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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25)화 (25/110)
  • 25화

    “고마워요.”

    목이 메어 대답하는 캐슬린의 심정을 알아차렸는지, 그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3년이나 되었으니 이제 감사 인사는 그만하세요.”

    요제프는 사람 좋게 눈까지 찡긋해 보이고는 스푼을 내밀었다.

    “스튜 간이 맞는지 봐 주시겠어요?”

    “네, 그럴게요.”

    그의 얼굴에는 진심이 보였다. 캐슬린은 친구의 호의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1초 만에 캐슬린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싹 사라졌다.

    “요제프. 대체 뭘 만든 거예요?”

    하지만 공작저 주방 하녀 경력이 자그마치 6년이나 되는 캐슬린은 아무리 고마운 친구라도 음식 맛까지 도저히 눈 감아 줄 수는 없었다.

    “비켜 봐요. 내가 다시 만들 테니까. 가서 루치나 봐줘요.”

    “넵. 알겠습니다.”

    국자와 솥을 빼앗기고 부엌에서 쫓겨난 요제프는 잠깐 침울해 보였지만, 페터와 루치 쟁탈전을 벌이느라 다시 시끄러워졌다.

    “젊은 부부가 참 보기 좋네. 암, 역시 애는 아빠가 같이 키워야 해.”

    앤더슨 아주머니는 캐슬린과 요제프를 번갈아 보면서 흡족하게 중얼거렸다. 아침을 먹고 나면 얼른 마을 사람들에게 아기 아빠가 돌아왔다고 알려야지 다짐하면서.

    * * *

    몇 달에 걸친 캐슬린의 특훈에도 불구하고 요제프의 요리 실력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저를 도우려고 하는 거 맞죠, 요제프?”

    “네. 당연하죠.”

    “혹시 괴롭히려는 건 아니고요?”

    “그럴 리가요.”

    요제프는 얼굴에 밀가루를 묻힌 채로 뻔뻔하게 대답했다. 캐슬린은 할 말을 잃고 갓 오븐에서 꺼낸 파이를 쳐다봤다. 알이 굵고 반질거리는 사과만 골라서 만든 필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반만 익은 페이스트리 반죽은 탄내가 났다.

    “정말 진지하게 말하는데 나랑 루치를 굶겨 죽이고 싶은 게 아니면, 부엌엔 들어오지 마세요.”

    “그 정도로 엉망입니까?”

    “네.”

    캐슬린은 딱 잘라 말하고선 망한 파이를 버렸다. 그리고 찬장에 숨겨 뒀던 사과 다섯 알을 꺼냈다. 그녀는 능숙하게 다시 사과 소스를 만들고, 큰 그릇을 꺼내서 능숙하게 달걀과 버터, 밀가루 등을 섞어 반죽을 만들었다.

    요제프의 입이 딱 벌어졌다. 캐슬린의 손이 바쁘게 움직일 때마다 그의 눈도 따라서 움직였다. 페이스트리 반죽을 완성한 캐슬린이 긴 나무 수저로 소스를 저으며 말했다.

    “또 뭘 해 보겠다고 하지 말고 가서 루치나 봐주세요.”

    “루치는 잡니다. 기특하게도 아직 안 깼어요.”

    치유력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에게는 또 다른 능력이 있었다. 요제프는 기막히게 아기를 잘 봤다.

    덕분에 캐슬린은 요제프가 뻔질나게 드나드는 동안 마음 놓고 쉴 수 있었다. 처음에는 편하고 좋았는데 무료한 시간이 이어지자, 앞으로 뭘 하고 살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잘하는 것부터 해 보기로 했다. 바로 요리였다.

    시험 삼아 케이크와 쿠키를 구워서 이웃에 나눠 줬는데 인기가 아주 좋았다. 그래서 수프도 끓이고 식사용 빵까지 구웠는데, 더 큰 환호를 받았다.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는 캐슬린이 만드는 귀족식 음식이 색다르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캐슬린은 소소한 빵집을 열었다. 가끔은 차도 끓여서 다과회도 열곤 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아주 좋아했다. 돈보다 그 따뜻함에 매료된 캐슬린은 이 마을에 생각보다 빨리 정이 들었다.

    “다 됐어요. 한번 먹어 봐요.”

    캐슬린은 달콤한 냄새를 솔솔 풍기는 파이를 작게 잘라 요제프에게 건네줬다. 한 입 먹은 요제프의 눈이 행복하게 휘어졌다.

    “맛있어요. 오늘의 디저트가 사과 파이라는 걸 알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올지도 모르겠는데요.”

    “또 저번처럼 소문낼 생각은 말아요.”

    “왜요. 켈리가 만든 음식은 누구든 좋아할 텐데요.”

    사과 파이 접시를 들고 앉아 캐슬린을 올려다보며 웃는 얼굴은 능청스러웠다.

    “손님이 너무 많아도 골치 아프잖아요.”

    “제가 도와주면 되잖습니까.”

    “신관님이 신전에 계셔야지 자꾸 바깥에 머물면 어떡해요?”

    “파견 나온 걸로 칩시다. 어차피 이제 대신관님도 절 포기했어요.”

    “요제프.”

    캐슬린은 복잡한 마음이 되어 그를 쳐다봤다.

    임신 기간 동안, 그는 상태를 살피러 한 달에 한 번씩 이곳에 들렀다.

    그러더니 결국 루치가 태어나고 나서는 거의 이 집에 눌러살았다.

    평민이 델라포스 신전의 정식 신관이 된다는 건 인생에 다시 없을 기회였다. 더구나 그의 치유력은 흔히 볼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미래의 대신관이 될 수 있는 인재가 수련도 않고 작은 마을에 머무른다는 건 캐슬린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제 소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경전 속의 사람만 들여다볼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첫 사람이 제게는 켈리고요.”

