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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24)화 (24/110)
  • 24화

    몸의 곡선을 숨기기 위해 강하게 조여 놓은 붕대는 새 옷을 입을 때는 필요 없었다. 페터는 해방감을 느끼며 붕대를 풀고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렇게 황궁 바깥으로 나가서 매어 둔 말에 올라탔다. 이미 해가 지고 있는 터라 한참 시간이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녘이었다.

    그러나 페터는 익숙한 듯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작은 집 여러 개를 지나, 특색이라곤 하나도 없이 평범한 어떤 집 앞에 도착한 그는 노크도 없이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아기자기한 작은 요람에는 반짝이는 은발을 가진 갓난아기가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고, 그 옆의 침대에는 주홍색 머리칼의 여자가 누워 있었다.

    페터는 옆에 떨어진 이불을 주워다 그녀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그러자 연하늘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저를 보고 반갑게 휘어졌다.

    “오셨어요?”

    “네. 캐슬린. 늦어서 미안해요.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아요.”

    페터는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 그녀를 도우며 침대 끄트머리에 조심스럽게 앉아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아기의 얼굴에서는 얼핏 제가 꼴 보기 싫어 뛰쳐나왔던 사람이 보였다.

    다시 말하면 알렉시스 발텐 같은 사람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다시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이복형과는 달리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에 이내 마음이 녹아내렸다.

    “캐슬린을 많이 닮았어요.”

    그래서 페터는 아기의 작은 손을 어루만지며 애 아빠의 얼굴을 무시해 버렸다. 다시 보니 아기는 엄마도 많이 닮았다. 어차피 머리와 눈 색이 엄마 쪽이니, 애 아빠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이 엄마 판박이라고 할 거였다.

    “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예요.”

    “그렇지 않아도 이웃들이 다 그런 말을 해요. 이렇게 오밀조밀하게 예쁜데 정말 딸이 아니냐고.”

    “그럴 만하죠. 정말 천사같이 예쁘니까.”

    페터는 처음 생긴 조카를 사랑스럽게 들여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기 이름은 지었습니까?”

    “아직 생각 중이에요.”

    “태어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이름이 없다니요. 후보로 지어 놓은 것도 없어요?”

    “글쎄요.”

    캐슬린은 모호하게 답하면서 말꼬리를 늘였다. 이것저것 후보는 많았는데 오히려 그게 더 문제였다.

    ‘공작저에 있을 때 생각했던 이름들은 아기에게 붙여 주고 싶지 않아.’

    몰래 가슴 졸이며 뽑아 두었던 이름들을 다 버리려니 적당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삼촌, 아니 고모가 되었으니 페터가 정해 주는 건 어때요?”

    캐슬린은 아기를 닮은 그 사람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면서 애써 쾌활하게 말했다.

    “이 아이가 생긴 걸 제일 먼저 알아차린 것도 페터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정말 제가 정해도 됩니까?”

    “안 될 건 없죠. 페터도 이 아이의 부모나 다름없잖아요.”

    “이런, 다른 데선 그런 소리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다 정말 제가 이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만다고요.”

    페터의 너스레에 캐슬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않아도 페터는 과연 아기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궁금해하는 마을 사람들이 짐작하는 후보자 1순위였다.

    그걸 모르고 처음에는 남자 옷을 입고 왔다가 혼자 사는 아가씨 집에 침입하는 불한당 취급을 받은 뒤로는 여자 옷을 입고 오기 시작했다.

    “그럼 루치아노는 어떠십니까?”

    “빛이란 뜻인가요?”

    “네. 캐슬린에게도, 저에게도 이 아이는 빛 같은 존재니까요.”

    “좋은 이름이네요. 애칭으로는 루치라고 부르면 되겠어요. 마음에 들어요.”

    가만히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캐슬린은 이름을 다시 불러보았다.

    “루치…….”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고마워요, 페터.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두 다요.”

    울컥 솟는 감정을 누른 채 캐슬린이 감사를 표했다.

    “페터가 아니었다면 이 아이는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3년 전, 그날 밤.

    서쪽 사냥터 오두막에서 돌아와 공작저로 향하던 길에서 캐슬린은 죽음을 생각했다.

    아이를 생각지 못하고 순간의 선택으로 모든 충격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그녀를 붙잡은 건, 때마침 마주친 알렉시스의 이복동생이자 황태자인 페터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 그런 남자 하나 때문에 목숨을 버리려 하지 마세요. 당신을 이용한 사람들 때문에 왜 당신이 목숨을 버려야 합니까?

    그러고서 페터는 캐슬린의 손을 잡아 제 가슴에 가져다 댔다. 다소 거친 몸짓에 놀랄 틈도 없이, 캐슬린은 그가 숨겨온 비밀에 경악했다.

    -저, 전하.

    -제 어머니, 황후 폐하께서는 거짓말을 하셨습니다. 사생아인 형님에게 황제 자리가 넘어갈 것을 두려워하신 나머지 무리해서 저를 낳으시고, 아들이라 공표하셨죠. 그래서 형님은 황태자가 아닌 발텐 공작이 되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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