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31)화 (31/110)
  • 31화

    “이 정도면 겨울 요정족도 더 거부감이 없을 거예요. 누가 보아도 당신의 자식이니까.”

    달라진 아이의 얼굴은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다. 어릴 적의 자신을 보는 듯해 오히려 더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니 이만 눈을 붙일까요? 먼저 자요, 켈리.”

    “아니에요. 요제프가 더 고생했으니 먼저 자요. 루치가 중간에 깰지도 모르니까 난 좀 더 있다가 잘게요.”

    신성력을 쓰는 데도 체력이 필요했다. 게다가 아침부터 아이를 돌보고 떠날 채비를 하느라 많이 지쳤을 거다. 캐슬린은 미안한 마음에 극구 사양했다.

    “그럼 잠시 후에 루치가 칭얼대면 날 깨워요. 교대하죠.”

    “그럴게요.”

    결국 말다툼에서 진 요제프가 먼저 눕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캐슬린은 루치를 안은 채로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고 있었다.

    “으응.”

    어느샌가 잠이 깬 루치가 투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막 잠든 요제프가 깰까 싶어 황급히 일어났다.

    “쉬이, 루치. 다시 자자.”

    가만히 어르며 모닥불에서 조금 떨어졌을 때였다. 절벽 가까이서 시원한 바람이 불자 칭얼거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자장, 자장…….”

    고요한 자장가 소리에 아이가 다시 잠들려던 순간이었다.

    “저기다!”

    별안간 인기척이 들리더니 사위가 밝아졌다. 횃불을 든 병사 한 무리가 나타났다.

    “발텐 공작 부인께서 계신다!”

    “마님을 찾았습니다!”

    “전원 집합!”

    그들이 입은 갑옷에는 발텐 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만 머리가 아찔해졌다.

    “으아앙-!”

    미늘이 부딪히며 나는 날카로운 소리에 루치가 잠에서 깨어 울어 댔다.

    “루치, 괜찮아. 쉬이.”

    캐슬린은 루치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러나 그들이 입은 갑옷에 단 표식을 알아본 순간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2기사단…….’

    그가 사람을 보낼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수까지 쓸 줄은 몰랐다.

    호위가 아닌 전투 병력을 보냈다는 건 저를 강제로라도 끌고 올 생각인 걸까.

    “마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공작저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난 가지 않아요.”

    “그쪽은 위험합니다!”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자 기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흘깃 돌아보니 등 뒤가 낭떠러지였다. 떨어지면 그대로 땅으로 추락할 것이다. 발을 헛디딜까 봐 겁이 나 한 발짝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 잘못 봤어요. 난 당신들이 찾는 사람이 아니에요.”

    “마님, 기사단이 주인의 얼굴도 몰라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2기사단 단장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그는 캐슬린과 몇 번 대화를 나눴던 이였다. 지급받을 물품과 관련해 저택에 오간 적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3년 동안 마님을 찾아 헤맸습니다. 이제라도 찾게 되어 다행입니다. 저희와 함께 돌아가시지요.”

    끈질기게 설득하려 드는 기사단장에게 캐슬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돌아가세요. 난 안 갈 거니까.”

    “어떻게 해서든 찾아오라는 각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이미 도망쳐서 찾지 못했다고 하세요. 아님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하든가.”

    “마님!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진짜로 떨어지는 모습 보고 싶어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능력을 써서 도망칠까 생각도 해봤지만, 흥분한 상태에서 섣불리 능력을 드러냈다가는 조절이 힘들 것 같았다. 아이를 안은 상태에서 능력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위험했다.

    캐슬린은 이를 악물고 반 발짝 정도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기사들이 크게 동요했다.

    “마님!”

    “켈리!”

    기사들을 헤치고 요제프가 달려왔다. 캐슬린은 눈물이 핑 돌았다.

    “요제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발텐 공작가에서 사람을 보냈어요. 나를, 우리를 찾으려고.”

    울컥 눈물이 솟았지만 캐슬린은 빠르게 말했다.

    “빠져나가야겠어요. 혹시 저쪽으로 가면 길이 있을까요?”

