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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29)화 (29/110)

29화

누가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닌데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알렉시스는 문을 부서트릴 기세로 세게 열었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라일런트 자작은 그가 가운에 슬리퍼 차림인 것을 알아차리고 다소 놀란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들어가서 보고드렸어야 하는데 급히 들어온 소식이라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어딨나?”

그는 초조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려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수만의 적군을 눈앞에 두었던 남부 평원 전투에서 선두에 섰을 때도 이런 기분은 느껴 본 적 없었다.

불안정하게 호흡이 흔들리고, 손끝이 바짝 타오르는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낯설었다.

예의 따위야 상관없었다. 겨우 손에 쥔 모래가 신기루처럼 흩어져 내리기 전에 다시 움켜쥐어야 했으니.

“어디 있는지 묻지 않나!”

“지금 호송 중입니다. 말씀처럼 마을 근처의 들판에 계셨습니다. 다행히 크게 다치시지는 않았다는 전갈입니다. 아마 곧 도착하실 겁니다.”

그녀가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겨우 안정되었다. 알렉시스는 알스도프를 불러 에밀리라는 시녀를 밖에서 대기하라 시켰다.

옷을 갈아입으러 침실로 들어가는데 라일런트 자작이 따라 들어오며 말했다.

“각하, 에디스 양이 약을 보냈습니다. 급한 대로 약초꾼들에게 타사르트를 조금 얻어 달였다고 합니다.”

작은 병에 담긴 진녹색 액체는 한눈에 보아도 그리 신선해 보이지는 않았다.

“최상품은 아니지만 복용하지 않는 것보단 나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군.”

알렉시스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따른 답을 내렸다.

“이제 에디스는 공작저 출입을 금지시켜.”

“예?”

“쓸데없는 오해가 있었던 듯하더군. 이번에는 미리 방지하는 편이 낫겠지.”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알렉시스는 소매에 팔을 끼워 넣으며 말했다.

“약은 공작저의 후문에서 직접 받아 오도록 해.”

“하지만 에디스 양은 이곳으로 직접 오길 꺼릴 겁니다. 그러면 다른 약제사를 찾아볼까요?”

“보수는 기존의 두 배를 줘.”

말다툼할 생각에 벌써부터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려던 라일런트 자작이 반색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도 잠시, 자작은 알렉시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각하. 마님을 모셔 오는 데 약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

“마님께서 다른 사람과 함께 계셔서 저항이 있었는데, 대치하던 중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죽었나?”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워낙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곳이고 야생 동물도 많아, 수색하는 데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소매에 달린 황금 단추를 잠그던 손이 멈칫했다.

“그자가 혹시 델라포스의 종인가?”

“예. 이곳에서 잠시 머물렀던 요제프라는 신관입니다.”

“전력을 동원해 찾아.”

전투 기사단은 다소 성정이 거친 이들이나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는 따로 명 없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호위 기사단보다는 기민하고 절제력이 뛰어난 편이라 보낸 것인데 그런 갈등이 있었다는 건, 그자가 정말로 목숨을 내어놓고 반항했다는 뜻이다.

알렉시스는 이유 모를 불길함을 느끼며 단추를 마저 채웠다.

“꼭 살려서 내 앞에 데려다 놓도록.”

제 것이 아닌 것은 탐내지 않는다고 말했던 자였다. 그러나 신을 앞에 두고서 거짓을 말했으니 대가는 치러야 했다.

자갈밭을 구르는 마차 소리가 들렸다. 알렉시스는 창가로 가서 커튼을 걷었다. 희뿌연 구름 사이로 샌 햇빛이 검은 마차를 비추고 있었고, 에밀리가 본관에서 달려나가 마차 문을 여는 것이 보였다.

알렉시스는 바로 침실을 나섰다.

계단 층을 내려가는 발걸음에 주체할 수 없이 속도가 붙었다.

그렇게 이유 모를 기분에 휩싸여 1층에 도달했을 때, 드디어 그는 3년 만에 그의 부인을 다시 발견했다.

막 본관에 들어서는 캐슬린은 주홍색 머리였다. 그가 찾아갔던 작은 빵집에서 보았던 흐린 모습의 그녀가 맞았다.

알렉시스는 홀린 듯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가까이서 마주한 캐슬린은 라일런트 자작의 보고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에는 풀이 붙어 있었고 옷은 더러웠다. 뺨은 어디에 긁혔는지 상처가 나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뺨에 손을 뻗었다.

“다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이건 왜.”

탁-!

캐슬린이 대답 없이 알렉시스의 손을 쳐 냈다.

눈물이 고인 연푸른색 눈이 명백한 분노를 담고 저를 노려보았다. 그녀를 알았던 9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적대적인 눈빛은 태어났을 때부터 익숙하게 받아 왔다. 그러니 캐슬린의 눈빛에 당황할 이유가 없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저리 비켜요.”

“캐슬린.”

“내 이름 부르지 말아요!”

악에 받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큰 소리에 놀란 갓난애가 우는 소리가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그제야 알렉시스는 캐슬린의 한쪽 팔에 아이가 안겨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알렉시스는 굳은 얼굴로 아기를 훑어보았다.

은발에 연푸른색 눈.

캐슬린을 그대로 빼다 박은 얼굴이었다. 가슴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뒤에서 황급히 에밀리가 달려와 아이를 받아 안았다.

“그 작자인가?”

알렉시스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그녀의 입으로는 직접 듣고 싶지 않은, 어쩌면 들을 필요도 없는 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새끼 애냐고 물었어.”

“내 아이한테서 관심 꺼요.”

“못 끄겠는데, 캐슬린 발텐.”

공작 부부의 재회를 지켜보던 사용인들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모두 썰물처럼 사라졌다. 아이를 안고 안절부절못하던 에밀리 역시 조용히 물러났다.

