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발텐 공. 다시 말해 보게.”
황후는 실핏줄이 터져 벌건 눈으로 알렉시스를 노려보았다. 시녀장은 심상찮은 낌새를 알아차리고 재빨리 시녀들을 물리기 시작했다.
“들으신 대로입니다.”
알렉시스는 무감하게 말했다.
“그러고도 자네가 황족이라 할 것인가!”
황후의 노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기막히게도 막 시녀들이 빠져나가고 황후궁 응접실의 문이 닫힌 바로 뒤였다.
“실종된 지 3년이나 된 여자를 그대로 공작 부인 자리에 앉혀 두겠다고? 정신이 나갔는가?”
“못 할 건 또 뭡니까?”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황명이라 해도 따를 생각은 없었다.
알렉시스는 다른 사람들이 제게 뭐라 하든 상관없었다. 발텐 공작 부인 자리에 앉을 사람은 처음부터 캐슬린 윈스턴이 유일했다.
실체 없이 이름뿐인 공작 부인이라도 상관없었다. 다른 이는 그 자리에 맞지 않았다.
그는 그 허울을 움켜쥐고 3년의 세월을 버텼다.
그녀는 언제고 돌아올 것이니 공작 부인 자리는 본래의 주인을 위해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찾지도 않는 건지, 아니면 못 하는 척하는 건지! 정말로 찾은 적은 있나? 자네 휘하의 기사단이 진짜로 수색에 나선 적은 있는 거냔 말이야!”
누가 보면 캐슬린 발텐이 황후의 딸인 줄 알 것이다.
‘참으로 애절하기도 하지.’
멀리서 보면 어진 황후라 하겠으나 가까이서 보면 그저 불안에 미친 위선자일 뿐인데.
“당장 찾게!”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찾아도 없는 사람을 제가 무슨 수로 데려옵니까.”
“그럼 이혼하고 다른 가문의 영애와 결혼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알렉시스는 웃었다.
젊은 시절의 황후는 미처 몰랐을 것이다. 죽여 없애지 못해 안달이었던 사생아 따위의 목숨과 그의 후계에 저렇게 목을 매게 될 줄은.
“그걸 몰라서 묻나? 당연히 후사를 이어야 하니까 하는 말 아닌가!”
“그럴 생각 없습니다.”
“……뭐?”
“제 피를 이은 아이 따위 필요 없단 말입니다. 있어 봤자 황후께서 이용하실 체스 말로 전락할 게 뻔한데, 제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제국이 무너질 걸 알면서도 그딴 소리를 해!”
황후는 허겁지겁 뛰어와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예순이 다 된 여자의 손아귀 힘 따위야 손쉽게 내칠 수 있었으나 알렉시스는 그냥 두었다. 좌절과 공포에 점철된 눈을 보는 기분은 그럭저럭 괜찮았으니까.
“네놈이 이제 대거리를 하려 들어?”
황후가 목소리를 높여 웃다가 뚝 멈추었다. 그의 멱살을 쥔 아귀힘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 천한 쓰레기 같은 놈. 구더기 같은 새끼. 내 아들의 자리를 뺏어 놓고도 뻔뻔하게 그딴 소리를 지껄여?”
“그렇게 귀하신 아드님을 결혼시켜 후사를 보면 될 것을. 왜 이리 수고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어차피 욕 따위야 어릴 적 황궁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귀에 못 박히게 들었으니 별 감흥도 없었다. 그것보다도 그는 황후가 왜 저러는지 요사이 궁금해진 참이었다.
황후는 친아들의 결혼에는 한 발짝 물러나 있으면서, 수양아들의 후계에만 미친 듯이 집착했다.
저를 압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사벨라 윈스턴을 황태자비 후보로 올리면서까지 캐슬린의 불안을 부채질하려 애썼다.
발텐 공작의 자식보다야 황태자의 자식이 더 황실의 힘을 가질 텐데 의아했다.
그리고.
‘아직 모르는 것 같군.’
캐슬린은 약제사 이야기를 황후에게 하지 않은 듯 보였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추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알렉시스는 제 발로 적의 소굴에 들어가는 것을 택했다. 황후의 심기를 거스르며 은근슬쩍 건드렸다. 그러나 황후는 오히려 저보다 캐슬린의 종적에 대해 더욱 아는 것이 없는 듯 보였다.