    뒤에는 절벽이지만 오른쪽에는 숲이었다. 키 큰 나무로 울창하고 낮에도 빛 한 점 들지 않는 숲이라 그쪽으로 갈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붙잡히는 것보다는 어둠을 헤매는 게 나았다.

    “쉽지는 않겠지만 해 보죠.”

    요제프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루치 안고 먼저 가요.”

    “요제프는요?”

    “같이 가면 잡힐 거예요. 내가 저들을 붙들고 있을 테니 먼저 가요. 뒤따라 갈게요.”

    “차라리 같이 가요. 저들은 전투병이라 당신이 오래 끌지 못할 거예요.”

    “이런, 절 너무 약골로 보는 거 아닙니까?”

    요제프는 실없이 웃더니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자, 가요.”

    기사들이 곧바로 대응했다.

    “마님을 모셔라!”

    기사단은 무기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신전에서 수련만 한 신관은 위협이 되지 못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로 겨우 달려, 숲으로 막 들어서기 직전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늦은 순간이었다.

    캐슬린의 뒤를 쫓으려던 기사 한가운데 뛰어들다 밀쳐진 요제프는 절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붙잡아!”

    뒤늦게 기사단장이 소리쳤지만 간발의 차이로 요제프는 그들이 내민 손을 비껴 갔다.

    “요제프!”

    캐슬린은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를 안고 미친 듯이 달려가 보았으나 그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믿음직스럽고 다정했던 친구를 집어삼킨 어둠은 깊었고, 고요했다.

    캐슬린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도망쳤던 그곳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이었다.

    알렉시스 발텐이 있는 그의 집으로.

    * * *

    “주인님,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와.”

    알렉시스는 시간을 확인한 후 결재하던 서류를 멀찍이 밀어 놓았다. 에밀리가 긴장한 모습으로 아이를 안은 채 집무실로 들어서서 보고했다.

    “도련님께서는 식사를 마치셨습니다.”

    아이는 배가 불러 기분이 좋은 듯 방긋방긋 웃어 보였다. 반짝이는 은발에 연푸른 눈이 익숙했다.

    ‘똑같군.’

    그는 신생아를 가까이서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갓 태어난 아이가 부모 중 한쪽을 저렇게 많이 닮을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젖을 먹였나?”

    “유모를 급하게 구해 보았으나 아직…… 카벨 선생 말로는 도련님께서 태어나신 지 6개월이 다 되어 가니 이유식을 먹여도 충분하다고 해서 죽을 드셨습니다.”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면 앞으로 그렇게 진행해.”

    아이를 모친과 계속 붙여 둘 순 없으니 빨리 적응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가까이 오도록.”

    그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채, 에밀리는 더 긴장한 얼굴로 주춤거리며 몇 발짝 다가왔다. 편안하게 안겨 입을 오물거리던 아이가 호기심 어린 연푸른색 눈을 도르륵 굴렸다.

    “우우.”

    알렉시스를 발견한 아이가 쥐고 있던 주먹을 펴고 그의 쪽으로 팔을 뻗었다.

    에밀리가 당황하며 아이를 얼렀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아니, 이리 줘.”

    “예?”

    “아이를 달라고 했다.”

    “아…… 예.”

    얼떨결에 에밀리는 그에게 아이를 안겨 주었다. 알렉시스는 그녀의 얼굴을 그대로 빼닮은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저를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눈빛에는 호기심 외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힘을 주면 그대로 바스러져 버릴 것 같은 작고 따뜻한 생명.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걸 아는데 막상 가까이서 보니 화가 나진 않았다. 희한한 일이었다.

    “아암마.”

    아이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 알렉시스의 얼굴을 매만졌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움찔했으나 피하지는 않았다. 아이는 까르륵거리며 웃더니 그의 옷자락을 쥐고 잡아당겼다. 에밀리가 사색이 되어 급하게 말했다.

    “주, 주인님! 죄송합니다. 도련님께서 한참 호기심이 많을 시기라 그렇습니다. 아직 어린아이라…… 죄송합니다. 제가 나중에 잘 가르치겠습니다.”

    “태어난 지 1년도 안 됐는데 가르친다고 알겠나.”