알렉시스는 조소했다.

“사라진 부인이 3년 만에 갓난애와 함께 돌아왔는데, 관심을 끌 수야 있나?”

“난 이제 당신의 부인이 아니에요. 발텐 가의 사람이 아니라고요.”

“잊었나 본데 우린 이혼한 적 없어.”

그 말에 캐슬린의 낯빛이 파랗게 질렸다.

“……이혼 처리가 안 되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죠?”

“이혼서도 써 놓지 않고 야반도주를 했는데 내가 알아서 이혼을 진행해 줄 줄 알았어?”

그녀는 당혹한 듯 보였다. 그래서 기분이 더 저조해졌다. 그럼 지금까지 도망치고 나서 제가 자유의 몸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러니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겠지.

스치듯 보았던 아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다행히 캐슬린을 닮았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요제픈지 뭔지를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저도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

“그 말은 네가 아직 캐슬린 발텐이라는 말이지.”

“이혼서가 필요하다면 지금 쓰겠어요. 원한다면 지금 이혼해 드릴게요.”

“안 돼.”

“보셨잖아요. 내 아이.”

캐슬린이 반항적인 눈빛을 한 채 외쳤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다섯 달 전에 낳았어요. 공작님의 아이가 아니에요.”

“…….”

“그 아이의 아버지는 죽었어요. 당신이…… 당신이 보낸 기사단 때문에 죽었다고요.”

맑은 눈물이 주르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을에서도 이미 들었던 사실이었지만,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자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남자와 낳은 아이.’

헛웃음이 났다.

결혼 생활 동안 아이를 원한 적 없다고 한 건 자신이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던 캐슬린의 말에 안도했던 것도 저였다.

그런데 왜 이 순간만큼은 저 말에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드는지.

“그러니까 이혼해 주세요. 아이의 아버지를 죽인 남자를 남편이라 부르고 싶지 않으니까.”

캐슬린은 얼굴이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간청했다.

“공작님께서도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여자를 계속 부인으로 데리고 계실 순 없잖아요.”

“아니.”

알렉시스는 어지럽게 부유하는 생각을 지웠다. 그리고 고저 없이 말하며 그녀의 뺨을 닦았다.

“넌 계속 내 부인일 거다. 이혼 생각 따윈 집어치워.”

“공작님!”

“공작 부인이 낳은 아이 역시 공작의 아이이니 발텐의 성을 받겠지.”

“안 돼요!”

캐슬린은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저를 붙잡았으나 알렉시스는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충동적으로 말했지만 그리 나쁜 방법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슬린을 붙잡아 두려면 아이는 좋은 협상 조건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계산을 마친 그는 그대로 돌아섰다.

망설임 없는 등을 바라보던 캐슬린은 허망하게 주저앉아 버렸다.

* * *

다시 돌아온 공작저의 생활은 예전과 달랐다.

3년 전에는 캐슬린의 곁에 에밀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최소 다섯 명의 시녀가 붙어 있었다.

“마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한 번이라도 드셔야지요.”

“치워.”

핏기가 없이 파리해진 얼굴이었으나, 음성만은 단호했다. 시녀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점도 이전과는 달랐다. 예전의 시녀들이라면 주방 하녀 출신의 마님이 하루쯤 굶는다 해서 이리 안절부절못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그녀를 따르는 시녀들은 3년 전과는 달리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마님, 오늘도 안 드시면 정말 어떻게 되실지 몰라요…….”

“제발 저희를 봐서라도 수프 한 숟갈이라도 떠 주세요.”

시녀들이 애원했다. 캐슬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럼 내 아이를 데려와.”

“마님, 그 아이는 주인님께서…….”

“아이를 데려오지 않으면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을 거야!”

그녀는 7년이나 이곳에 살았던 만큼 공작저의 구조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아무리 찾아 헤매도 아이는 찾을 수가 없었다. 초조하고 가슴이 타서 목소리가 격앙됐다.

가장 노련해 보이는 시녀가 나섰다.

“마님, 일단 식사를 하시고 기력을 찾으시면 도련님을 보실 수 있어요. 각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러니까…….”

“누가 도련님이지? 내 아들은 공작저의 도련님이 아니야.”

“마, 마님…….”

날을 세운 목소리는 그렇다 치고 마님의 부정은 전해 들은 바와 달랐다. 시녀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바깥 생활이 힘들어서 아직 열이 나는가 보군. 그 아이가 어째서 발텐 도련님이 아니라는 거지?”

그때 열려 있던 침실 문을 밀고 알렉시스가 들어왔다. 캐슬린은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쳐다봤으나 안긴 것은 없었다. 맥이 탁 풀렸다.

“우리 아들은 잘 자고 있어.”

가증스러워서 웃음이 났다. 아이를 진심으로 대해 줄 생각도 없으면서 그렇게 부르다니.

‘진짜 자기 아들이라는 걸 알면 저 남자는 과연 어떻게 변할까.’

그때도 그 아이를 ‘우리 아들’이라고 불러 줄까?

“그러니 식사나 해.”

알렉시스는 억지로 스푼을 쥐여 주며 말했다. 공작이 직접 시중을 들려 하자 시녀들이 모두 조용히 물러났다.

캐슬린은 스푼을 던지듯 놓아 버렸다. 그릇에서 묽은 수프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알렉시스는 눈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일어나 테이블에 놓인 검은 리본이 달린 모자를 쓰고, 검은 숄을 어깨에 둘렀다.

“그 차림은 뭐지?”

모자와 숄의 정체를 알아차린 그가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꿈틀거리는 눈썹이 화를 참고 있는 듯 보였다. 조금은 울화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캐슬린은 그를 향해 웃어 주었다.

“남편이 죽었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차림이라 가져다 달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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