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40)화 (40/110)
  • 40화

    “델라포스라고?”

    “예, 각하.”

    알스도프가 설명을 덧붙였다.

    “마님께서 델라포스 신전에 커스터드 파이 180여 개를 기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티타임 전에 도착하려면 지금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마님께 불가하다 말씀드릴까요?”

    “아니. 진행해.”

    알렉시스는 멈췄던 깃펜을 다시 움직이며 시선을 서류로 내렸다.

    “알겠습니다, 각하.”

    알스도프가 집무실을 나가자마자 라일런트 자작이 물었다.

    “각하, 굳이 델라포스에 사람을 보내다니, 마님께서도 그 신관을 찾으려고 하시는 것 아닐까요?”

    “그렇겠지.”

    “그럼 막으셔야지요! 혹 신전에서 그를 보호하고 있다면 분명 마님과 접촉하려 들 겁니다.”

    “그냥 둬.”

    알렉시스는 마지막 서명을 마친 서류를 내밀었다. 라일런트 자작은 쌓인 서류 더미를 정리하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그 신관을 찾고 계신다는데, 이러다 정말 저희 쪽에서 먼저 찾지 못하면 어떡합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야 당연히 그 신관이 다른 생각을 품고 마님께 다시 접근하기 전에 조치를…….”

    “중요한 건 그자의 생사다.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지. 나가 봐.”

    알쏭달쏭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라일런트 자작이 곧 집무실을 나갔다.

    알렉시스는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다른 이들에게는 별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말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두려웠다. 루치아노의 아버지라는 그 신관을 찾게 되면 캐슬린이 저를 떠나겠다 할까 봐.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죽었다고 여기는 그가 살아 있는 걸 알게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겠지.

    그 사실을 아는데도 차마 수색을 중단하거나 찾는 즉시 죽여 버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들다가도, 그날 밤 창문 밖으로 손을 뻗던 캐슬린의 모습이 떠오르면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뛰어내리려던 것이 아니라 말했지만 알렉시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상태에서 바로 손만 놓으면 추락이었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그녀는 제 손으로 생을 버릴 수 있었다.

    그날 밤만 생각하면 숨통이 콱 틀어막혔다. 캐슬린이 아이마저 포기하고 이 삶에서 도망쳐 버리겠다고 하면 그때는 정말로 붙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 두자.’

    그녀가 원하니 알렉시스는 요제프를 찾을 요량이었다. 제가 살아 있는 이상 그녀가 율법을 어긴 평민 신관 나부랭이의 아내로 살아가게 두지는 않을 테지만, 아이의 아버지라고 하니 목숨은 붙여 델라포스에 데려다 놓을 작정이었다.

    그는 서랍의 자물쇠를 풀고 남아 있는 약을 가늠했다. 그때까지는 충분할 것도 같았다.

    ‘널 죽게 할 순 없어.’

    알렉시스의 계획은 이전과 달라졌다. 3년 전에는 고민 끝에 결정하지 못한 일이었으나, 이제는 답을 얻었다. 그가 꿈꿨던 트리벨리언의 파멸에 캐슬린은 제외였다. 그리고…….

    해맑게 웃으며 제게 잎사귀를 내밀던 통통한 손이 떠오르자 심장이 희한하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캐슬린의 아이.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았다는 그 아이는 처음 존재를 알았을 땐 분명 떼어 내 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들 정도였는데 이제는 아니게 됐다.

    아이가 모친의 눈을 갖고 있어서인지 알렉시스는 그 아이 앞에서 유독 무력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래서 알렉시스는 그 아이까지 제외 대상에 넣을 작정이었다.

    ‘그래, 그뿐이다.’

    알렉시스는 무의식적으로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 * *

    캐슬린은 버터나이프의 날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주 미세하게 결정이 맺힐락 말락 했다.

    침실이나 주방에서 시도했을 때는 냉기조차 어리지 않았는데 정원에서는 아주 조금이나마 능력이 발현될 기미가 보였다.

    ‘무슨 차이인 거지?’

    실내와 실외의 차이라고 하기엔 마구간에서도 능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캐슬린.”

    “페터! 왔어요?”

    페터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옆으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후, 피곤해 죽는 줄 알았어요. 황궁을 빠져나오니 이제야 숨통이 트이네요.”

    “차라도 한잔 마셔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으로 왔습니다. 아, 스콘도 새로 구웠군요?”

    캐슬린은 따뜻한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을 듬뿍 바르는 페터에게 차 한 잔을 따라 앞에 놓아주었다.

    “무슨 골치 아픈 일이라도 생겼나요? 안색이 안 좋아요.”

    “골치 아픈 일은 항상 있죠.”

    “이번엔 유독 얼굴이 어두워 보여서 하는 말이에요.”

    페터는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베어 문 스콘을 꿀꺽 삼키곤 대답했다.

    “그러게요. 이번은 해결하기가 힘들군요. 황제가 되려면 피할 수 없어서인가 봐요.”

    “피하지 않고 맞서는 것만 보아도 페터는 잘하고 있어요. 그런 점이야말로 황제가 되는 데 가장 필요한 마음가짐이 아닐까요?”

    “그렇게라도 말해 주는 건 캐슬린뿐이네요.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진심이에요.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큰 도움이 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돕고 싶어요.”

    페터는 말없이 찻잔 표면에 맺힌 물기를 문질렀다.

    “이렇게 신세 한탄이나 늘어놓으려 온 건 아니었는데.”

    그는 한참 만에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캐슬린밖에 없어서, 그래서 왔어요.”

