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캐슬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젠 아니에요.”
그녀는 물기 어린 눈을 힘주어 크게 뜨고 한마디 한마디 느릿하게 말했다.
“전 이제 공작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럼 다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 봐.”
“도대체 당신은……!”
캐슬린의 목소리가 높아지려다 루치를 떠올린 듯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몇 번 심호흡한 후 차분해진 목소리로 반문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죠?”
“죽을 때까지 공작 부인으로 살려면 그러는 편이 낫겠지.”
“그렇게 살겠다고 한 적 없는데요.”
“루치를 버리겠다고 하는 소린가?”
“계속 아이로 협박할 셈이에요?”
“못 할 것도 없지.”
진심이었다. 알렉시스는 그녀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3년 동안 제 눈을 벗어나 바깥을 떠도는 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해 볼 때면 속이 답답하고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특히나 신관 새끼와 함께 살았다는 대목을 되짚어 볼 때면. 알렉시스는 다시는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캐슬린의 모든 시간을 속속들이 손에 틀어쥐고 싶었다. 무얼 먹고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루치아노라는 이 아이조차, 그가 모르던 시간 동안 그녀가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존재라면 제가 갖고 싶었다.
그래서라도 이전처럼 그녀가 제게 매달리게 된다면 좋을 것 같았다.
“왜 마음이 바뀌셨어요?”
캐슬린이 불쑥 물었다.
“아내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곁에 있어 달라고 했을 때도 거절하셨고.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러시는 이유가 뭐예요?”
“내 소유였던 걸 뺏기는 기분은 상당히 더럽더군. 그런 경험은 한 번이면 됐어.”
알렉시스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것 외에는 답이 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다.
연푸른색 눈이 파르르 떨리더니 물기가 차올랐다.
“그리 말씀하셨으니 감격에 겨워 춤이라도 춰야 하나요?”
“그러고 싶다면.”
“전 물건이 아니에요. 공작님이 갖겠다 하면 안기고, 버리겠다 하면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고요.”
그녀의 말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처음으로 느낀 심장의 이상이었다.
‘……왜 이러는 거지.’
독이 다시 심장에 퍼질 가능성을 따져 보며, 알렉시스는 한쪽 팔을 뻗어 그녀의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다시 날 사랑해 보라고.”
캐슬린이 팔을 쳐 내려 했지만 알렉시스는 고집스럽게 눈물이 더는 흘러내리지 않을 때까지 닦아 냈다.
“최대한 빨리 예전으로 돌아와.”
아이를 안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그녀의 눈물을 다 핥아 마시고픈 충동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달라진 그녀를 되돌릴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캐슬린 발텐.”
못을 박듯 이름을 속삭여 주자 캐슬린이 몸을 떨었다. 겁을 집어먹은 것보다 화가 나서인 것처럼 보였다. 알렉시스는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그건 저를 향해 어떤 감정은 남아 있다는 방증이었으니까.
가슴이 더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는 아이를 떼어 내 그녀에게 안겼다. 캐슬린이 얼떨결에 받아 안자마자 루치가 바둥거리며 칭얼댔다.
저를 향해 손을 뻗는 아이를 뒤로하고 알렉시스는 빠르게 다이닝 룸을 나와 계단을 몇 개씩 뛰어올랐다. 예전처럼 볼썽사납게 쓰러져 정신을 잃을 순 없었다.
집무실로 들어선 그는 문을 닫아걸고 서랍 안에 든 크리스털 병 두 개 중 하나를 꺼내 한 모금을 마셨다.
싸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몸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에디스 양이 말하길 타사르트 약초는 얼음꽃과 달리 부작용이 있다고 했습니다.
라일런트 자작의 걱정스러운 보고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남부 전갈의 독은 완전한 해독제가 없으니 임시방편밖에 안 된다더군요. 조만간 다시 들르겠답니다.
약의 부작용과 독의 효과.
알렉시스는 그 둘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그러니 상관없었다.
그는 진녹색 액체를 한 모금 더 마시며 물기 어린 연푸른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내가 죽어도 상복을 입어 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식으로 결혼할 수도 없는 신관 새끼가 죽었다고 울며불며 상복을 입겠다던 그녀였다.
하지만 서류상 남편인 제가 죽으면 그래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알렉시스는 신경 끝에서 타오르는 독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캐슬린의 얼굴은 눈꺼풀에 새겨진 듯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 *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회의 진행을 맡은 투란 백작의 말에 시끄럽게 오가던 언쟁이 멈추었다. 알렉시스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회의실에 입장하는 페터를 바라봤다.
저와 꼭 같은 색의 황금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난 기색이었다.
알렉시스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모두 앉으세요.”
열아홉 살의 황태자가 제일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본래는 황제가 맡아야 할 자리지만 투병 중이니 페터가 대신하는 중이었다.
“전하, 한시바삐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남부 이민족들의 불만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고 합니다.”
“단순한 반항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정도의 무력 충돌이 벌어질 기셉니다.”
궁정 회의에 소집된 귀족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페터는 부관이 건네주는 보고서를 넘겨보았다.
“소요가 일어나는 지역에서 앞장선 자 대부분이 10여 년 전 제국에 복속당했던 남부 이민족들이군요. 그들의 대표에게 작위를 내려 영주로 대우하고 농민들에게는 제국민과 같은 세율을 적용해 달라는 게 골자고.”
“맞습니다. 지금은 남부를 중심으로 뭉치고 있지만 북부 이민족들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상황이고요.”
