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27)화 (27/110)

27화

“당신이 빵집 주인인가?”

묻기만 했을 뿐인데 여자는 들고 있던 것을 떨어뜨렸다. 물건이 바닥에 떨어져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을 찌르는 칼날 같은 통증이 온몸으로 퍼졌다.

알렉시스는 지탱할 것을 찾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바 너머에 선 여자가 소스라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알렉시스는 온몸을 잠식한 통증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 * *

사과 파이와 우유가 바닥에 떨어져 엉망이 되었다.

빨리 치워야 하는데, 캐슬린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알렉시스 발텐, 그의 눈빛에 온몸이 굳어 버린 것만 같았다.

겁에 질려 한 발짝 더 뒤로 물러섰던 캐슬린은 곧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정면으로 마주쳤는데도 그는 저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한다는 소리가, 크림 만드는 사람을 찾는다니?

3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머리를 염색하기까지 했지만 캐슬린의 얼굴은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기억 상실증에 걸리지 않는 이상 사람을, 그것도 스쳐 지나간 이가 아니라 적어도 1년이란 세월을 부부로 보냈던 이라면 몰라볼 수가 없는데도 알렉시스는 저를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고 있었다.

빵집에 와서 크림 제조법을 묻는 건 이상하지 않았지만, 도망친 부인을 3년 만에 마주하고서 처음 꺼내는 말이 크림 얘기라는 건 정상처럼 들리지 않았다.

‘술이라도 마신 건가?’

캐슬린이 아는 알렉시스 발텐은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3년이라는 시간은 꽤 길었으니까 취향이 바뀌었을 수도 있었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잘됐다. 어차피 그는 제가 공작저의 하녀 시절 머리 색이 어땠는지도 전혀 기억하지 못할 테고, 목소리를 들어도 알아차리지 못할 테니.

“아뇨. 주인은 따로 있……!”

그러나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알렉시스가 한 발짝을 내딛기 무섭게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투박하고 무서운 소리와 함께 나무 바닥에 몸이 무너지더니 정적이 흘렀다.

캐슬린은 숨조차 죽인 채 꼼짝하지 못했다. 그렇게 얼어 있을 때였다.

멀리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뒷문이 열렸다.

“켈리, 장사는 잘돼요? 브라우닝 씨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못 온대요. 그래서 사과 파이는 제가 더 먹으려고…… 어?”

“요제프, 루치를 이리 줘요.”

캐슬린은 거의 달리다시피 하여 요제프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안았다. 엄마의 품을 느끼자 루치의 울음은 잦아들었지만, 위험 신호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루치를 그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잠깐만요, 켈리. 저건 뭐예요? 설마 사람이에요?”

그러나 요제프는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발견하고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캐슬린은 미처 그를 붙잡지 못했다.

“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요제프가 얼어붙었다. 그 순간 알렉시스가 금방이라도 다시 눈을 뜰까 봐 캐슬린은 졸아붙은 숨을 몰아쉬며 설명했다.

“나한테 말을 걸다가 갑자기 저렇게 쓰러졌어요. 그런데 날 알아보지 못하는 걸 보니 아마 술에 취한 것 같아요.”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다고요?”

“네. 다시 정신을 차리기 전에 여기서 나가요.”

요제프는 즉시 그녀의 말을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쓰러지려는 캐슬린을 부축해서 집으로 데려갔다.

“켈리, 괜찮아요?”

한참 동안 루치를 안은 채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는 그녀를 향해 요제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따뜻한 물이라도 좀 마셔요.”

“어떻게 알고 왔을까요?”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눈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러다 맥없이 쓰러져 버리던 모습도.

“제게 빵집 주인이냐고, 크림 만드는 사람을 찾는다고 했어요.”

“이상하네요. 정말 취하기라도 한 걸까요? 하지만 그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면 꽤 많이 마셨을 텐데, 술 냄새는 나지 않던걸요.”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그일까 싶어 캐슬린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그러자 요제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계세요.”

신중하게 창문 밖으로 방문객을 살핀 그가 속삭였다.

“브라우닝 씨예요.”

그의 말처럼 브라우닝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제프, 집에 있어요?”

요제프는 캐슬린에게 눈으로 동의를 구했다. 캐슬린은 루치를 좀 더 보듬어 안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깥에서 안쪽의 캐슬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문을 살짝 열었다.

“네, 브라우닝 씨. 무슨 일이세요? 아까 급한 일이 생기셨다는 건 어떻게 되셨어요?”

“아, 닭들이 탈출했는데 옆집 앤더슨 씨네 양치기 개가 다시 데려와서 찾았소. 닭장은 잠갔으니까 다신 탈출하지 못할 거요.”

“잘됐네요. 한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아! 그래서 방금 다시 빵집에 갔는데, 누가 쓰러져 있길래 말이오.”

“아하. 웬 취객이 집을 잘못 들었나 봅니다.”

“글쎄 나도 그런가 싶어서 가까이 가서 건드리니 온몸에 열이 펄펄 끓더라고. 취객이 아닌 것 같소. 요제프를 찾아온 환자일 수도 있지 않겠소?”

“예?”

요제프는 간단한 의술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끔 마을 사람들의 타박상이나 감기, 두통 정도를 치료해 주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치료사라고 알고 있었다.

“외부인 같긴 한데 상태가 좀 심각해 보여서. 내려와서 한번 봐주는 게 낫겠는데.”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요제프는 일단 대충 둘러대고 그를 돌려보냈다.

캐슬린은 대화를 듣고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요제프는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켈리, 어떻게 할까요?”

“…….”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이 드러나 보였다. 마치 그녀가 발텐 공작의 목숨을 거두라 할 것을 걱정하는 듯이.

