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각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생각할 일이 있어서.”
알렉시스는 잔을 내려놓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자네 말을 듣고 있으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거든.”
“그리 말씀하시니 궁금해지는데요.”
셴베르크 백작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잔을 더 채웠다. 알렉시스는 그의 가족관계를 떠올리며 운을 띄웠다.
“여동생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 예. 저보다 두 살 어립니다. 올해로 딱 열아홉 살인데 이제 막 성인이 됐죠.”
“약혼은 했나?”
“아직입니다. 셴베르크 가가 고위 귀족으로 보긴 어려우니 벌써 혼담이 들어올 린 없죠. 이제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럼 내가 중매를 서 볼까 해.”
“각하께서요? 어떤 분을…….”
“내 동생은 어떤가?”
“예?”
순간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셴베르크 백작이 멍하니 되묻다가 얼굴이 살짝 굳었다.
“설마 그 말씀은…….”
“셴베르크 가는 영지가 크진 않으나 역사만은 황실에 뒤지지 않지. 황태자비가 되기 충분하다 생각하고 있어.”
“그렇지만 각하, 하지만 제 동생은 그런 중요한 자리에 오르기엔 아직 어립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나. 황태자와 나이가 같으니 문제없을 것 같군.”
알렉시스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셴베르크 백작의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 결혼은 셴베르크가 제국에 충성을 보인다는 훌륭한 증거가 되어 줄 거야.”
“…….”
“셴베르크 영애가 황태자비가 된다면 자넨 차기 황후의 오라비가 되니, 지금보다 더한 부를 거머쥐겠지. 마이어에서 대저택을 구입하고, 큰 영지를 갖는 게 자네가 원하는 거 아니었나?”
“물론 그렇습니다만, 너무 갑작스러운 말씀인지라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표정을 수습하며 부드럽게 말을 받아넘기는 셴베르크 백작의 얼굴은 감쪽같았으나, 알렉시스는 그의 손가락에서 굳은살을 발견한 후였다.
“물론 그래야지. 동생의 결혼인데.”
알렉시스는 흔쾌히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머무는 동안 즐겁게 지내도록. 혼담에 대해 할 말이 있으면 발텐 저로 찾아와도 좋네.”
“그리하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셴베르크 백작은 능청스럽게 술잔을 들고 알렉시스를 배웅했다. 그리고 아름답게 차려입은 영애들 틈에 끼어들어 어울리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는 클럽을 나서자마자 잠복하던 그림자를 불러냈다.
“앞으로 셴베르크 백작이 수도에 머무는 동안 누구의 저택을 들르는지 파악해서 보고해. 만약 그의 가신이 영지로 돌아간다면 그 즉시 알리고.”
“명 받들겠습니다, 각하.”
셴베르크와의 정략혼은 남부의 반란을 잠재울 좋은 기회였다.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황실은 물론이고 셴베르크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까 백작의 반응은 어딘가 이상했다. 여동생을 끔찍하게 아끼는 오라비여서 그런 것과는 달랐다.
게다가 그의 손은 매번 술과 여색에만 빠져 지낸다는 소문과 달리 상처가 아문 희미한 흔적이 여럿이었다. 마치 수도에 올라오기 직전 급하게 신성력으로 치료를 한 것처럼.
‘재밌어지겠군.’
셴베르크 백작의 선택에 따라 남부 반란의 양상이 정해질 것이다. 게다가 황후는 정략혼 소식을 들으면 캐슬린이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는 사실에 신경 쓸 여유도 없어질 터였다. 이 결혼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쓸 테니까.
공작저로 돌아왔을 때는 새벽이 가까운 밤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알스도프가 편지를 가져다주었다.
“에디스 양이 전해 달라 했습니다. 일단 라일런트 자작이 각하의 증세를 간략히 설명했는데, 그에 대한 소견이라는군요.”
