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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36)화 (36/110)

36화

떠올려 보면 눈길이 가기 시작한 건 처음부터였다.

알렉시스는 전장에서 세운 공으로 발텐 공작위를 받았다. 트리벨리언 역사상 황실의 사생아가 공식적으로 고위 귀족의 작위를 받은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일이었으나, 누구도 임명을 반대하지는 못했다.

황제의 비호와 더불어 황후의 침묵, 황태자의 호의에 반대의 뜻을 내비칠 배짱 좋은 귀족은 없었다. 물론 그의 친모가 이미 사망하였다는 사실도 순조로운 작위 수여에 한몫했다.

“새로 들어온 하녀들입니다, 도련님.”

어머니의 동료였다던 시녀 오드리 듀록이 하녀 여럿을 줄줄이 이끌고 들어왔다.

“요번에 황실에서 시녀들을 보내 주긴 하였으나, 아무래도 하녀들은 새로 뽑는 게 나을 듯해서 말이에요.”

그녀는 알렉시스가 일곱 살 때부터 유모 노릇을 했다. 사실 어머니로부터 그녀의 이름을 들은 적은 없었지만, 모친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으므로 알렉시스는 그녀를 따랐다. 그 대가로 그녀는 발텐 공작이 된 이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누렸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알렉시스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전장에서 돌아온 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뿐이었으니까.

“그래도 도련님이 주인이시니 한 번씩은 보시라 데려왔답니다. 자, 인사하렴.”

“안녕하십니까, 주인님.”

하녀들이 입을 모아 인사했다. 알렉시스는 어깨의 망토를 끌러 내려놓으며 무심히 그들을 지나쳤다.

그러다 우연히 보았다. 한 소녀의 눈 색이 연한 푸른색인 것을.

“빨래방과 주방에 손이 달린다 해서 충원했답니다. 이쪽은 주방, 저쪽부터 빨래방이죠. 황궁의 법도 그대로 가르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발텐이 그리 유서 깊은 가문도 아닌데 애쓸 필요 없습니다.”

알렉시스는 소파에 길게 누우며 주방으로 배정받은 주홍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녀에게서 억지로 눈길을 떼어 냈다. 그리고 유모를 향해 말했다.

“이만 나가 보세요. 앞으로는 보고할 필요 없습니다.”

“네. 그럼 쉬세요, 도련님.”

유모는 그 말을 기다린 듯이 들떠서 나갔다. 알렉시스는 한 줄로 서서 나가는 소녀 중 마지막에 선 아이의 뒷모습에 이상하게 신경이 쏠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곧 잊어버렸다.

스물한 살의 젊은 공작은 위태로웠다. 귀족들이 묵인했다 하여 언제까지나 사생아의 신분이 떳떳하지는 않았다. 심지어는 황제조차 변했다. 그는 갈수록 티가 나게 어린 황태자를 싸고돌며 발텐 공작의 권력을 경계했다.

다행히 남부 정복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알렉시스에겐 상당한 힘과 발언권이 있었다. 그렇다 해도 공작저로 돌아올 때는 지칠 수밖에 없었다.

“곧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각하.”

아침이라기보단 새벽녘에 가까운 시간에 귀환한 그를 맞는 것은 늘 알스도프였다. 알렉시스는 꼬박 하루를 굶은 채로 대신들과 설전을 벌이고 온 터였다.

전장에서 돌아온 후, 한동안 그는 황궁에서 절대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황궁에서 먹은 것은 어릴 적의 독이면 충분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알스도프는 그의 끼니를 챙기는 데 늘 신경을 기울이는 편이었다. 오늘도 노집사의 간청에 결국 알렉시스는 억지로 다이닝 룸의 의자에 앉아 지친 어깨를 주물렀다. 굶주림이야 전장에서 늘 겪었던 것인지라 그리 힘들지는 않았으나 잠시 후 다시 황궁으로 나서야 했으므로 억지로라도 배를 채우는 것이 나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알스도프가 들어왔다. 트롤리가 지나갈 수 있도록 알스도프가 문에 붙어 서자 주홍색 머리의 소녀가 나타났다.