캐슬린은 몇 번이고 입을 떼려 노력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열만 떨어뜨려요. 정신을 들게 하지는 말고요.”

“알겠습니다.”

요제프의 얼굴에 잠시 안도의 빛이 스쳤다.

“곧 다시 오겠습니다.”

그가 가게를 향해 언덕을 내려갔다. 캐슬린은 어느새 다시 잠든 루치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알렉시스 발텐이 신열에 들떠 제정신이 아니던 밤.

그날, 캐슬린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실수를 저질렀다. 품에 안은 아이는 들여다보기만 해도 새삼 눈물이 날 만큼 소중한 존재였지만, 아이의 아버지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알렉시스 발텐은 비눗방울 같은 사람이었다.

너무도 아름답고 황홀해서, 손을 내밀면 닿는 순간 이내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손에 쥘 수도 없어 하염없이 바라만 보면 저를 스쳐 지나가 떠난다.

캐슬린은 헛된 희망으로 가슴 졸이며 발버둥 치는 시간을 거쳐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 거야.’

굳게 마음먹었다. 그녀는 이제 아이의 어머니로만 살아가고 싶었다.

잠시 후 요제프가 돌아왔다.

“열을 내려 주고 왔어요. 아직 정신은 차리지 못했습니다. 켈리는 괜찮나요?”

“네. 잠깐만 루치를 맡아 주세요.”

루치를 그에게 안긴 후, 캐슬린은 낡은 가방 하나를 꺼내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꼭 필요한 것만 추려 내는 손길이 다급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떠날 생각이에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이 마을을 떠날 거예요. 그가 이곳을 알게 된 이상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잖아요.”

“이렇게 갑자기요? 어디로 갈 건데요?”

“그 사람이 저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요. 지금까지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이 은혜 잊지 않고 나중에 다시 만나면 제가 꼭 갚을게요.”

요제프가 다가와 한 팔로 그녀의 팔을 잡았다. 다소 성급한 손길이었다.

“함께 갈게요.”

“요제프.”

“어디든지 당신이 가겠다고 하는 곳이면 함께 가겠습니다.”

늘 부드럽게 휘어지던 연두색 눈이 전과 달리 단호한 빛을 담고 있었다. 웃음기는 조금도 없는 채로.

* * *

알렉시스가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투박한 나무 천장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멍한 머리로 한참 누워 있으니 점차 기억이 났다.

이름도 없는 빵집의 주인을 찾으러 왔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었다. 딱딱하기는 하지만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보니 누군가 저를 거둔 모양이었다.

‘빵집 주인인가.’

알렉시스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이상하게도 몸이 멀쩡했다.

몸속에 남은 독은 이렇게 가끔 날뛸 때가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조용히 스며든 독은 예상치 못할 때 숨통을 끊으려는 듯 폭주했고, 그때마다 알렉시스는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면 극심한 통증이 이어졌는데, 지금은 평소와 달랐다.

‘누가 치료라도 한 건가?’

단순히 약을 먹여 열을 낮추는 것으로는 상태가 쉽게 호전되지 않는다. 시골 마을인데 대단한 치료사가 사는 모양이었다.

“아, 깼소?”

머리에 밀짚을 가득 붙인 중년 남자가 들어섰다.

“빵집에 그렇게 쓰러져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오.”

“날 발견한 게 그대요?”

“그렇소만.”

순박한 인상의 남자는 알렉시스가 공작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굳이 지적할 생각은 없어 그는 일어나며 품 안의 은화를 건넸다.

“치료해 준 대가요. 받으시오.”

“어, 난 발견만 했을 뿐이지 치료해 준 자는 따로 있소.”

“그자와 나누어 가지든 하시오.”

“어휴, 돈 받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남자는 굳이 거절은 하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소지품이 사라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방을 나가려다가 문득 멈춰 섰다.

-켈리, ……돼요?

쓰러지고 나서 막 정신을 잃던 순간 귓가에 웅웅거리며 들렸던 이름이 떠올랐다.

그리고 흐릿한 시야에 보이던 주홍색 머리칼을 높이 묶은 여자. 연하늘색 눈동자…….

사라진 캐슬린 발텐이 떠올라서 갑자기 숨이 답답해졌다.

그녀는 은발이었지만 주방 하녀였을 시절에는 주홍색 머리였다.

늘 홀로인 데다가 뭐가 그리도 바쁜지 고개를 숙이고 바쁘게 걸어 다녀서 말을 섞은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흔하디흔한 머리 색임에도 지나칠 때 몇 번 돌아본 기억은 났다.

‘여기 있을 리는 없지.’

그러나 외모가 닮았다고 해서 그녀라고 확신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저와 결혼한 이후에는 머리를 염색하지 않았으니까.

도망친 이후 눈에 띄는 은발을 가리려 했다고 해도, 굳이 제가 기억하고 있는 주홍색을 골랐을 리 없었다.

“빵집 주인을 만나 보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되오?”

“글쎄, 지금 있으려나? 일단 따라오시오.”

남자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일단 길을 안내했다. 그러나 빵집에 도착해 보니, 아무도 없었다.

“아니, 어딜 간 거지? 아까 집에도 없던데.”

“없다면 됐소.”

확실하지도 않은 방법에 헛수고할 필요는 없었다. 알렉시스는 다시 돌아갈 생각으로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거참, 요제프 이 사람.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이라도 하고 가지.”

뒤에서 들려온 혼잣말에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멈춰 섰다.

“방금 뭐라고 했소?”

제 귀를 의심하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잘 아는 이름이었다.

깨진 조각이 하나둘씩 붙더니 이내 하나로 맞추어졌다.

온전한 진실 한 조각을 추론해 낸 순간, 알렉시스를 덮친 감정은 우습게도 배신감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