    “저는 안 믿어요, 그 말.”

    캐슬린은 자조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제가 공작님께 사랑을 말했을 때. 마치 적선하는 것처럼 저를 안으셨죠.”

    그는 뒷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으로 멈춰 섰다. 캐슬린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저를 사랑하셨다면 그러실 수 없었어요.”

    “…….”

    “지금 착각하고 계신 거예요. 손안의 물건을 남에게 뺏기니 아쉬운 마음. 공작님의 마음은 그뿐이에요.”

    알렉시스는 몇 발짝 떨어진 거리에 선 캐슬린을 바라보며 아득한 거리감을 느꼈다.

    무어라 말하든 그녀는 저를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그녀의 진심을 무시했고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 스스로 덮어씌운 편견에 사로잡혀 그녀를 재단했고, 이용했다.

    그런 주제에 지금 와서 무어라 말하든 변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용당해도 좋다고 생각했던 제가 틀렸어요. 이제 황실이라면 지긋지긋해요. 엮이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말이 애처롭게 이어질수록 가슴이 후벼 파이는 것처럼 아팠다.

    “그러니까 공작님께 도움이 될 다른 여자를 부인으로 맞으시고, 저는 보내 주세요.”

    저를 바라보는 눈에는 미움조차 담기지 않았다.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알렉시스는 그 사실이 더욱 절망스러워졌다.

    “그렇게는 못 해.”

    차라리 그녀가 저를 미워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에게 남고 싶었다. 저 눈으로 저와의 기억을 깨끗이 잊은 채 떠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어졌다.

    “결혼은 페터가 하게 될 거야.”

    “공작님, 황태자 전하의 결혼은……!”

    “페터에게 보이는 성의의 절반만이라도 내게 보여 주는 건 어때.”

    캐슬린의 말을 끊은 그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차라리 그쪽이 더 효과가 있을 것 같거든.”

    “무슨 뜻이죠?”

    “단지 소유욕과 변덕 때문에 내가 널 붙잡는다고 생각한다면, 흥미를 떨어뜨려 보라는 소리야.”

    난간을 쥔 캐슬린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세요?”

    “내 곁에 있어. 내가 원하는 만큼.”

    알렉시스는 제 말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안 될 거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지만 모친을 돌려 달라 애원할 수밖에 없었던 여섯 살의 무력한 알렉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거짓말로 진심을 숨겨서라도 뜻을 이룰 방법을 알았다.

    “내가 가자는 데는 가고, 하자는 건 해. 그러다 보면 네가 지겨워질지도 모르지.”

    “……그렇게 하면 정말로 절 놓아주실 건가요?”

    “그래.”

    “약속하세요.”

    캐슬린은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공작님의 그 마음이 사랑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되면 저와 루치를 발텐의 이름에서 자유롭게 해 주시겠다고요. 더 이상 찾지도, 궁금해하지도 마세요.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여겨 주세요.”

    “…….”

    “그렇게 약속하신다면 공작님이 원하시는 만큼 곁에 있을게요.”

    그녀가 내민 손이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알렉시스는 공허한 기분으로 그녀의 제안을 되새기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약속하지.”

    온기 없이 싸늘한 그녀의 손에 가슴이 아팠다. 분명 시녀장에게 일러 두꺼운 담요와 숄을 가져다 놓으라 했는데 왜 이리도 차가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다른 손을 겹쳐 잡으려는 순간, 캐슬린은 손을 빼내고 돌아섰다.

    알렉시스는 멍하니 사라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지금이라도 서라고 소리치면 그녀는 제 말을 따를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침실로 돌아갔다. 도저히 잠들 수가 없어 앉은 채로 밤을 새웠다.

    그 자리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라일런트 자작과 알스도프의 간언도 무시한 채, 끼니를 거르고 잠을 포기하며 매달려도 그의 결론은 하나였다.

    알렉시스는 서랍 맨 아래 칸에 넣어두었던 초대장을 꺼내 제 이름과 캐슬린의 이름을 써넣고 알스도프를 불렀다.

    “각하! 부르셨습니까.”

    스스로 유폐하다시피 한 주인의 부름에 헐레벌떡 뛰어온 알스도프가 불안한 눈으로 그를 살폈다. 알렉시스는 말없이 그에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캐슬린에게 전해.”

    “이건 황실의 초대장이 아닙니까?”

    “셴베르크 백작이 처음으로 참여하는 황실의 파티지. 그녀에게 알리고, 직접 발송하게 해.”

    “혹 마님께서 승낙하지 않으시면.”

    “그럴 일은 없다.”

    핏발 어린 금안에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알스도프는 고개를 숙이고 침실에서 물러 나왔다.