그때 알렉시스는 연하늘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까는 소녀는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잽싸게 음식을 세팅한 소녀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다시 사라졌다. 알스도프가 가까이 와서 시중을 들어 주었다. 알렉시스는 무심코 물었다.

“저 아이는 어디서 왔지?”

“아, 남작 부인께서 말씀하시기로는 백작가에서 오래 살아 예법을 잘 안다더군요.”

음식을 삼키며 알렉시스는 생각했다. 눈길이 간 건 의외로 손놀림에 예법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어서라고.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름 따위를 물어보거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목숨 하나 부지하고 살아남아 뜻을 이루기 전까지 과거의 기억 따위를 붙잡는 건 사치에 불과했다.

그 후 6년 동안, 알렉시스는 저택에서 우연히 그녀가 지나칠 때만 이따금 눈길을 주었다.

물론 그 연하늘색 눈이 저와 마주치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알렉시스가 지나갈 때면 그 하녀는 늘 손을 모으고 시선을 땅에 고정했다. 더없이 예의 바른 태도였다. 주방 하녀가 감히 제국의 공작을 바라본다는 건 그의 허락이 없다면 불가능했으니까.

그는 늘 말없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스물일곱 살, 그날 밤이 오기 전까지는.

* * *

‘아무것도 안 돼.’

캐슬린은 낭패 어린 얼굴로 손을 만지작거렸다. 이젠 익숙하게 얼음을 다룰 수 있는데, 공작저로 돌아온 이후 이상하게도 능력이 사용되지 않았다.

숲에서는 당황하여 깜빡 잊고 있었으나 공작저로 돌아온 뒤부터는 탈출을 위해 계속해서 시도했다. 그러나 우습게도 물 한 컵도 얼릴 수가 없었다.

“마님, 물에 문제가 있나요? 새로 떠 드릴까요?”

아기 침대를 가만가만 흔들어 루치를 재우던 에밀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물었다. 캐슬린은 대충 컵을 내려놓으며 얼버무렸다.

“으응, 아무것도 아냐. 루치는 잠들었어?”

“네. 실컷 기어 다니더니 피곤하셨나 봐요.”

에밀리는 뿌듯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루치를 돌아보았다.

“도련님은 아직 태어난 지 7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정말 빨리 자라시네요.”

“그래?”

“그럼요. 제가 동생을 많이 업어 키워 봐서 아는데 벌써 이 정도로 기어 다니는 건 못 봤어요. 또래보다 키도 크고 말귀도 잘 알아듣는 걸 보면 정말 똑똑한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엔 평범한데. 네가 너무 띄워 주는 거야.”

“에이, 진짜라니까요. 아마 주인님을 많이 닮아서 그런가 봐요.”

의심 없는 에밀리의 말에 캐슬린의 미소가 흐려졌다. 알렉시스는 사용인들에게도 철저히 루치가 제 아들이라고 믿게 했다. 사소한 오해가 있어서 잠시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최근에 화해하면서 오가다가 아이가 생겼고 출산 후 돌아온 것이라고 말이다.

에밀리와 알스도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용인들이 교체되었기에 가능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에밀리는 둘 사이에 흐르는 냉기를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알렉시스에게 깜빡 속아 넘어갔다. 그가 답지 않게 아이에게 신경을 쓰는 모습에 의심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인질로 생각해서 그러는 것뿐인데.’

진짜 제 자식이라 생각지 않으니 그러는 거라고 캐슬린은 생각했다. 에밀리는 들뜬 목소리로 칭찬을 이어갔다.

