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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28)화 (28/110)

28화

왜 그녀가 혼자일 거라고 믿었을까.

알렉시스는 혈관이 싸늘하게 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카르미네 산맥에서 보았던 캐슬린의 모습이 진짜라고 믿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확실히 해야겠지.’

추측만으로 섣불리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확신할 만한 증거가 뒷받침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요제프라는 사람, 내가 아는 이 같은데.”

알렉시스는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머리 색이 연녹색이오? 눈도 같은 색이고?”

“아. 맞소!”

순박한 인상의 남자는 외지인이 알은척하자 반가운 눈치였다.

반면 알렉시스의 기분은 더욱 저조하게 가라앉았다.

“오래전부터 그를 찾고 있었는데 이곳에 살고 있을 줄은 몰랐군.”

“원래 이 마을 사람은 아니었는데, 아내를 찾아와서 아예 눌러앉았소. 솜씨 좋은 치료사가 우리 마을에 머물러 주니 고마울 따름이지. 부부가 마음씨 곱고 친절하니 우리도 좋고 말이오.”

“부부라.”

요제프와 스스럼없이 이어지는 단어를 되뇌는 그의 입술 끝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그의 아내 이름이 켈리요? 주홍색 머리에 연푸른색 눈인.”

“아시는군! 아주 오래된 지인인가 보오.”

“……오래되었지.”

델라포스 신전을 수색한 이후 꾸준히 사람을 보내 그의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그는 신관으로서 의무를 수행하는 데 열심이었다. 빈민굴을 찾아가고, 전쟁고아들이 머무는 천막을 헤집으며 오랫동안 시간을 보냈다.

2년이 넘도록 행적은 의심할 바 없기에, 몇 달 전에는 방랑 수련을 통해 낮은 이들을 찾아가겠다고 신전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내버려 뒀었다.

그런데 이런 궁벽한 시골에서 작당 모의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소식이 끊겨 걱정했는데 이곳에 있는 줄은 몰랐소. 당장 만나 보고 싶군.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시오?”

“글쎄. 아예 살러 왔으니 잠깐 어디 나간 게 아닐까 싶은데? 아이까지 있으니 기다리면 곧 올 거요.”

“아이?”

알렉시스는 순간적으로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남자는 싱글벙글하며 친절하게 다시금 짚어 주었다.

“몰랐소? 아아, 소식이 끊겼댔지. 둘 사이에 건강한 사내아이가 하나 태어났소. 부모를 반씩 빼다 박아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언제 태어났소? 그 아이는.”

“한 다섯 달 됐나?”

남자의 말에서 얻은 확신으로 가슴 끝에서 불길이 치밀었다.

발텐의 이름을 가진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 제 아이도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게다가…….

-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니까요.

황후가 보낸 첩자일 수도 있다 여기면서도 기꺼이 그 손을 잡았던 건, 거짓이라고는 한 점도 없이 맑았던 눈빛에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전갈의 독을 마시기 전. 제가 온전한 사람이었던 여섯 살 어린 소년이었을 때 제게 손을 내밀었던 푸른 눈의 여자.

그래서 초식동물처럼 떨면서도 결심한 듯 고백하던 그녀를 잠깐이나마 믿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캐슬린이 가진 은발과 연청색 눈은 늘 색채가 옅어 희미한 인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날 밤, 제게 고백했을 때 그녀는 누구보다 강렬한 색채로 다가왔다. 그래서 알렉시스는 순간적으로 인 욕망에 지켜 오던 원칙을 깨고 그녀를 안았던 것이다.

그녀가 저를 이리 기만했다는 걸 알았더라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명백한 실책이었다.

“어, 그냥 가는 거요?”

알렉시스는 빠른 걸음으로 빵집을 벗어나 마을 어귀로 향했다.

뒤에서 남자가 어리둥절해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는 무시했다.

알렉시스는 다소 거친 손길로 말을 찾아냈다. 다행히 마을 사람들이 돌봐 주었는지 말은 멀쩡했다.

그는 단숨에 말에 올라 박차를 가했다. 귀환이 시급했다.

‘하루. 혹은 이틀.’

흔적도 없었던 3년 전과 명백한 단서를 잡은 지금은 달랐다.

3년 만에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소년병에서 사령관까지 뛰어오른 알렉시스에게 추격이란 그토록 쉬운 일이었다.

‘어리석었군.’

그때 이후로 제게 손을 내민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또다시 있을 거라고 믿지 말았어야 했다.

