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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37)화 (37/110)
  • 37화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러기를 바라며 한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묵묵히 캐슬린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한참 만에 그는 대답했다.

    “그래, 넌 포로가 아니지.”

    평상시의 그와 같이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루치를 돌아보고 난 그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 달라져 있었다.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군. 사과하지.”

    캐슬린은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저 남자가 뭐라고 한 거지?

    “앞으로는 공작저 안이라면 어디든 가도 좋다.”

    그는 문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래도 밖으로는 내보내 줄 수 없어. 지금쯤이면 황후도 소식을 들었을 테니.”

    탄식이 나왔다. 알렉시스 발텐은 역시 이런 사람이었다. 너그러운 척하면서도 저를 구렁텅이에 빠트리고야 마는.

    “족쇄를 거두고 올가미를 매셨네요. 제가 그렇게까지 공작님께 가치 있는 도구였나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한참이나 캐슬린의 눈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나갔다.

    * * *

    알렉시스는 제가 한 말을 지켰다. 그날부로 침실 밖으로 나설라치면 막아서던 호위와 시녀들이 순순히 물러났다.

    호기심이 많은 루치가 방 안에 있는 걸 싫증내며 칭얼거릴 땐 에밀리가 안고 밖으로 나가곤 했는데, 이젠 함께 정원까지 나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엄마 어디 있어, 루치?”

    잔디밭에 천을 펴고 앉아 손뼉을 치니 에밀리에게 안겨서 나뭇가지를 보고 있던 루치가 돌아보고 까르르 웃었다.

    “마마!”

    그리고 놔달라는 듯 바둥거렸다. 웃음을 터뜨린 에밀리가 풀밭에 내려놓자 전속력으로 기어온 루치가 안아 달라는 듯 두 팔을 벌렸다. 캐슬린은 아이를 덥석 안아 들었다.

    “이건 뭐야? 엄마 주려고 가져왔어?”

    “으으응?”

    “엄마 거 아니야?”

    아이의 작은 손에는 나뭇잎이 쥐어져 있었다. 손을 내밀어 봤지만 루치는 주지 않았다.

    “도련님이 갖고 싶으신가 봐요. 폴 아저씨가 매일 아침에 나뭇잎을 다 닦아 놓으시니까 입에 넣어도 괜찮을 거예요.”

    에밀리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루치 도련님이 얼마나 귀여운지 요즘 사용인들이 매일 다 그 이야기만 한다니까요.”

    “……다행이네.”

    이전에 있던 사용인들이라면 루치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지금 사용인들은 캐슬린이 하녀였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자신들과 함께 일한 적은 없어서인지 거부감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이에게까지 그런 외로움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던 캐슬린은 사용인들의 그런 태도가 낯설면서도 고마웠다.

    “빨래방이나 주방 애들은 도련님을 볼 일이 없으니까 더 난리예요. 제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아기 옷을 만드는 연습도 하고, 이유식을 만든다고 설치더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이유식 종류를 늘려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던 찰나였다. 캐슬린은 루치의 팔꿈치에 묻은 흙을 털어 주면서 말했다.

    “안 그래도 주방에 한 번쯤 가 볼까 생각했어. 오늘 저녁에는 새로운 이유식을 만들어 봐야겠다.”

    “네, 제가 도련님을 데리고 있을게요. 편하게 다녀오세요.”

    “응. 루치, 뭐가 제일 먹어 보고 싶어?”

    햇빛을 받으며 쉬던 찰나, 새로 시중을 들게 된 시녀가 종종거리며 다가왔다.

    “마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혹시나 해서 뒤를 돌아보니, 페터가 금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캐슬린!”

    “페터?”

    캐슬린은 루치를 에밀리에게 넘겨주고 급히 일어섰다.

    “캐슬린, 몸은 어때요? 다친 데는 없나요?”

    페터는 가까이 오자마자 캐슬린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괜찮아요.”

    “루치는요? 루치도 괜찮아요?”

    에밀리가 엉겁결에 품에 안은 아이를 내밀어 보여 주었다. 아이를 돌아본 페터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모모!”

    고모를 알아본 루치가 반색하며 팔을 흔들자 페터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페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그동안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루치, 그건 나 주려고?”

    하지만 루치는 페터가 내민 손을 외면하고 다시 에밀리에게 안겼다. 통통한 손에는 여전히 나뭇잎을 꼭 쥔 채였다.

    “괜찮아요. 잘 지내고 있어요.”

    캐슬린은 웃으며 페터를 안심시켰다. 에밀리는 눈치를 채고 인사한 뒤 아이를 안고 돌아갔다.

    “미안해요. 연락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경황없이 이곳에 다시 오게 되어서…….”

    “괜찮아요. 캐슬린이 어떻게 다시 여기 오게 되었을지 눈에 뻔합니다.”

    페터가 풀밭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제가 오솔레 마을에 찾아갔을 땐 이미 늦었더군요. 미리 호위라도 몇 보내 두었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들킬 줄은 몰랐어요.”

    “……저도 그랬어요.”

    캐슬린은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요제프가 마지막까지 도와줬어요. 방금 보셨죠? 루치가 그의 아이란 사실은 들키지 않을 거예요.”

    “그렇군요. 요제프가 루치의 얼굴을 바꿔 주었군요.”

