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30)화 (30/110)

30화

“……너.”

“제게 어울리는 복장이죠. 과부가 이런 옷이 아니면 뭘 입겠어요?”

요제프를 남편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마을에서 지낼 때 한집에서 살았고, 친부처럼 루치를 돌봐 준 것도 사실이지만 캐슬린은 그를 마음에 담은 적 없었다.

요제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켈리의 남편임을 자처했으나, 신관으로서의 자신의 본분을 지켰으며 결코 선을 넘은 적 없었다.

그는 그저 신관으로서의 포용력과 동정심으로, 캐슬린이 마을 사람들의 의심을 받지 않도록 선의의 거짓말을 해 줬을 뿐이다.

그래서 캐슬린은 더 죄책감을 느꼈다.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겪은 거야.’

저를 도우려 하지만 않았다면 벌써 고위 신관으로 승급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러니까 보내 주세요.”

그녀는 한때는 남편이자 사랑했던 남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우리는 잘못된 관계였어요. 실수는 그저 없었던 것처럼 묻어 버렸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이렇게 된 거예요. 하지만 이제는 바로잡을 수 있잖아요.”

“…….”

“제 잘못이었어요.”

캐슬린은 담담하게 말했다. 다시 얼굴을 마주할 일 없으리라 생각했는데도 그동안 감정을 정리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울거나 소리치지 않은 채 차분하게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조건을 걸고 결혼했다는 걸 상기했어야 하는데. 말로는 지키겠다고 해 놓고 먼저 선을 넘었어요. 서류상의 남편일 뿐이었는데, 멋대로 사랑해 버렸으면서 똑같은 감정을 되돌려 받길 바랐어요. 이기적이었죠.”

알렉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충격을 받았는지 화가 났는지조차도 이제는 알 수 없었다.

한때는 그 눈이 저를 어떻게 바라볼지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제는 무섭지 않았다.

캐슬린은 더 이상 알렉시스 발텐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까.

이제는 사랑을 쏟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존재가 있었으니까.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늦었지만 사과할게요. 그게 공작님을 불편하게 했을 거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그래서…… 아!”

알렉시스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가 어깨에 걸친 검은색 숄을 벗겨 냈다.

가까이서 본 황금색 눈은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말해.”

그는 지금껏 캐슬린이 본 중 가장 격앙된 어조였다.

“그 새끼를 사랑해?”

“뭐라고요?”

“평민 출신 신관 새끼를 사랑이라도 하느냐 물었어.”

기가 찼다. 기껏해야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절 위해서 목숨까지 건 사람을……!”

“아니면, 고마워서 적선이라도 하고 싶었나? 그래서 그 남자의 애를 낳았어?”

알렉시스의 입꼬리는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발텐 공작 부인께서 성직자의 맹세를 깨뜨리면서까지 보답을 하셨다는 말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트리벨리언 황실과 델라포스 신전은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떤 반응이겠어?”

“사랑했어요.”

캐슬린은 불쑥 내던졌다.

알렉시스는 손에 쥔 검은색 숄을 꽉 쥐었다. 숄은 엉망으로 구겨졌다.

“그 사람을 사랑해서 낳은 거예요. 내 아들은.”

금이 간 유리잔을 억지로 붙인다고 해도 예전처럼 반짝일 수는 없다.

캐슬린은 그래서 알렉시스로부터 완전히 떠날 생각으로 거짓말을 했다.

“이제 제게 남은 건 그 아이뿐이에요. 루치아노는 제가 사랑했던 남자의 흔적이에요.”

아이는 저를 사랑해 주었다. 아직은 말도 하지 못하는 갓난애지만 캐슬린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남은 사랑을 모두 모아 그 아이에게 주고 싶었다.

알렉시스 발텐에게 남은 마지막 마음조차 몽땅 긁어내서.

그러기 위해선 이곳을 최대한 빨리 떠나야 했다.

찌꺼기처럼 남은 이 마음이 다시 형체를 드러내기 전에.

“보내 주세요.”

알렉시스는 대답 대신 숄을 바닥에 떨어뜨리더니 그대로 짓밟았다.

“아니, 그렇게는 못 해.”

“공작님!”

“넌 공작 부인으로서 여기 남을 거야. 네 애가 자랄 곳도 여기고.”

그가 한쪽 팔로 캐슬린의 허리를 휘감아 끌어당기더니 모자 끈을 풀어 벗겨 냈다.

“그 새끼는 이미 죽었으니 도망친 건 없던 일로 해 주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다시는 다른 새끼를 사랑한다느니 하는 소리 입에 담지 마.”

알렉시스는 그녀를 놓아주더니 얼룩덜룩하게 염색된 캐슬린의 머리칼을 그러모아 쥐었다.

“가면무도회는 이제 끝났어. 한적한 시골 마을의 부부 놀이 따위는 집어치우고 다시 발텐 공작 부인으로 살아.”

“그럴 생각 없어요.”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네 아들은 이미 발텐의 이름을 받았거든.”

“뭐, 뭐라고요?”

“루치아노 발텐. 그게 그 애의 이름이야.”

“미쳤어요?”