혼란과 의문이 뒤섞여 마음이 복잡해졌다.
“은혜를 모르는 천한 핏줄 주제에 알고 싶은 것도 많구나.”
황후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네겐 그럴 여유가 없다. 네 명이 얼마 남지 않은 걸 모르진 않겠지.”
“…….”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시기 전에 후사를 데려와. 트리벨리언의 땅이 갈라져 불바다가 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알렉시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후가 손을 치켜들었다.
짝!
뺨에 날아든 손은 제법 힘이 있었으나 전장을 누빈 장수를 흔들 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조금도 꿈쩍 않는 알렉시스 덕에 제풀에 밀려난 황후가 분노로 몸을 떨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 보아라!”
“어차피 죽을 목숨, 혼자 가는 건 불공평하지요. 다 같이 죽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 돼먹지 못한……!”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려던 황후가 순간 뒷목을 붙잡고 비틀거렸다. 알렉시스는 그녀를 외면하고 그대로 응접실을 나왔다.
“헉, 황후 폐하!”
거칠게 열린 문 사이로 불안하게 고개를 들이민 시녀장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다급하게 달려오던 다른 시녀들이 저를 발견하고 겁먹은 낯으로 비켜섰다.
신경질적인 고함과 함께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시스는 빠른 걸음으로 황후궁을 벗어났다. 황후가 후려친 뺨에 약간 열기가 올랐다.
“각하, 지방 영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취합했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일런트 자작이 따라붙다가 흠칫하며 놀랐다.
“각하, 뺨이…….”
“보고나 해.”
그는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말을 끊었다. 라일런트 자작은 사방을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예상하셨던 대로입니다.”
지진이 더 잦아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황제 폐하께서 더 상태가 안 좋아지셨다더니 역시 그렇군.”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트리벨리언이…….”
“나가서 이야기하지.”
알렉시스가 말을 잘랐다. 다급한 마음에 제국의 비밀을 입에 담아 버릴 뻔했던 라일런트 자작이 실책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각하.”
그는 신중하게 할 말을 골랐다가 마차가 황궁을 벗어나자마자 빠르게 보고했다.
“변방에서 시작되었던 지진이 산발적으로 그 범위를 넓혀 가며 수도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황궁의를 매수해서 알아본 결과 폐하께서는 명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하다 하니, 아무래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황실의 다른 방계는 정말 없나?”
“예. 조사 결과 애석하게도 여성 황족은 몇 분 계시지만, 남성 황족은 각하께서 유일하십니다.”
실소가 터져 나왔다.
“결국 트리벨리언은 내가 죽으면 정말로 무너지고 말 거란 소린가?”
“남성 황손이 둘은 있어야 지반이 안정적이니까요. 황제 폐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 남성 황손이 한 명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럴 겁니다.”
라일런트 자작은 어릴 적 공작령에서 겪었던 지진을 떠올리자 오싹함이 등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설마 이 사실을 모르시는 걸까요? 아신다면 이리 손 놓고 계시지는 않을 텐데요.”
“그게 의문이긴 하지. 황후가 내 후사에 미쳐 있는 걸 보면 저도 모르지 않을 것 같은데, 파혼을 하다니.”
이복동생의 속내야 알 길이 없었다. 페터가 태어났을 때 알렉시스는 다시 잡혀 들어간 황궁 감옥에서 빛 한 줌도 보지 못한 채 간수들이 던져 주는 쓰레기를 먹고 있었다. 그 아이가 귀한 비단옷을 입고 동생이라며 제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알렉시스는 남부 이민족의 침입을 저지하려 차출된 소년병이었다.
전장에서 공을 세우기 전까지 그는 페터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도 없는 신분이었다. 늘 웃는 낯인 황태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자랐는지는 알 일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알렉시스는 그러는 편이 저에게도, 페터에게도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사감이 있지는 않았지만, 피가 섞였다 하여 모두 가족일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어쩌면 황후가 한 짓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내가 백 년은 살 거라 여기는지도 모르지.”
