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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33)화 (33/110)
  • 33화

    페터는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았지만 붉은 망토는 멀어져 가고 있었다. 페터는 멍하니 알렉시스의 말을 곱씹다가 발길을 돌렸다.

    “전하, 어디로 가십니까?”

    “황후궁으로 간다.”

    “예? 전하, 진심이십니까?”

    상황이 어떨지 아시면서 지금 그곳을 간다는 말씀이냐고 되물으려던 시종장은, 망설임 없는 황태자의 뒤를 허둥지둥 따랐다.

    * * *

    황후궁은 예상처럼 난장판이었다. 페터는 들어서자마자 깨진 찻잔 조각을 밟았다.

    “어머님.”

    “페터!”

    황후에게 달라붙어 애원하던 시녀 여럿의 낯에 페터를 보고 안도의 빛이 어렸다. 페터는 굳은 얼굴로 손짓해 시녀들을 물렸다.

    “여쭤볼 것이 있어 왔습니다.”

    “정략혼이라니! 어떻게 된 것이냐?”

    “진정하시고 앉으세요.”

    궁정 회의가 끝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황후궁에는 이미 모든 이야기가 다 전해진 모양이었다. 페터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찻물로 얼룩진 테이블 앞에 앉았다. 황후가 흥분한 어조로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이었다.

    “내가 진정하게 생겼느냐? 발텐 공이 네 목을 졸라 버리려고 그딴 짓을 벌인 게 분명한데!”

    “아직 확정된 건 없습니다. 전 결혼으로 이 문제를 마무리 지을 생각 없어요.”

    “당연히 그래야지. 이민족 따위의 더러운 핏줄을 황실에 더 들일 순 없잖느냐? 그런 수치는 발텐 공으로 이미 차고 넘치는데.”

    “어머님! 제발 말씀을 가려 하세요.”

    시녀들이 이미 다 빠져나가 침실에는 둘밖에 없었지만 페터는 황후를 말리려고 애썼다. 병증에 가까울 정도로 쉽게 흥분하고 내내 불안에 시달리는 모친에 대한 안쓰러움도 있었지만, 알렉시스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기 때문이다.

    캐슬린의 일로 그에게 화가 나긴 했으나 그래도 페터는 형제인 알렉시스가 제 어머니에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것을 편하게 들어 넘길 성정은 못 되었다.

    “다음 회의 때 오스타버 후작이 네 편에 설 것이다.”

    한참을 씨근덕거리던 황후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발텐 공을 다시 남부로 내려보내거라.”

    “그건 안 될 말입니다. 남부 이민족은 이미 제국의 백성들인데, 형님이 그곳에 출전하시다뇨? 어떻게 황족이 백성을 직접 진압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러니 보내란 말이지. 발텐 공은 너무 오래 살았다. 이젠 죽을 때가 됐어.”

    “어머님!”

    “대체 왜 말을 들어 먹질 않아!”

    황후가 벌컥 노염을 내더니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세게 쥐고 윽박질렀다.

    “너, 네가 여자란 사실을 들키면 어찌하려고 그래? 정략혼 이야기까지 나온 마당에 더 숨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번이 아니더라도, 곧 성인이 되면 왜 약혼조차 하지 않느냐고 의심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럼 발텐 공이 가만있을 것 같으냐?”

    “그래도 다시 형님을 전장으로 보낼 순 없습니다!”

    페터는 황후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며 항변했다.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요. 굳이 형님을 또 희생시키지 않아도 됩니다.”

    “네가 황녀란 사실이 드러나도 목숨을 부지하려면 그 사생아 놈이 없어져야 한다는 걸 왜 몰라?”

    황후는 이를 갈며 말했다. 페터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출전이 결정되기 전에 다시 수를 써야 하는데. 천한 놈이 운은 얼마나 또 좋은지, 전장에 굴러도 그 질긴 목숨이 끊어지지도 않고…… 그래도 그때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으면 끝났을 텐데.”

    “끝나요?”

    어머니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낸 페터가 말을 끊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발텐 공이 말해 주지 않더냐?”