캐슬린은 알렉시스를 노려보았으나 바위 같은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신 남편이 미친 건 아주 오래전부터야.”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난 내 것을 버리면 버렸지 빼앗겨 본 적은 없거든. 그러니까 발버둥 쳐도 소용없어.”

입술이 떨렸다. 조금이라도 그가 다른 말을 해 줬다면 예전처럼 휩쓸려 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저 자존심이 상한 것뿐이다. 부인으로 맞았던 여자가 자신을 배반했다는 사실에.

“넌 아주 오랜 요양을 다녀왔을 뿐이야. 대외적으로도 그렇게 알릴 거고.”

못을 박듯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정체 모를 열기가 배어 있었다. 캐슬린은 항변했다.

“전 다시 떠날 거예요.”

“그럼 아이는 엄마 없이 자라겠지.”

“당연히 데리고 갈 거예요!”

“아비에게도 양육권은 있어.”

“당신은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가짜 아버지 노릇, 못 할 것도 없지.”

다시는 벗어나지 못할 완벽한 족쇄를 채운 것처럼 알렉시스는 흡족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걸 환영해, 부인.”

주홍빛 물이 빠져 은빛이 드러난 귓가의 머리칼에 입을 맞춘 알렉시스가 속삭이더니 침실을 나섰다.

캐슬린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빼앗긴 아들과 사라진 친구의 얼굴이 떠올라 무력함이 온몸을 감쌌다.

에밀리가 전해 준 말에 의하면 다행히 루치는 저와 떨어져 있는 것 외에 별 탈 없는 것 같지만…….

‘정말 죽은 걸까.’

추락하기 전까지 루치를 걱정하던 그가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요제프…….’

캐슬린은 가슴이 답답해 앞섶을 움켜쥐었다.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간단한 짐만 챙겨 마을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수도와 이어진 길은 위험했기에 그들은 가파른 절벽을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켈리.”

막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를 던져 넣어 불을 살린 요제프가 뭔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말했다.

“카르미네 산맥에 가려면 준비가 더 필요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험한 곳이니까요. 다행히 여비는 모자라지 않을 거예요. 조금씩 모아 둔 돈이 꽤 되었더라고요. 일단 리데플 영지에 도착하면 겨울옷과 식량을 사면 돼요.”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요?”

캐슬린은 어리둥절해졌다. 요제프는 말없이 그녀의 품에서 평화롭게 잠든 아기를 내려다봤다.

“루치가 걱정돼요.”

“그게 무슨 뜻이죠?”

그녀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요제프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다른 의도는 없어요. 다만 켈리는 이런 말 듣고 싶지 않겠지만, 대비는 해야 하니까.”

“오해하지 않을게요. 말해 봐요.”

“……루치는 아버지를 너무 많이 닮았어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리가 새하얘졌다.

아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엿보이는 그의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자신이었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다, 착각이라 믿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요제프는 그동안 한 번도 루치의 친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페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제 미련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요제프는 조심스럽게 설명을 이어 갔다.

“머리와 눈 색은 당신을 닮았지만, 그 외에는 모두 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았어요. 난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도 아니고 루치의 아버지를 잘 아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알겠어요. 눈매부터 코와 입, 눈썹, 이마까지 판박이예요. 그를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알아볼 거예요.”

“…….”

“아이가 자라면서 당신을 더 닮는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겠죠.”

캐슬린은 그의 말을 이해했다.

“카르미네에서 겨울 요정족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리고 설령 만난다 해도 그들이 우릴 받아 주지 않는다면 결국 다른 영지로 떠나야 하는데, 그러다 누군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는 이야기네요.”

황실의 후계가 없는 건 제국 전체의 큰 걱정거리였다. 그러는 중에 변방의 영지에서 발텐 공작과 닮은 아이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찌 될지 눈앞이 캄캄했다.

“신성력으로 루치의 얼굴을 바꿀 수 있어요.”

“요제프는 치유력만 쓸 수 있는 것 아니었어요?”

“맞아요. 사실 치유력을 약간 변형시킨 거라서 편법이나 다름없어요. 신전에서 신성력을 삿되게 썼다는 걸 알면 난리가 나겠지만.”

요제프는 이미 자신은 쫓겨난 거나 다름없으니 괜찮다고 덧붙였다.

“루치를 보는 사람의 눈을 교란할 거예요. 실제의 모습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인식하도록.”

“그게 가능해요?”

“네. 하지만 영구적이지는 않아요. 말했다시피 편법이라. 루치가 커서 거울 속 자신과 남들이 보는 자신이 왜 다른지 의문을 품게 되면 눈속임은 사라질 거예요. 자기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거든요.”

“그럼 루치에게는 해가 가지 않는다는 건가요?”

“장담합니다.”

요제프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캐슬린은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아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결정했다.

“그렇게 해 주세요.”

캐슬린은 아이가 발텐 가나 황실과 상관없이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겪은 고통 따윈 없이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서.

캐슬린은 루치를 요제프에게 안겨 주었다. 요제프는 아이를 가만히 받아 안더니 손바닥을 펴서 얼굴 위로 올렸다.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아이의 얼굴을 감쌌다.

“다 됐어요.”

건네받은 아이의 얼굴은 확연히 바뀌어 있었다. 엄마인 캐슬린만 빼닮은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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