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뭐 하는 짓이에요?”
차갑게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며 캐슬린은 아이를 빼앗으려 했으나 알렉시스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씻고 와.”
“뭐라고요?”
“밖에 나갔다 오면 아이를 만지기 전에 씻어야지.”
“언제부터 공작님이 그렇게 쓸데없는 일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카벨이 아이의 위생 상태를 관리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알려 주더군. 그래서 지금부터 신경을 써 보려고.”
뻔뻔하기까지 한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틀린 말도 아니었다. 루치는 어느새 씻고 옷을 갈아입혔는지 정원에서 묻은 흙먼지는 죄다 없앤 말끔하고 보송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캐슬린은 물러나 욕실로 향했다.
“공작님이 언제 오셨어?”
뒤를 따르는 에밀리에게 캐슬린이 속삭였다.
“제가 올라가자마자 기다리고 계셨어요.”
“오늘은 밖에 나가시는 거 아니었어?”
캐슬린이 기억하는 알렉시스의 스케줄에 따르면 오늘은 공작저에 있을 날이 아니었다.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요즘 들어 주인님께선 자주 계획을 바꾸곤 하시나 봐요.”
갑자기 웬 변덕인 걸까.
캐슬린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빠르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설마 아직도 있진 않겠지.’
반신반의하며 다시 돌아갔을 땐 더 기함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알렉시스가 루치를 안은 채 테이블 앞에 앉아 이유식을 먹이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에요?”
캐슬린은 알렉시스가 어울리지도 않게 아기용 스푼을 쥐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
“공작님이 왜…….”
“루치가 배가 고프다고 해서.”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모습엔 거리낌조차 없었다.
“마!”
새로운 이유식이 입맛에 맞는지 루치가 방긋방긋 웃으며 그녀를 향해 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캐슬린은 어이가 없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행히 잘 먹더군.”
알렉시스가 말을 덧붙이자마자 루치는 더 달라는 듯이 칭얼거렸다. 그러자 알렉시스는 어색하게 이유식을 한 숟갈 뜨더니 잠시 식힌 뒤 루치의 입가로 가져갔다. 아이는 거부감 없이 이유식을 삼켰다.
배신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제가 알려 드렸어요. 주인님께서 아이에게 밥 먹이는 건 한 번도 해 보신 적이 없으시다기에.”
에밀리가 속삭였다.
“그렇겠지.”
캐슬린이 중얼거렸다. 자식 따위는 필요 없다고 여긴 사람이니 그런 걸 알 리도 만무했다.
‘아예 작정하고 왔어.’
이런 수까지 쓸 줄은 몰랐다. 루치가 아직 어리고 사리 분별을 할 줄 모르니 먼저 포섭하려는 생각이 분명했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래 봤자 잠깐일 터였다. 지금은 얕은수를 부려도 얼마 안 가 포기할 거였다. 캐슬린이 아는 알렉시스는 그랬다.
승산 있는 전략이라면 앞뒤 보지 않고 밀어붙이지만, 시일이 지나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포기한다.
‘그리고 다시는 시도하지 않지.’
그의 냉정함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캐슬린은 철저히 그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돌아선 그에게 상처받을 루치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렸지만, 아직은 어리니 곧 잊어버릴 터였다. 그래도 요제프를 다시 만나게 되면 끝없이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말없이 테이블 끝에 앉았다. 사용인들조차 저녁 시간에 알렉시스가 캐슬린과 마주할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한 듯 식사는 1인분만 준비되어 있었다.
캐슬린은 종을 울려 시종을 불렀다.
“찾으셨습니까, 마님?”
방에 들어서자마자 알렉시스를 힐끗 본 시종이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식사를 1인분 더 가져와.”
“아, 예! 주인님의 식기도 이곳으로 가져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캐슬린의 말에 시종이 당황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에밀리가 같이 먹을 거야. 에밀리 것을 가져와.”
시종의 입이 딱 벌어졌다. 에밀리도 당황해서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마님. 저는 따로 먹겠습니다. 마님께선 주인님과…….”
“두 번 말하게 할 생각이야?”
캐슬린의 말에 난처해진 시종이 알렉시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별 표정 변화 없이 손짓했다.
“그렇게 해.”
“하, 하지만.”
“에밀리, 가서 앉아.”
알렉시스의 말에 시종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갔고, 에밀리는 안절부절못한 채로 캐슬린의 옆자리에 와 앉았다.
“마님, 어쩌시려고요?”
“아까 들었잖아. 공작님이 손수 루치 시중을 들어주러 오셨다니 잘됐지. 우린 식사하자.”
“마님…….”
에밀리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캐슬린은 고집을 거두지 않았다. 알렉시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꿋꿋이 루치에게 밥을 다 먹이고 나서 돌아갔다. 아이가 줬던 나뭇잎까지 챙겨서.
결국, 캐슬린은 억지로 음식을 씹어 삼킨 탓에 체하고 말았다.
“마님, 왜 그렇게까지 하세요?”
영문을 모르는 에밀리가 소화제를 가져다주며 울상을 지었다.
“아직 두 분 화해하지 않으신 거예요?”
“화해라고 할 것도 없어. 난 공작님과 다툰 적 없으니까.”