“얼굴은 마님을 닮았으니, 키나 목소리는 주인님을 닮으시면 좋겠어요. 그럼 도련님도 정말 늠름하실 텐데! 빨리 일어서거나 말문이 트이면 주인님도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아, 황실의 핏줄이니 커 가면서 눈은 황금색이 될까요? 지금도 정말 귀엽지만 은발에 금안이면 커서 웬만한 아가씨들은 다 설레게 할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실 텐데요.”

“글쎄.”

곧 떠날 테니, 루치가 말을 하게 될 정도로 자란 모습을 알렉시스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여기며 캐슬린은 단언했다.

“루치는 공작님을 닮지 않을 거야.”

“에이, 그건 모르는 일이죠.”

“그럴 일은 없어.”

요제프의 신성력이 풀리려면 루치가 한참 더 자라야 했다. 그 전에 떠나면 알렉시스를 닮은 얼굴은 드러나지 않을 테니 에밀리의 바람은 이루어질 리 없었다. 단호하게 대답한 캐슬린이 막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미래를 장담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말은 없지.”

언제 문이 열려 있었는지, 벽에 기대어 선 알렉시스가 말했다. 에밀리가 황급히 일어났다.

“이만 나가 봐.”

“네, 주인님.”

그녀가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가자 알렉시스가 아기 침대를 힐끗 쳐다봤다. 아이를 빼돌리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꼭 감시하셔야겠어요?”

아이가 깨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췄으나 날이 선 목소리가 나왔다. 캐슬린은 이전과 달리 밤낮으로 자꾸 찾아오는 그가 불편했다.

“아이가 제 발로 도망치기라도 할까 봐 그러시는 건가요?”

“아니. 네가 혼자 도망칠까 봐.”

“……절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캐슬린은 속모를 금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의 어느 엄마가 아이를 남들 사이에 내버려 두고 홀로 떠나죠?”

그 말에 내내 무감해 보이던 금빛 눈이 조금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다시 평온해졌다. 캐슬린은 힘을 주어 말했다.

“설령 죽는다 해도 전 루치를 혼자 두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함께 보내 주세요.”

“못 보내 준다고 했잖아.”

그는 가만히 아기 침대 가까이 가 앉았다. 캐슬린에겐 등을 보인 채였다.

“이만 포기해. 그럴 생각 없으니.”

“왜 이러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캐슬린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후계자가 필요 없다고 하셨잖아요. 생긴다고 해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핏줄도 아닌 아이를 왜 후계자라고 알리시는 거죠?”

떠나기 전에 그의 태도가 바뀌었다면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리는 낌새라도 보여 줬다면 모르는 척 눈감았을지도 모른다.

“평민 신관 따위가 공작님의 것을 훔쳐서 화라도 나셨어요? 아니면 황후께 이런 식으로라도 앙갚음하고 싶으신 거예요?”

“어느 쪽 같아?”

요제프를 입에 올리자 뒤를 돌아본 알렉시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캐슬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둘 다요.”

알렉시스는 천천히 다가왔다.

“좋을 대로 생각해. 어차피 아이 아버지는 내가 될 테니까.”

“책임지지도 못할 짓 하지 마세요. 전 몰라도 루치는 공작님의 도구 취급하게 두지 않을 거니까.”

“책임질 거야.”

알렉시스는 캐슬린의 한쪽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까지 포함해서 전부. 발텐 공작저에 머무르는 한은.”

아이를 낳은 공작 부인은 도구로서 또 다른 가치라도 가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캐슬린은 가만히 그의 손을 빼냈다.

“진작 그렇게 말씀해 주시지 그랬어요. 제가 아직 어리석었을 때 말이에요.”

“캐슬린.”

“그랬다면 감동해서 눈물이라도 흘려 드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캐슬린은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똑똑히 말해 주었다.

“이렇게 방 안에 가둬 두고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소름만 끼쳐요. 공작님은 여기가 전장이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건 포로에게나 하는 짓이에요. 그리고 전 포로가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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