    황후는 입술을 떨며 웃었다. 페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머니의 팔을 잡고 간절하게 말했다.

    “제게 대체 뭘 숨기신 겁니까? 제가 어렸을 때 형님께서 전장에 나가신 거야 그럴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공을 세워야 황실의 방계로서 공작 작위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머님께선 지금 그런 형님을 설마 죽이려 하셨다는 겁니까?”

    “그놈은 여섯 살 때부터 남부 전갈의 독을 먹었어. 그래도 죽지 않았지.”

    황후는 페터의 손을 쳐 냈다. 죄책감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어머니의 태도에 페터는 할 말을 잃었다.

    “그 독은 뇌를 점점 마비시켜서 감정을 죽인단다. 최종적으로 살육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게 만들지. 남부 이민족의 피가 흐르는 천것에게는 그런 역할이 제격이었어. 황실을 위해 반군을 진압하다 장렬하게 목숨을 바치고 죽는 것 말이야.”

    “어머님!”

    “다 너를 위해서였어!”

    악에 받친 어머니의 눈빛에 페터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황후에게는 자식의 말이라고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놈에게도 좋은 결말이었어. 거기서 내 계획대로 죽었다면 말이다! 그때 남부는 제정신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었어.

    그놈도 처음엔 반항하더니 제 처지를 깨달았는지 나중엔 독을 꾸역꾸역 제 손으로 처먹었지. 그렇게 중독되어서 제정신을 잃는 줄 알았는데…… 망할 자식. 기어코 살았어. 황제 폐하께서 불러들이기 전에 죽었어야 하는데, 하하하……. 일이 더럽게 꼬였어.”

    “세상에…… 어머님, 대체 무슨 일을 벌이신 겁니까.”

    페터는 참담함에 그만 눈앞이 아찔해졌다.

    어머니가 다른 형제인 알렉시스가 참전하기로 결정되어 처음 제 앞에 나타났을 때, 페터는 다섯 살이었다.

    그리고 이복형이 긴 시간 끝에 남부 이민족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전쟁의 사신이란 이름을 얻어 귀환했을 때의 페터는 열세 살이었다.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늘 콤플렉스였던 페터로서는, 전공을 세워 발텐 공작 위를 받게 된 스물다섯 살의 이복형제가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그래서 어머니의 반대에도 슬그머니 그의 주변을 알짱거렸고, 그가 3년 뒤 결혼하여 형수님이라 부를 다른 가족이 생겼을 땐 기쁘기까지 해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자신을 기만한다고 생각했을 거야.’

    형님은 제게 전혀 말한 적이 없어 몰랐던 일이었다. 어머니가 그런 일까지 벌였다는 걸 알았다면 감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페터는 답답한 가슴께를 무의식적으로 쥐어뜯으며 애원했다.

    “어머님, 형님께선 황위에 관심이 없으세요. 설령 제가 비밀을 말한다 해도 반역을 일으키진 않으실 거란 말입니다.”

    “모르는 소리 마라!”

    황후는 단칼에 잘라 말했다.

    “그럴 수 없어. 설령 그놈이 정말 황제 자리에 관심이 없다 해도, 네 비밀을 알면 마음이 바뀔 테니까. 넌 안 돼.”

    “왜 전 안 된다는 겁니까?”

    억울했다.

    페터는 어머니의 저 말이 항상 원망스러웠다. 어릴 적부터 여자도 황제가 될 수 있는 걸 보여 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비밀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저는 이제 완벽한 황태자라 부를 법한 사람이 됐는데 왜 아직도 안 된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황후는 빠르게 말했다.

    “트리벨리언은 황실 핏줄을 가진 남성이 둘 이상 없으면 무너져. 말 그대로 정말 땅이 무너진단 말이다.”

    “예? 그게 무슨.”

    “건국 때부터 내려온 신탁이다. 땅이 갈라지고 강이 뒤집히며 산이 무너지는데, 네가 거기서 황제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시면 정말 끝이야! 그러니 절대 비밀을 들켜선 안 된다. 그저 가만히 있다가 그놈이 자식을 낳게 한 다음 네 밑으로 입적시켜서 데리고 와.”