저택 출입을 금한 터라 서면으로 전하는 모양이었다. 알렉시스는 별생각 없이 편지를 펼쳤다가 굳어 버렸다.
[공작님께선 전갈의 독으로 마비된 신경이 점차 회복되는 것으로 보여요. 얼음꽃으로 독의 활성 상태가 어느 정도 완화된 상태이긴 하지만, 타사르트 약초로는 호전되기 어려운데 희한한 일이네요. 혹시 신성력이 뛰어난 신관에게 치료를 받으셨나요? 그렇다면 그 신관을 불러 치유력을 꾸준히 쓰게 하세요. 얼음꽃보다 그게 더 효과가 있을지 몰라요.]
중독 치료를 위해 신관을 불러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외상에만 두각을 나타냈을 뿐 내부에 입은 손상까지 치료하지는 못해, 약제사를 찾아 치료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그런데 저도 모르는 사이 신관의 치료가 이루어졌다면…….
델라포스의 종이 떠올랐다.
그가 카르미네 산맥에서의 산사태 이후 저를 치료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얼마 전 오솔레 마을에서 쓰러졌다가 눈을 다시 떴을 때, 평소와 달리 통증이 없었던 것도 떠올랐다.
오솔레 마을의 중년 남자는 요제프란 자가 솜씨 좋은 치료사라 했었다. 어쩌면 그때 그가 두 번째로 저를 치료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해독을 위해 힘썼으나 이렇게 단번에 두각을 나타낸 치료는 처음이었다.
알렉시스는 알스도프를 향해 말했다.
“카벨을 불러.”
신경이 회복되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요즘 들어 심장 쪽에 문제가 있는 기분이 들어 그것까지 확인해 볼 참이었다. 곧 카벨 선생이 불려 왔다.
“각하, 더 편찮으신 곳이 있는지요?”
한밤중에 뛰쳐나와서인지 머리가 엉망이었다.
“심장에 관해 의사의 소견을 듣고 싶군.”
알렉시스는 에디스의 소견과 함께 간략하게 제 증상을 설명했다.
“약제사는 신경이 회복되는 과정이라 하던데, 예전보다 더 숨이 막히고 갑갑한 기분이 자주 들어. 순간적으로 화가 나기도 하고, 가끔은 뚜렷하지 않은 찝찝한 느낌이 계속돼. 이건 해독 진행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음…….”
카벨 선생은 알렉시스의 말을 열심히 받아 적더니 애매한 표정이 되었다.
“각하. 언제부터 그런 기분이 들기 시작하셨습니까?”
“언제부터냐고?”
굳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알렉시스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보름 전부터인 듯하군.”
“마님께서 돌아오신 다음부터요?”
“대강 그렇겠지.”
카벨 선생은 알스도프와 눈빛을 마주치더니 빠르게 무언가를 적으며 말했다.
“그 뚜렷하지 않은 느낌은 정확히 어떤 쪽에 가깝습니까? 긍정적인 쪽입니까, 부정적인 쪽입니까?”
“무슨 의미에서 하는 말이지?”
“음,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그 감정은 혼자 계실 때 느끼시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이와 함께할 때 느끼시는 겁니까?”
“보통 후자다.”
“마님과 대화를 나눌 때 느끼십니까?”
“그렇다.”
“도련님을 보실 때도요?”
“그런 것 같군.”
카벨 선생은 기록하던 것을 끝냈다.
“에디스 양의 말처럼 신경이 회복된 것으로 보입니다, 각하. 감정을 느끼는 신경이 되살아났으나 너무 어릴 적에 마비되었던 터라, 각하께선 그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파악하지 못하시는 듯합니다.”
“독이 심장 쪽에 머물러서 생긴 증상이 아니란 말인가?”
“예. 보통 사람은 감정에 따라 심박동 수가 달라지기도 하니까요. 물론 완전한 해독이 되었는지는 차차 더 살펴봐야겠지만요.”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의사의 소견이니 더 들어 보려던 찰나였다. 카벨 선생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마님과 도련님을 보실 때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알스도프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알렉시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알고서 하는 말인가?”