알렉시스는 고삐를 더 밭게 잡고 말을 달렸다. 붉게 물드는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졌다.

* * *

그가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그러나 주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저택은 불야성이었다.

“각하!”

알렉시스가 말에서 내리자마자 라일런트 자작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달려왔다.

“대체 어디 계시다가 이제 오셨습니까?”

“내 행선지는 자작이 잘 알 텐데.”

“설마 지금까지 그 마을에 계셨단 말입니까?”

본관에 들어서자 모여 있던 사용인들의 얼굴에 안도의 낯빛이 서렸다. 그들을 돌려보내는 알스도프는 그 며칠 사이에 더 늙은 얼굴이었다.

라일런트 자작이 말했다.

“연락도 없이 자리를 오래 비우셔서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새벽까지 각하께서 돌아오지 않으시면 기사단을 파견하려 했는데 다행입니다. 올라가서 쉬시지요. 기사단은 해산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대로 둬.”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층계를 오르는 알렉시스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라일런트 자작이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대기 중인 것은 2기사단입니다. 각하께서 돌아오셨으니 이제는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 마을에 보낼 예정이다.”

“민간 마을에 전투병을요?”

라일런트 자작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민족 때문입니까?”

알렉시스는 대답 없이 집무실로 들어가 거추장스러운 망토를 뜯어내다시피 던졌다. 말 안장에 며칠 동안 아무렇게나 걸쳐 두었더니 주홍색 진흙이 잔뜩 묻어 더러웠다.

그 순간 그의 눈길을 잡아끈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 흙의 색이었다.

“아니다.”

알렉시스는 망토 끝에 말라붙은 진흙을 그러쥐었다. 손안에서 바스러지는 주홍빛 흙더미가 어쩐지 만족스러웠다.

“그 마을에 있었다, 그 여자.”

“여자라니요?”

“캐슬린 발텐.”

“예?!”

라일런트 자작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알렉시스는 빠르게 정리해 말했다.

“2기사단을 당장 보내서 마을은 물론이고 주변의 야산과 들판까지 샅샅이 뒤져라.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다시 마을로 돌아왔을 수도 있어.”

“마님을 만나신 게 아닙니까? 아니, 각하를 보고 다시 도망치신 겁니까? 그럼 그 근방에는 이제 없을 텐데 차라리 주변 마을을 수색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아니, 무조건 그 근처에 있을 거다.”

알렉시스는 잘라 말했다.

“아이를 데리고 멀리 가진 못했을 테니.”

“아이요?”

“델라포스의 종도 함께다.”

다음 말은 생략되었으나 설명은 충분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라일런트 자작이 서둘러 집무실을 나가고 얼마 안 있어 알스도프가 들어왔다.

“각하, 따뜻한 물을 준비했습니다. 욕실로 가시지요.”

그의 곁을 오래 지킨 노집사는 스치듯 본 알렉시스의 얼굴에도 단번에 기분을 간파하는 데 능숙했다. 알렉시스는 거절하지 않고 욕실로 향했다.

끈질기게 달라붙은 주홍색 진흙을 씻어 내던 찰나였다.

알렉시스는 문득 무엇인가를 깨닫고 시중을 들기 위해 서 있는 알스도프를 향해 물었다.

“언제부터 라일락 향의 세정제를 뒀지?”

“5일마다 새로운 제품으로 교체하고 있습니다. 아마 어제쯤 바꾸었을 겁니다.”

“그전에는 라벤더였던 것 같은데.”

“아…… 예. 그랬던 것도 같습니다.”

욕실 관리는 시녀들 담당이었다. 알스도프는 난처한 얼굴이었다.

알렉시스는 더 말하지 않고 옷을 벗었다.

세정제의 향 따위에 그다지 신경 쓰는 편은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라일락이나 라벤더는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황후는 늘 그 향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침실이나 욕실에 이런 향을 들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였을까.

이상하게 그런 사소하고 쓸데없는 일 따위에 신경이 쓰였다. 거슬리고 불쾌한 기분이었다.

그는 억지로 그 사실을 무시하려 애쓰며 몸을 씻었다. 그러나 지워 버릴 수 없는 얼룩처럼 살갗엔 라일락 향이 남았다.

그래서인지 가운을 걸치고 욕실을 벗어나서도 신경 끝을 건드리는 의문은 계속됐다.

“소모품 관리에 대한 장부와 담당자 명단을 가져올까요, 각하?”

주인의 기분이 다른 데 쏠려 있다는 것을 눈치챈 알스도프가 물었다.