    “하…….”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페터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말을 듣고 나니 스치는 것이 있었다.

    악화되는 황제 폐하의 병세.

    제국령 최하단에서부터 시작되어 올라오고 있는 원인 미상의 지진. 그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빈민이 수도로 향하고 있어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형님을 혐오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의 후계를 갈망하던 어머니…….

    “내 말이 거짓말 같으냐?”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충격이 어린 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믿지 말아라. 모른 척해. 이 어미가 다 알아서 하겠다. 약을 더 써서 발텐 공을…….”

    “아니요, 어머니. 더는 그러지 마세요.”

    페터는 제 어깨를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손을 떨쳐냈다.

    “전 차라리 형님께 고백하겠습니다.”

    “다 이야기해 줬는데도 왜 이리 고집을 부려!”

    황후가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황실이 숨긴 신탁을 귀족들이 알게 되면, 발텐 공이 싫다고 해도 그들은 널 끌어내리고 그를 황위에 올릴 거다! 정녕 그걸 바라?”

    “형제를 죽여서까지 황제 자리를 얻고 싶진 않아요.”

    “너!”

    “어머님이 바라시는 대로 전 황제가 될 겁니다. 그 점만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러니까 제발, 이제 좀 쉬십시오.”

    황후는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좋지 않은데 흥분까지 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페터는 재빨리 그녀를 침대로 데려가 눕히고 시녀들을 불렀다.

    “황후 마마!”

    “황궁의를 불러라.”

    그는 어머니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완전히 회복되실 때까지는 밖으로 나가시지 못하게 해.”

    “예, 전하.”

    “귀족들이 알현하고자 하면 바로 내게 알리고.”

    그는 절대 어머니의 끔찍한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이미 지금은 어머니가 저지른 짓에 대해 용서를 구하기에도 늦었는데 더한 죄를 지을 순 없었다.

    황궁의가 도착해 진료하는 것을 보고 난 후 페터는 황후궁을 나왔다.

    ‘우선 지진이 어떻게 되었는지 파악해 봐야겠어. 그리고 형님을 찾아가서…….’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페터는 걷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독은 뇌를 점점 마비시켜서 감정을 죽인단다. 최종적으로 살육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게 만들지.

    어머니는 형님이 여섯 살 때부터 독을 먹었다고 했다. 그가 전장에 나섰을 때는 열일곱. 돌아왔을 때는 스물하나였다.

    ‘그럼 15년 동안이나.’

    숨이 막혔다. 살육 외에는 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독을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먹어 왔다면.

    늘 부인을 냉대하다 못해 감흥 없이 지나치던 알렉시스 발텐의 행동은 자의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페터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제가 딛고 선 땅이 무너져 숨통을 막는 기분이었다.

    * * *

    알렉시스는 공작저로 귀환한 이후 다시 에밀리와 아이를 불러들였다. 캐슬린이 쉽게 찾을 수 없도록, 아이는 매일 거처를 바꾸고 있었다.

    “주인님, 도련님을 데려왔습니다.”

    “별일은 없었나?”

    그는 아이를 받아 안으며 물었다. 아이는 순하게 웃으며 알렉시스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이 아이를 보고 있으면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어라 설명할 수는 없는데 그게 불쾌하지는 않았다.

    “예, 도련님께선 잘 자고, 잘 드세요. 다만…….”

    “다만, 뭐지?”

    “마님께서 많이 힘들어하십니다.”

    에밀리가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주인님 말씀대로 식사도 잘 챙겨 드시고 뛰어내린다거나 도망치려고 하지도 않으세요. 그렇지만 도련님이 곁에 없으니 걱정되시는지 잘 주무시지도 못하고 자꾸 우신다고 해요.”

    “…….”

    “주제넘은 말이지만…… 마님께서 도련님을 데리고 있도록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알렉시스는 가만히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해맑은 웃음이 걸린 입가가 그녀를 닮아 있었다.

    그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가서 캐슬린을 데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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