    요제프는 힘주어 말했다.

    “그러니까 절 보내려 하지 마세요. 아주 끈질기게 붙어 있을 생각이니까. 쫓아내도 다시 돌아올 거고요. 사실 루치가 눈에 밟혀서 어딜 가지도 못하겠지만요.”

    “누가 보면 요제프가 엄마인 줄 알겠어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캐슬린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다 구워진 파이를 조심스럽게 잘랐다.

    “그 파이도 빵집에 내놓으려고요?”

    “네. 브라우닝 아저씨가 며칠 전부터 사과 파이가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게 생각났어요.”

    “이런, 바구니만 들고 가도 아저씨가 감격한 얼굴로 뛰어오실 게 상상되네요.”

    그는 손수 바구니를 찾아다 파이 위에 손수건까지 덮어 줬다. 꼭 돈 때문이 아니라, 캐슬린에게는 온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요제프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응원해 주었다.

    “루치 걱정은 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제가 잘 보고 있겠습니다.”

    “알았어요! 주방은 건드리지 말고요.”

    캐슬린은 손을 흔들어 주고는 홀가분하게 작은 언덕을 걸어 내려왔다. 페터의 도움으로 얻은 집은 안락한 대신, 다른 집들과 조금 떨어져 있는 편이었다.

    “켈리! 오늘 빵집 문 여는 거요?”

    그래서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팔에 바구니를 끼고 내려올 때면 재빨리 반응하곤 했다. 그때부터 달려가야 한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네. 오늘은 사과 파이예요!”

    “사과 파이? 곧 가겠소!”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브라우닝 씨는 갈퀴를 땅으로 내던지고 헐레벌떡 뛰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데리고 함께 오려는 것 같았다.

    캐슬린은 낡은 가게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바구니 안에 든 파이를 오븐에 넣어 놓고 접시와 잔을 꺼냈다.

    ‘아. 크림을 안 만들었네.’

    마침 우유도 다 떨어졌다. 집에 돌아갔다가는 요제프가 또 따라오겠다고 할 것 같았다.

    ‘엠마 아주머니네 가서 얻어 와야겠다.’

    마을 입구에 있는 엠마 아주머니네 가게는 늘 사람이 많으니, 신선한 우유가 분명히 있을 터였다. 브라우닝 아저씨가 실망하기 전에 얼른 다녀오려는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주머니, 저 왔어요. 우유 좀 얻어 가려고요.”

    “아유, 마침 잘 왔어, 켈리.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었는데.”

    “저를요? 왜요?”

    “글쎄 며칠 전에 어떤 손님이 왔는데, 휘핑크림 잘 만드는 사람을 찾는다더라고. 근데 우리 가게에서 크림 만드는 걸 보더니 다른 사람은 없냐고 묻지 뭐야. 성에 안 차나 봐.”

    “그래요?”

    새로 빵집 차리려는 사람인가?

    크림에 그렇게까지 진심인 사람이라니 왠지 관심이 갔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아주 질린 모양이었다.

    “대체 뭘 만들려고 그러는 건지. 게다가 자기가 소문을 들었는데 우리 마을에 차가운 크림을 기가 막히게 잘 만드는 사람이 있지 않냐고 묻더라고. 아무래도 저번에 켈리가 만든 커스터드 파이를 선물받은 적이 있나 본데, 그 손님이 먹고서 단단히 반했나 봐.”

    “그 정도예요?”

    “아 그렇다니까. 얼마나 지독하던지. 아예 말이 안 통해! 일단 돌려보냈는데, 오늘 또 오면 빵집 오늘 열었으니까 가 보라고 할게.”

    “알았어요. 아, 우유는 이만큼 가져가도 되죠?”

    “그래, 그래.”

    골치 아픈 손님을 떠넘겨 버릴 수 있게 돼서 기쁜 엠마 아주머니는 넉넉하게 우유를 담아 주었다.

    캐슬린은 어느새 소문도 난 자신의 실력에 뿌듯함을 느끼면서 빵집으로 돌아왔다. 큰 그릇을 꺼낸 다음 물을 붓고, 그대로 얼렸다.

    그녀가 맛있는 크림을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3년 전과 달리 그녀는 얼음 결정을 훨씬 더 손쉽게 다룰 수 있게 됐고, 원할 때마다 그릇을 차갑게 유지하면서 크림을 만들 수 있었다.

    아무리 더운 날에도 녹지 않는 얼음으로 신선한 크림을 만들 수 있는 건 캐슬린이 유일했다. 그래서 그녀가 만든 커스터드 파이나 생크림 케이크는 수도의 제과점에 비해도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 퀄리티가 뛰어났다.

    막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파이를 오븐에서 꺼내고 크림을 얹어 꾸몄다. 이만하면 완벽했다.

    -딸랑.

    문가에 매어 둔 작은 종이 울렸다. 브라우닝 씨가 생각보다 빨리 왔다고 생각하면서 캐슬린은 급하게 잔에 우유를 따랐다. 그리고 나무 쟁반에 파이를 담아 함께 받치면서 뒤를 돌았다.

    “브라우닝 아저씨, 생각보다 빨리 오셨…….”

    그러나 빵집으로 들어선 사람은 브라우닝 씨가 아니었다.

    차가운 우유가 잔에서 넘쳐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가운 크림을 만든다는 사람을 찾아왔는데.”

    루치와 꼭 닮은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

    알렉시스 발텐이었다.

    “당신이 빵집 주인인가?”

    황금색 눈이 저를 똑바로 보면서 말을 걸어왔다.

    캐슬린의 손에서 나무 쟁반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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