    * * *

    캐슬린은 그가 원하는 대로 초대장을 황실로 발송했고, 어느덧 파티 날짜가 되었다.

    “마님, 정말 괜찮으세요?”

    “응.”

    캐슬린은 알렉시스가 보내온 귀걸이를 걸면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잠든 루치의 등을 토닥이는 에밀리의 얼굴이 걱정스러워 보였다.

    “황후 폐하께서도 참석하실 텐데, 무슨 일이 있으면 어쩌지요?”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테니까. 돌아올 때까지 루치를 부탁할게.”

    유리창 밖을 흘깃 보니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잡고 조심스레 나섰다.

    층계 끝에서 알렉시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캐슬린은 의무적인 몸짓으로 그가 내민 팔에 손을 얹었다.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고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 만에 캐슬린이 입을 열었다.

    “제가 어디까지 해야 할까요?”

    짙은 금안이 저를 향했다. 무슨 뜻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공작님께서 이 파티에 참석하시는 목적을 알아야, 제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정할 수 있을 듯해요.”

    “이 파티에서 페터와 셴베르크 백작이 공식적으로 처음 만날 거다.”

    알렉시스는 힘주어 말했다.

    “다시 말해 정략혼을 위한 자리지. 너와 나는 황족으로서 참석하는 것이니, 거기까지만 하면 돼.”

    “……네. 알았어요.”

    “약속을 잊지는 않았겠지. 이혼 이야기를 꺼내진 않을 거라고 믿겠다.”

    “…….”

    “이만 내려야겠군.”

    마차가 멈추자마자 그가 문을 열고 나가 손을 내밀었다. 누가 본다면 끔찍하게 부인을 아끼는 사람으로 보일 만한 태도였다.

    캐슬린은 그 손을 잡았다. 이전과 달리 조금도 들뜨지 않는 기분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발텐 공작 각하와 발텐 공작 부인 드십니다.”

    시종장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크게 울렸다. 즐겁게 인사를 나누던 귀족들의 눈길이 모두 한곳으로 쏠렸다.

    전에 없이 다정하게 팔짱을 낀 공작 부부를 향해서였다.

    “어머, 세상에.”

    “진짜 그 발텐 공작 부인이신가요?”

    빠르게 자신의 위아래를 훑고, 고상한 척 부채로 입을 가리며 미소 짓는 귀부인들이 보였다.

    3년 전, 갑자기 자취를 감춘 발텐 공작 부인이 후계자와 함께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은 무성하게 퍼진 상태였다.

    그런데 한 번도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사교계 복귀를 알리지도 않다가 남편과 손을 잡고 다정하게 등장하다니.

    수도 마이어가 발칵 뒤집힐 만한 대사건이었다.

    ‘모두 궁금해 안달이 났겠지.’

    한 걸음 한 걸음 그들 무리에 가까워질수록 말을 붙여 오는 이들이 늘어났다. 캐슬린은 반사적으로 미소를 내걸고 웃으며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았으나 속으로는 피로를 느꼈다.

    그들의 심사야 뻔했다. 뭐라도 꼬투리를 하나 잡아 망신을 주려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발텐 공작의 눈 밖에 났다가 다시 마음을 얻은 이유가 궁금하여 가십거리를 얻으려 하거나.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파티에 저와 함께 오길 원한 알렉시스의 의도도 하나였다. 발텐 공작부부의 사이가 굳건하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오셨군요, 각하.”

    귀부인들 사이에서 한 남성이 샴페인 잔을 든 채로 등장했다. 호박색 머리칼에 가볍게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말끔한 미청년이었다.

    “셴베르크 백작. 일찍 와 있었군.”

    “뵙고자 청해 주시는 분이 많아 미리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쪽은…….”

    흥미로운 듯 저를 보는 눈빛에 캐슬린이 인사하려는 찰나였다. 알렉시스가 말을 가로챘다.

    “소개하지. 내 아내, 발텐 공작 부인이네.”

    아내?

    캐슬린은 반사적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부인. 키어런 셴베르크입니다.”

    셴베르크 백작은 자연스럽게 무릎을 굽히며 제국식 인사를 했다. 캐슬린은 일단 그의 인사를 받았다.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셴베르크 백작.”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각하께서 늘 숨겨 두시는 분이 내심 궁금했거든요.”

    지나가는 시종에게 샴페인 잔을 돌려준 셴베르크 백작이 눈을 휘며 웃었다.

    “이리 만나게 되니 왜 각하께서 그러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다시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캐슬린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셴베르크 백작은 그녀의 자유로운 손에 입을 맞췄다. 그와 동시에 알렉시스가 거칠게 백작을 떼어 냈다.

    변화 없이 무감했던 그의 입매는 이제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확연히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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