“그러도록.”

알렉시스는 의문이 오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의문을 남겨 두었다가 불쾌한 결말을 맞은 지금, 확인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은 확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스도프는 여러 권의 장부와 함께 시녀장을 데려왔다.

“소모품 관련 지출 내역과 납품 내역을 정리한 장부입니다. 식량에서부터 사소한 소모품, 의복, 그리고 사용인 고용에 대한 것까지 각자 정리되어 있습니다. 살펴보시고 하문해 주십시오.”

그가 내민 여러 장부 중, 두껍고 낡은 대부분의 장부와 달리 비교적 새것인 장부가 보였다. 알렉시스는 그것을 먼저 펼쳐 보였다.

기부금이라는 명목으로 제출된 자금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발텐의 이름을 생각해 보면 큰 금액은 아니었으나 상당수 기부처들이 모두 작은 곳들이었기에 받는 입장에서는 무척 반가워했을 법했다.

“이것들은 뭐지?”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자신이 낸 건 아니었다.

알스도프가 주저하며 말했다.

“모두 마님께서 처리하신 내역들입니다.”

“캐슬린이?”

“예. 결혼하신 직후부터 각하께서 내어 주신 자금에서 일부를 떼어 꾸준히 기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궁벽한 시골부터였다. 하잘것없는 지방 영지 농민의 무너진 집을 고쳐 줬다. 지진이 일어난 직후였다.

조세를 감면하고 식량은 보내 줬지만 거처까지는 신경 쓰지는 않았던 기억이 났다.

알렉시스는 계속해서 종잇장을 넘겼다.

국지전이 벌어지는 남부에서 전쟁의 피해를 입은 백성과, 지진으로 부모를 잃고 수도로 몰려드는 고아를 돕기도 했다.

그리고 사라지기 직전에는 델라포스의 신전에 적지 않은 돈을 보냈다.

마지막 장을 무표정한 낯으로 한참 동안 보던 그가 기부금 장부를 덮고 다른 장부를 펼쳤다. 소모품 내역이었다.

4년 전부터 3년 전.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알렉시스의 의복과 사치품은 일정한 간격으로 구매되고 있었다.

침실과 욕실의 물건들은 일정한 종류지만 나름대로 규칙을 지켜 갖춰지고 있었다.

그는 시녀장을 향해 물었다.

“이걸 구매한 자가 누구지?”

시녀장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얼굴이었으나 곧바로 능숙하게 그 기색을 감췄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님이십니다.”

알렉시스의 가슴 끝에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그러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자세히 말해 보도록.”

“예, 주인님. 모두 마님께서 살펴본 후 결정하셨습니다. 주인님의 의복은 계절마다 손수 의상실에 의뢰해 제작하셨고, 조향사를 불러서 침실을 관리하셨어요. 욕실의 세정제 역시 네스트로덴 상단의 최고급품으로 구매하라 하셨습니다.”

“향에 대해 따로 이른 말은?”

“향이라고 하시면…… 아, 라일락과 라벤더는 구매하지 말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시녀장은 라일락과 라벤더 향이 가장 최고급품인데 매번 그렇게 강조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보내.”

알렉시스가 짧게 명령했다. 알스도프는 즉시 시녀장을 데리고 사라졌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앞섶을 움켜쥐었다. 가운은 목을 죄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밤이 깊고 새벽이 왔지만 알렉시스는 잠들 수 없었다. 3년 전 끝났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처음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제가 라일락과 라벤더를 꺼린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는지는 모를 노릇이지만 확실했다. 그렇지 않다면 유모인 듀록이 살아 있을 때, 그녀의 눈을 거스르면서까지 다른 향을 고집하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평소엔 얌전히 공작저 안에서만 머물며 황궁만 오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제가 놓친 것들을 꿰뚫고 몰래 자신의 것을 내어서 돕고 있었다.

“하…….”

우습게도 그의 추측은 모두 빗나갔다. 캐슬린 발텐이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생각했던 나날은 모두 헛되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제게 충성했던 것이다.

‘계약 이행이었을까, 아니면.’

새벽빛이 지고 막 아침 해가 떴다.

‘……충성이 아니다.’

알렉시스는 그제야 캐슬린이 평범한 부부처럼 대해 달라던 애원을 떠올렸고, 깨달았다.

그의 부인이 말하던 사랑은 진짜였다는 사실을.

“각하!”

밖에서 어수선한 소리와 함께 라일런트 자작의 외침이 들렸다.

“각하, 마님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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