“그럼요?”
캐슬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고집스럽게 약만 삼켰다.
* * *
“마님은 소화제를 드시고 괜찮아지셨습니다. 따로 아프신 곳이 있는 건 아니고, 편하게 식사를 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알았다.”
카벨 선생은 꾸벅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알렉시스는 서류에 다시 눈길을 주었으나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멀리 시선을 떼는데 서류가 가득 쌓여 있는 책꽂이 맨 위 칸에 초록색 나뭇잎 하나가 보였다.
“혹시 바람에 날려 갈까 싶어 저기 두었습니다.”
정신없이 서류를 넘겨 보던 라일런트 자작이 덧붙였다.
“도련님이 처음 선물하신 건데 사라지면 안 되니까요.”
“할 일이 없나?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는 걸 보니.”
“아, 각하께서 잊으셨을까 봐 챙겨 둔 건데 바로 치우겠습니다.”
라일런트 자작이 서둘러 일어나 책꽂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알렉시스는 마음을 바꿔 말했다.
“그냥 둬.”
“아, 예.”
라일런트 자작은 군말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아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카벨 선생이나 알스도프에게 무슨 말을 전해 듣고 저러는 것이 분명했다.
알렉시스는 다시 자리에 앉아 짜증스럽게 깃펜을 잡고 사납게 서명을 갈기기 시작했다.
‘대체 왜 이딴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군.’
캐슬린이 체했다는 말에 볼썽사납게 기분이 날뛰었다.
설마 일부러 고집을 부리는 걸까. 곁에 두면 이렇게 망가질 텐데 끝까지 그렇게 두고 볼 거냐고 반항하는 것처럼.
그러나 화가 나면서도 알렉시스는 결국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예전과 달리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끄기가 어려워졌다.
카벨 선생과 에디스의 말처럼 신경이 살아나서 감정이 돌아왔기 때문일까.
그녀가 조금이라도 아프다고 생각하면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정무를 처리하면서도 정신이 온통 그녀에게로 쏠려 머릿속이 엉망이 됐다. 카벨 선생을 시켜 온갖 처방을 내리게 하고 시녀장이나 알스도프를 보내 살피게 했다.
그러다 결국 캐슬린이 아픈 근본적인 원인은 저라는 사실을 깨닫고 아이를 보러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쓸데없는 짓이었어.’
그녀의 침실로 찾아갔다가 그녀와 닮은 아이가 작은 손으로 내민 나뭇잎 한 장에, 뭐에라도 홀린 듯 밥까지 먹여 주고 말았다.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반짝이는 눈이 저를 볼 때마다 어쩐지 외면할 수가 없는 기분이어서 말려들었다. 알렉시스는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하면서 서류를 처리했다.
어느덧 해가 졌다. 라일런트 자작은 알렉시스가 검토 완료한 서류 더미를 정리하다 문득 물었다.
“아, 그리고 각하. 에디스 양은 언제 다시 불러들일까요?”
그녀 역시 카벨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소리를 할 것 같았다. 당장 해독약을 만든 상황이 아니라면 지금 에디스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다른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해독약을 만든 게 아니면 그대로 대기하라고 해.”
“예.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라일런트 자작이 돌아가고 나서야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눈두덩을 지그시 눌렀다. 다행히 이전처럼 시야가 흐려지지는 않았다.
‘오늘은 제대로 챙겨 먹었겠지.’
에밀리가 따로 보고하지 않았으니 별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불편했다.
집무실을 서성거리던 그는 결국 방을 나섰다. 저도 모르게 발길이 캐슬린의 침실로 향했다. 그런데 침실 앞에 다다르자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가두지 않겠다 약속한 이후 방 밖의 호위는 물렸지만 시중드는 시녀는 그대로인데, 한밤중에 열린 문을 그대로 열어 두는 것이 이상했다.
슬며시 차오르는 불안감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방 안쪽에서는 서늘한 바람마저 느껴졌다.
‘설마 창문으로…….’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알렉시스는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어두운 방 안은 은은한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은빛 머리칼을 풀어 내린 캐슬린이 잠옷을 입은 채, 열린 창문으로 상체를 반쯤 내밀다 말고 저를 돌아보고 있었다. 한쪽으로 얇은 오간자 커튼을 살짝 쥔 손이 위태로웠다.
“공작님? 이 밤에 갑자기 여긴 무슨 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저 가녀린 손에서 힘이 빠지기만 한다면 그대로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아 숨이 막혔다.
알렉시스는 달려가 그녀의 팔을 잡고 창가에서 떼 내고는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게 허겁지겁 그녀를 끌어안았다.
심장이 미칠 듯 뛰어 대기 시작했다. 3년 만에 다시 찾은 그녀가 제 곁을,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을 떠날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고가 정지되는 것만 같았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가지 마.”
제가 미친놈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알렉시스는 숨을 헐떡이면서 그녀의 은빛 머리를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캐슬린.”
“…….”
“나 두고 떠나지 마.”
다시 널 잃고 싶지 않아.
손이 덜덜 떨렸다. 이것도 독 때문인 걸까. 아니면…….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알렉시스는 이 여자가 제 품에 멀쩡하게 안겨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