    희미하게 웃음 짓는 입꼬리가 떨렸다. 캐슬린은 덜컥 걱정되어 다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젠 정말로 결혼을 하게 생겼어요.”

    “아…….”

    제국법상 19세 생일이 지나면 성인이다. 약혼 상대조차 없는 황태자를 향해 세간의 시선이 의심을 품는 것은 캐슬린도 걱정하는 바였다.

    “보통 때였다면 더 미뤘을 거예요. 어떤 핑계를 찾아서라도. 그런데 그럴 수가 없게 됐어요. 남부의 반란은 점점 더 커지고, 귀족들은 그들을 다 도륙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학살을 피하고 최대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끝내려면 셴베르크 가를 이용해야 하는데…….”

    “셴베르크 영애와 결혼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거군요.”

    “네. 그겁니다.”

    페터는 긴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도 봤지만, 남부에선 모든 협상을 거절했어요. 만약 협상이 기적적으로 성공한다 해도 귀족들은 식민지 백성들이 그런 특혜를 받는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을 겁니다. 이젠 정말 어떡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페터의 심경이 어떨지 이해가 되었다. 그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성향이었다. 희생은 최소화하고 지략을 이용하길 원했다.

    “제가 정말 남자로 태어났다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요.”

    서글프게 웃어 보인 페터는 중얼거렸다.

    “제가 여자란 걸 숨기고 셴베르크 영애와 결혼한다면 그녀는 평생 자신이 왜 외면받는지도 모르고 고통스러울 겁니다.”

    캐슬린은 조용히 말했다.

    “황실이 셴베르크 가와 연을 맺어야 하는 거지, 페터가 꼭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셴베르크 영애가 공작 부인이 되는 선택지도 있다는 이야기죠.”

    페터는 놀란 얼굴로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트리벨리언에 공작이 형님 외에 누가 있어요? 공작 부인이라면 캐슬린이.”

    “전 요제프를 찾으면 떠날 거예요.”

    캐슬린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젠 제게 필요 없는 자리예요. 페터를 도울 수 있다면 기꺼이 줄게요.”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형님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애초에 정략혼부터가 형님이…….”

    “그 결혼, 공작님께서 제안하신 거였나요?”

    “아.”

    페터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제안은 형님이 하신 것이 맞으나 선택은 제가 합니다. 저는 형님을 다시 전쟁터에 떠미는 선택은 하지 않을 거예요.”

    “아뇨, 페터가 비밀을 들킬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을 할 필요는 없어요.”

    알렉시스는 이미 남부 정복 전쟁에서 수많은 공을 세운 유능한 사령관이었다. 설령 셴베르크와의 동맹이 무산되어 다시 전장에 나선다 해도 실패할 리 없었다.

    “제가 도울게요, 페터. 걱정하지 말아요.”

    “아뇨, 캐슬린. 그러지 마세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페터는 재차 그녀에게 애원하듯이 말했다.

    “형님은 이미 많은 걸 희생했습니다. 이건 오롯이 제가 책임져야 할 일이에요.”

    “페터.”

    “괜한 말을 했습니다. 오늘 제가 한 말은 모두 잊고, 친구로서 하소연만 들어 주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완강하게 거절하는 페터의 모습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차마 다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터는 그 모습에 안심한 듯 차를 마저 마셨고, 디저트를 먹으며 시간을 보낸 후 돌아갔다.

    그러나 캐슬린은 정략혼에 대해 잊어버릴 생각이 없었다.

    남부의 반란이 심각하다는 페터의 말처럼 황궁으로 간 알렉시스는 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공작저에 다시 돌아온 후 처음으로 그의 귀환을 기다렸다.

    달이 뜬 한밤중이 되어서야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캐슬린은 침실을 나섰다. 막 계단참에 다다르자 그가 안으로 들어섰다.

    먼발치에서 본 알렉시스는 혼자였고 달빛에 비친 얼굴은 수척해 보였다. 캐슬린은 그가 계단에 다가올 때까지 가만히 서서 내려다보았다.

    “캐슬린?”

    그녀를 발견한 알렉시스의 의아한 목소리가 적막한 공간에 울렸다. 같은 집에 머무르는데도 목소리를 들은 게 며칠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왜 안 자고 나와 있지?”

    “할 말이 있어서요.”

    그 말에 알렉시스는 단숨에 계단을 올라왔다. 거의 뛰다시피 하는 움직임이었다. 순식간에 눈높이가 뒤바뀌었다.

    “무슨 말인데?”

    “공작 부인 자리에 관해서예요.”

    “떠나겠다는 말이면 그만둬. 그 자릴 더 비워 둘 생각은 없으니까.”

    올려다본 금빛 눈동자가 단호했다. 예전이라면 그 모습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발텐 공작 부인 자리가 빌 일은 없어요.”

    캐슬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공작님께서 원하시는 완벽한 부인을 찾았어요. 그분과 결혼하시면 황후 폐하와 대적할 만한 힘을 얻으실 거예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저와 이혼하시고 셴베르크 영애와 결혼하세요.”

    “…….”

    “루치를 가짜 후계자로 내세워 황후 폐하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 드리는 것보다 그게 더 완벽한 복수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계단 난간을 꽉 쥔 그의 손에 푸른 힘줄이 불거졌다. 알렉시스는 한 발짝 더 그녀의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러니까 넌 지금.”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잔뜩 억눌려 있었다.

    “내가 널 찾은 게 황후 때문이라 생각하는 건가?”

    캐슬린은 반문했다.

    “그럼 다른 이유가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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