    무언가를 생각하던 페터가 애써 쾌활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요제프는 제가 꼭 형님보다 먼저 찾을 테니까. 그는 살아 있을 겁니다.”

    “정말 그렇겠죠?”

    “물론입니다. 숲뿐만 아니라 델라포스 신전과 마이어 전역도 수색 중이니까 곧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요제프의 실종은 캐슬린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아직 시신이 발견되지는 않았으니까 죽지는 않았을 텐데, 알렉시스보다 페터가 먼저 그를 찾아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페터, 어떻게 들어왔어요?”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캐슬린의 물음에 페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문지기가 전하를 들여보내 주었나요?”

    “그럼요. 발텐 저의 출입을 금지당한 적은 없습니다.”

    페터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다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

    “아…… 하지만 형님이 아셨더군요. 제가 캐슬린이 도망치는 걸 도와줬다는 걸 말이에요.”

    아는데도 들여보내 줬다는 건 무슨 생각에서일까.

    ‘자비라도 베풀고 싶어진 건가. 아니면 날 놔주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과시하는 걸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좀 더 빨리 오지 못해서.”

    페터는 캐슬린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을 다른 뜻으로 해석한 듯 사과했다.

    “시급한 일이 있어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페터는 최선을 다해 절 도와주고 있다는 걸 알아요. 전 사과를 받을 게 아니라 감사를 해야 하는 걸요.”

    “가족끼리 그런 예는 차리지 말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캐슬린은 작게 미소 지었다.

    “페터, 제가 떠나도 우린 가족일 수 있겠죠? 저는 당신이 루치의 대부, 아니 대모가 되어주면 좋겠어요.”

    “당연한 말입니다. 전 이미 루치를 제 자식처럼 생각하는걸요. 그런데 캐슬린.”

    페터가 조심스레 물었다.

    “떠나다니요? 다시 오솔레로 갈 생각입니까?”

    “아뇨.”

    그녀는 구겨진 치맛자락을 정리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더욱 낮춰서 말했다.

    “요제프를 다시 찾으면 전 루치와 함께 카르미네로 떠날 거예요.”

    “카르미네요? 거긴 왜요? 그 험한 곳에 아이를 데리고 가신다고요?”

    “네. 그곳에 저희 어머니의 가문 사람들이 있어요.”

    그녀는 3년 전, 카르미네 산맥에서 저와 같이 은발에 푸른 눈을 한 사람을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페터는 감탄했다.

    “외가 친척을 찾은 거라면 정말 다행이군요.”

    “제게 무슨 말을 하려는 듯했어요. 찾을 수 있다면, 그쪽에서 지내게 해 달라고 부탁할 거예요.”

    “그럼, 마이어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 겁니까?”

    페터는 망설이다 그렇게 물었다. 캐슬린은 그의 태도가 아쉬움 때문이라 여기고 대답했다.

    “페터에겐 미안하지만…… 그럴 거예요.”

    “영원히 떠날 거란 말인가요?”

    “그래요.”

    “형님도 이 사실을 압니까?”

    “아뇨. 그에겐 말하지 않았어요.”

    다행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페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캐슬린이 의아해할 즈음 페터는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비밀로 하지요.”

    “페터, 혹시 다른 생각이라도…….”

    “아닙니다. 루치를 떠나보내야 한다니 아쉬워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캐슬린은 이곳이 지긋지긋할 텐데 제가 이기적으로 생각했군요.”

    재빨리 사과한 페터가 바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캐슬린도 따라 일어섰다.

    “곧 다시 오겠습니다. 그땐 루치에게 주는 선물을 챙겨 올게요.”

    “네, 기다릴게요. 이번엔 먼저 말없이 사라지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고마워요. 루치에게는 꼭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거든요.”

    페터는 웃으면서 돌아갔지만, 애써 착잡한 심경을 숨기는 것처럼 보였다. 캐슬린은 그것이 예정된 이별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 들어서자 모두가 캐슬린을 반겼다. 사용인들이 아이를 좋아한다던 에밀리의 말에도 그녀는 조금 긴장한 상태였는데, 예전 사용인들과 달리 호의적인 태도에 마음이 놓였다. 손수 이유식을 만들어 보려 했으나 이미 그들이 준비해 놓은 이유식이 여럿이라, 끓이는 것만 도왔다.

    “그럼 잠시 후 식사와 함께 도련님의 이유식도 올려 드리겠습니다, 마님!”

    루치를 소개해 주겠다는 약속에 신난 요리사가 쾌활하게 소리쳤다. 캐슬린은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루치, 다 씻었어? 엄마가 새로운 맘마를 준비했는데 분명 너도 좋아할 거야. 이따가 같이.”

    아이의 밝은 웃음을 들으며 열린 문으로 들어서다 말고 캐슬린의 말이 뚝 끊겼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시스가 소파에 앉아 루치를 데리고 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이가 알렉시스에게 올라타 놀고 있었다.

    “이게, 지금…….”

    황당해서 말도 안 나왔다.

    “이제 왔나?”

    그는 한쪽 팔로 아이를 안으며 일어섰다. 루치는 알렉시스의 목을 껴안으며 신난 듯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바바!”

    심지어 알렉시스의 손에는 나뭇잎이 들려 있었다. 아까 루치가 캐슬린에게도, 페터에게도 주지 않으려 용을 썼던 그 나뭇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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