알렉시스의 자조에 라일런트 자작이 표정을 바꾸며 바짝 다가앉았다.
“에디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얼음꽃처럼 해독의 효과는 없지만, 현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효과를 지닌 약을 찾았다고요.”
“계속해.”
알렉시스는 점점 더 뻑뻑해지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잠시 눈앞이 어질했다. 그러더니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독이 다시 도는 모양이군.’
3년간은 얼음꽃으로 해독을 진행했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다. 얼음꽃 군락지는 다시 찾을 수 없었고, 알렉시스의 몸에 남은 소량의 독은 주체할 수 없이 다시 피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타사르트라는 약초입니다. 효과는 어느 정도 기대해 볼 만한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약초 역시 냉기를 먹고 사는 만큼 운반과 보관이 어렵다고 합니다. 다른 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방안은?”
라일런트 자작은 준비한 보고서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첫 줄을 읽자마자 알렉시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장난하나?”
하지만 라일런트 자작은 막무가내였다.
“아뇨, 전 진지합니다.”
“약초 보관법을 조사하랬더니 빵집은 왜 나오지?”
“거기 맨 마지막 장을 보시면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오솔레라는 작은 마을에 여름에도 크림이 상하지 않게 파이나 케이크를 만들어 내는 가게가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겨울밤에 만든 것처럼 차갑기까지 하답니다. 단순히 얼음을 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자를 포섭하는 게 현재로선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허무맹랑한 소리 할 거면 집어치워.”
“다시 말하지만 전 진지하고, 각하께 진심입니다.”
라일런트 자작은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이미 제가 한번 다녀왔습니다. 아쉽게도 빵집이 문을 자주 여는 건 아니라서 그날 주인을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오늘은 열 겁니다.”
“오늘은 무레닌 성의 보수 공사 날이라 하지 않았나?”
“아.”
그의 얼굴에 낭패가 어렸다. 부관의 당황한 모습에 알렉시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됐다. 내가 다녀오지.”
“죄송합니다. 업무에 착오가 있었습니다. 각하의 상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다 보니 일정을 착각했습니다.”
“당장 죽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어. 무레닌 성은 감독이 필요하니 그곳에 가는 게 낫겠군. 어차피 황후도 오늘은 제정신이 아닐 테니 내가 가는 편이 처리가 더 쉽겠지.”
알렉시스에게 패악을 부리고 나면 황후는 적어도 하루 정도는 화에 못 이겨 앓아누웠다. 그 후에 발텐 공작저에 붙인 감시의 눈을 불러들이곤 했는데, 오늘도 그럴 터였다.
알렉시스는 수도 외곽에서 마차에서 내렸다. 라일런트 자작은 제가 말을 타고 가겠다고 우겼으나 거절했다.
“영주도 없는 마을에 들이닥치면서 공작가 문양이 찍힌 마차를 타고 가면 어떻게 되겠나.”
“송구합니다. 그러면 저는 무레닌으로 갔다가 끝나는 대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는 걱정스러운 기색인 부관을 뒤로하고 훌쩍 말에 올랐다. 다행히 오솔레 마을은 지도를 보니 수도에서 그리 멀진 않았다.
트리벨리언에서 제일 신선한 크림을 만든다는 이름 없는 빵집에 도착하기까지는 반나절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그는 마을 입구에서 말고삐를 나무에 묶어 놓고 공작의 정복인 붉은 망토를 벗어서 안장 위에 올려놨다.
지도를 다시 펴서 들여다보는데 눈앞이 다시 흐려졌다. 종이의 글씨가 물에 번진 것처럼 흐릿하게 어두워졌다.
잠시 기다리니 시야는 다시 돌아왔지만, 정상처럼 뚜렷하진 않았다. 그는 짜증스럽게 대충 지도를 쑤셔 넣고 길을 따라 걸었다.
다행히 빵집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열린 문을 밀자 문가에 매달린 종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바 안쪽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홍색 머리칼의 여자가 보였다.
“차가운 크림을 만든다는 사람을 찾아왔는데.”
여자가 저를 돌아보았다. 사람의 실루엣은 보이는데 얼굴이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눈에 힘을 주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렴풋하게 푸른색을 띠는 눈동자가 저를 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