“말씀해 주셔야 답을 드릴 수 있습니다, 각하.”
“……아니다. 죽이려는 생각은 한 적 없어.”
알렉시스의 말에 카벨 선생은 확신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인지하지 못하시기만 할 뿐이지 정상적으로 감정을 느끼고 계십니다. 축하드립니다, 각하. 신경이 이렇게까지 회복되었으면 완전히 해독하는 데도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뜻밖의 말이었다.
심장이 욱신거리고 숨이 막히는 이 기분이 정상적인 감정이라니 인정하기 어려웠다.
“이게 정상적인 거라고?”
“예. 가족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겁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하셨다가 다시 함께 지내게 되셨으니 작은 일에도 조바심이 나고, 불안함이 느껴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각하께서 마님을 사랑하시는 만큼,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감정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표현하실 수 있을 겁니다. 마침 도련님께서도 계시니 더 다행인 일이지요. 우선은 도련님을 더 자주 가까이하시면서 그 감정을 느껴 보려고 노력을 하시면…….”
“그만.”
알렉시스는 신이 나서 빠르게 떠드는 카벨 선생의 말을 끊었다.
“뭐라 했나?”
“예? 아, 도련님을 더 가까이하시면서…….”
“그 전에 한 말.”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자연스러워질 거라는 말이요?”
영문을 모르고 되묻는 카벨 선생의 얼굴은 무엇이 잘못됐냐는 듯한 물음을 담고 있었다.
“……이만 돌아가 보게.”
“예, 각하.”
그는 한시름 놓인 얼굴로 방을 나갔다. 알렉시스는 옷을 갈아입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카벨 선생의 말을 곱씹으며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알스도프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가 트롤리를 끌고 다시 돌아왔다.
“생각을 정리하시는 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리고 알렉시스의 앞에 독한 술을 가득 채운 얼음 잔을 놓아주며 말했다.
“푹 쉬시는 데 도움이 되실 수도 있고요.”
“자넨 어떻게 생각하지?”
알렉시스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는 채로 내뱉었다.
“카벨 선생이 한 말.”
노집사 알스도프는 마치 그 질문을 오랫동안 기다린 것처럼 조용히 대답했다.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듀록 남작 부인과 함께이셨던 알렉 도련님부터 지금의 발텐 각하까지. 곁에서 모셨던 집사의 눈으로 보면 카벨 선생의 말은 사실입니다.”
“나가 봐.”
“편히 쉬십시오, 각하.”
알스도프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긴 복도를 따라 그가 끄는 트롤리 소리가 아련히 멀어졌다.
‘사랑.’
알렉시스는 잔 표면을 매만지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그런 감정 따위 애초에 제게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곁에 있을 명목상의 부인은 황후를 견제할 목적으로만 존재해야 했다. 캐슬린과 결혼한 이유는 그래서였는데…….
식도를 타고 흐르는 술이 용암처럼 뜨거웠다.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 전 이제 공작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숨이 가빠졌다. 알렉시스는 상의를 뜯어내듯 벗어 던졌다. 그런데도 가슴은 자꾸만 무엇에 옥죄인 듯 답답했다.
- 그 사람을 사랑해서 낳은 거예요. 내 아들은.
그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계속해서 울렸다. 순간 손에서 잔이 미끄러졌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 조각난 잔해가 튀어 얼굴에 스쳤다.
알렉시스는 뜨끈한 액체가 흐르는 뺨을 닦아 냈다. 그런데 손에 묻은 액체는 붉은빛을 띠고 있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다시 훑었다. 잔에 베이지 않은 다른 쪽 눈가도 어느새 젖어 있었다.
‘아…….’
그제야 알렉시스는 제 손끝에 묻은 것이 눈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캐슬린 윈스턴은 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며,
알렉시스 발텐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