    에밀리가 놀란 것과 달리 알렉시스는 별생각이 없었다. 갓 태어나 달리는 망아지도 새끼일 때는 천방지축인 법인데 사람은 더하리라는 것 정도는 그도 알았다.

    “가지.”

    그는 아이를 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캐슬린은?”

    “먼저 내려가 계십니다.”

    알렉시스는 아이를 안고 다이닝 룸으로 내려갔다. 에밀리가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예법에 따르면 귀족식 점심 식사는 간단하게 하는 편인데, 공작 부부를 위해 준비된 테이블은 포크 하나도 더 놓을 틈 없이 휘황찬란했다.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제게 와 닿는 연푸른색 눈빛을 느꼈다. 그것이 만족스러워서 알렉시스는 일부러 더 천천히 걸어, 그녀의 맞은편으로 향했다.

    “아이를 돌려주세요.”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캐슬린이 말했다. 공작저 깊은 곳에 아이를 떼어 놓아 만나지 못한 지 열흘째였으니 애가 탈 만도 했다.

    알렉시스는 듣지 못한 척 손짓해서 식사 시작을 알렸다. 시중을 들기 위해 서 있던 시녀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식사해.”

    “아이를 제게 돌려 달라고 말했어요.”

    “식사하라고 말했어.”

    “아이를 뺏긴 어미가 밥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렇게 데려왔잖아.”

    “제가 돌보게 해 달라는 말이에요!”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알렉시스는 아이를 보듬어 안으며 짚어주었다.

    “이 아이를 데리고 다시 도망치겠다고 말한 건 너야. 그런데 내가 순순히 키우라고 돌려줄 것 같나?”

    “말장난하지 마요.”

    “식사도 제대로 안 하면서 아이는 돌볼 체력이 있고?”

    “이 집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제대로 먹고, 제대로 잘 수 있어요.”

    “반항하지 마.”

    알렉시스의 말에 눈치를 보던 시녀가 얼른 캐슬린의 접시에 갖가지 음식을 날라 주었다.

    “끼니를 한 달 이상 제대로 먹는다고 약속하면 저녁 식사 때도 보여 주지.”

    “……진심이에요?”

    “그래. 창문을 깨고 밖으로 뛰어내리려는 짓도 그만둔다면 재울 때까지 곁에 있게 해 주고.”

    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스푼을 쥐었다. 절대 식욕이 돋은 것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최고급 재료로 정성껏 조리한 음식임에도, 누가 내버린 음식을 억지로 먹는 것처럼 내키지 않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래도 열흘 만에 그녀는 비로소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음식보다는 그의 품에 안긴 아들에만 온통 신경이 쏠려 있는 듯했지만 적어도 포크나 나이프로 스스로 찌르려는 짓은 하지 않았다.

    캐슬린이 그렇게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야 알렉시스는 긴장이 풀렸다.

    그녀를 살피느라 정작 제 몫의 식사는 하지 못했지만 배는 고프지 않았다.

    후식으로 차를 내어 온 시녀들이 테이블을 치우고 사라졌다.

    “안아 보게 해 주세요.”

    알렉시스는 말없이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품 안의 아이는 어느새 또 졸고 있었는데, 캐슬린이 막 받아 안으려는 순간 반짝 눈을 떴다.

    “루치!”

    “우우.”

    그녀가 반색하며 아이를 안으려는 순간 아이가 손을 뻗어 알렉시스의 옷깃을 붙잡았다.

    “루치, 엄마한테 와.”

    “아암!”

    아이가 입을 삐쭉거리며 더 강한 손길로 알렉시스의 옷을 잡아당겼다. 억지로 떼어 내면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 캐슬린은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황망한 낯이었다.

    “아이도 아버지가 더 좋은 눈치군.”

    “그럴 리 없어요.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리고 이 아이의 아버지는 공작님이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요.”

    “루치는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 듯하던데.”

    알렉시스는 제게 호의적인 아이의 모습을 캐슬린이 확실히 볼 수 있도록 고쳐 안으며 말했다.

    “그래서 내게 오는 게 낫겠다고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끼워 맞추지 말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해.”

    “뭘 말이죠?”

    “예전에 말했잖아, 날 사랑한다고. 다시 그렇게 해 보란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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