호프웰 백작이 말을 덧붙였다. 그는 북부에 사업차 자주 오가는 만큼 듣는 이야기도 많다는 것을 귀족들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었다.
“이미 영주들이 직접 다스리지 않는 소규모 영지는 본래 거주민인 이민족들에게 성을 탈환당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옵니다.”
“다시 제국의 건재함을 보여 줘야 할 때입니다!”
오스타버 후작의 격앙된 말에 좌중의 시선이 모두 알렉시스를 향해 시선이 쏠렸다.
알렉시스는 피식 웃으며 내뱉었다.
“다들 내가 다시 전장으로 나서길 바라는 눈치군요.”
그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모두가 말을 보탰다.
“남부 전투에 잔뼈가 굵은 발텐 공께서 나서 주신다면 제국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맞습니다. 남부 이민족들이 발텐 공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떤다지요? 그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버릴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출전이 결정되기라도 한 것처럼 회의가 당연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공께선 언제쯤 출전하시는 것이 시기적으로 우리 군에 유리하다 보십니까?”
“배급선은 어느 영지로 하는 것이 좋을까요?”
알렉시스는 당황한 낯빛을 겨우 숨긴 이복동생을 가만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찬물을 끼얹은 듯 회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트리벨리언을 다시 전화 속에 몰아넣어서라도, 전하께 다시 평화를 가져다 드릴지 묻는 겁니다.”
“이민족의 반란은 진압하는 것이 맞겠지요, 발텐 공.”
페터는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제왕학에서 말하는 완벽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그가 잔인한 군주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꼭 피가 흘러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전하. 제게 한 가지 묘안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혼맥입니다.”
짤막한 대답에 페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알렉시스는 쐐기를 박듯 말해 주었다.
“전하께서 이민족들과 결혼을 내걸고 협상을 하시면 유혈 사태 없이 이 사태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황태자비 자리를 약속한다면 이보다 더 쉽게 풀릴 순 없겠지요.”
“공, 진심으로 하는 소리입니까?”
“진심입니다.”
순식간에 회의실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발텐 공작의 발언에 다른 귀족들이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국사상 공국 흡수와 약소 왕국 정복으로 인해 영토를 확장할 때마다 나라 안팎으로는 크고 작은 혼란이 일어났고, 그를 잠재우기 위한 정략혼은 수없이 이루어졌다.
다만, 지금은 황태자가 아직 성년이 아닌 상황에서 국정을 주도하고 있어 황후의 입김이 세다는 것이 문제였다. 당장 지금 회의실을 나서는 순간 황후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펄펄 뛸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모두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추후 다시 소집하도록 하죠.”
황태자의 말에 귀족들은 앞다투어 회의실을 퇴장했다. 알렉시스도 마지막으로 나서려던 찰나였다. 페터가 그를 붙잡았다.
“형님. 아까 그 말씀, 무슨 의도로 하신 겁니까?”
“의도라니?”
“제게 앙갚음을 하시는 것이잖습니까!”
알렉시스는 소맷자락을 붙잡은 이복동생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앙갚음이라. 난 진심으로 제국을 생각해서 한 말이다. 그게 가장 평화적인 방법이니까.”
“전 이민족들에게 가해지는 불리한 세법 조항과 차별 대우를 개선하자고 귀족들을 설득할 생각이었습니다. 형님께서 도와주시려는 줄 알았고요! 그런데 정략혼이라니, 그런 건……!”
“내가?”
그는 페터의 말을 자르고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캐슬린이 그 신관 새끼와 도망치는 걸 지원한 널, 내가 도울 거라 생각했다고?”
감쪽같이 사라진 3년 전, 캐슬린의 행방.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던 그날의 실마리는 캐슬린이 몸을 숨겼던 마을에서 찾았다. 마을 사람 중, 금발에 금안을 지닌 사람이 드나드는 걸 봤다는 목격을 확보한 것이다.
여자 옷을 입었다고는 했으나 그런 외모를 가진 이는 제국에 드물었다. 페터가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페터가 뒤에 있다면 그간의 행적을 조작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페터가 이를 악물며 낮게 말했다.
“사적인 감정을 공적인 일에 끌고 들어오지 마십시오.”
“황족인 공작 부인의 불륜을 황태자가 몸소 도운 꼴인데 이게 사적인 감정으로 그칠 일이라고 생각하나?”
“불륜이라고요?”
페터는 기가 찬 듯 말했다.
“캐슬린을 내버려 두고 괴롭게 만든 건 누구도 아닌 형님이었습니다. 여태껏 남편으로서 한 번도 제대로 돌아봐 준 적도 없으면서 이제 와서 그런 소릴 하십니까?”
“선을 넘을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그는 경고했다.
“더는 간섭하려 들지 마. 그랬다간 정략혼 이상의 일을 벌일 수도 있으니.”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형님 생각보다 황태자 자리는 할 수 있는 일이 꽤 많으니까요.”
알렉시스는 웃었다.
“네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겠다면 굳이 말리진 않겠다.”
“뭐라고요?”
“황후 폐하께서 하신 것처럼 날 전장으로 내몰아 죽이고 싶다면 그러란 이야기다. 과연 누가 죽는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그게 무슨.”
“서로의 일엔 관심 끄고 사는 것이 이로울 거다.”
“형님, 형님!”
충격에 빠져 페터가 그를 붙잡았지만, 알렉시스는 그대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