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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22)화 (22/110)
  • 22화

    알렉시스는 편지를 손에 쥔 채 방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주인이 사라졌다는 것을 빼면 침실은 무엇이 잘못되었냐는 듯이 평화로워 보였다.

    깨끗한 이불이 구김 없이 놓인 침대.

    그 아래엔 연분홍색의 푹신한 슬리퍼.

    싱그러운 꽃이 가득 담긴 꽃병.

    흔들의자에 걸쳐져 있는 흰색 숄.

    “찾아.”

    “이미 근방을 모두 찾아보았습니다. 혹시나 어디 쓰러져 계신 건 아닐까 하고 정원의 미로 숲까지 뒤져 보았으나 없었습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주인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알스도프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님은 서쪽 사냥터의 일을 알게 된 후 충격을 받아 자취를 감춘 것이 틀림없었다.

    그로서는 발텐 공작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시녀도 함께 없어졌나?”

    “아닙니다. 에밀리도 오늘 아침에야 마님께서 사라지신 것을 알고 제게 알렸습니다.”

    “데려와.”

    알렉시스가 바람을 일으키며 집무실로 향했다. 그는 목이 조이는 기분에 짜증스럽게 크라바트를 벗어 던졌다.

    약을 먹었는데도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알렉시스는 그게 부작용 때문일 거라 애써 넘겼다.

    “각하, 데려왔습니다.”

    알스도프가 데려온 시녀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네 주인이 언제부터 사라졌지?”

    “오, 오늘 아침부터입니다. 막 아침을 준비하고 마님을 깨우러 갔는데 침대에 안 계셨습니다. 욕실에도 안 계시고 정원에도…….”

    “그건 이미 들은 사실이다. 쓸데없이 거듭해 말할 필요 없어.”

    숨을 헐떡대며 보고하는 시녀의 말을 단칼에 자른 알렉시스가 말했다.

    “신관은?”

    “예?”

    “캐슬린에게 신학을 가르친다던 신관은 어디 있냐고 물었다.”

    “요제프 신관님은 수련에 참석하셔야 해서 이틀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알렉시스는 알스도프에게 명했다.

    “델라포스로 사람을 보내.”

    “알겠습니다.”

    그는 에밀리를 다시 돌아보았다.

    “캐슬린이 갈 만한 곳은 다 찾아보았나?”

    “네, 이미 집 안을 다 뒤져보았습니다. 주방의 작은 창고부터 별관의 정원까지 싹 다 뒤졌지만 마님께선 안 계셨어요. 돈도, 옷도 아무것도 가져가시지 않았는데…….”

    “공작저 밖으로는?”

    “……마님께선, 공작저를 빼면 가실 만한 곳이 없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에밀리의 목소리가 다소 격앙되었다.

    “마님께선 황궁이나 꼭 참석해야 하는 사교계 모임이 아니면 다른 곳에 들르시질 않았어요.”

    “그럼 신전 쪽일 확률이 높군.”

    그가 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에밀리는 발텐 공작의 말이 확신보다는 희망처럼 느껴졌다. 기필코 캐슬린이 거기에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 믿는 것처럼 말이다.

    “거기서 기도라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알렉시스는 문득 에디스가 누구인지 물어 오던 떨리는 연하늘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나가 보도록.”

    에밀리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임시방편으로 처치하여 나은 줄 알았던 두통이 다시금 밀려왔다.

    “저, 각하.”

    나간 줄 알았던 알스도프가 머뭇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더 할 말이 있나?”

    “아무래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마님이 에디스 양의 존재를 아셨습니다.”

    “알아. 그녀가 공작저로 찾아오는 바람에 라일런트 자작이 데리고 나갔다더군.”

    예상치 못한 일이긴 하지만 에디스가 제 입으로 비밀을 말했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서쪽 사냥터에도 가셨습니다.”

    “뭐?”

    “죄송합니다. 각하께서 어디 계신지 말하지 않으면 직접 물으러 가시겠다기에, 그곳에 계실 거라 말씀드렸습니다.”

    머릿속을 헤집는 칼날 같은 고통에 이마를 찡그린 알렉시스는 품속에서 약병을 꺼내 한 모금을 들이켰다.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목구멍을 긁는 듯한 느낌과 함께 약물이 넘어갔다.

    두통은 빠르게 다시 사라졌다.

    알스도프는 조심스럽게 상세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날 밤, 돌아오셨을 때는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밀리도 생각보다 마님이 침착해 보이신다고 했고요. 그래서 저는 마님께서 각하와 에디스 양을 마주치지 못하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리 갑자기 사라지실 줄은…….”

    알렉시스가 마호가니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결국 내 손을 놓은 건가.’

    처음부터 의심스러운 여자였다. 곁에 두고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결혼했다. 언젠가는 이리될 거라고 생각했고, 예상치 못한 일도 아니었는데.

    왜 이리 허무한 기분이 드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카르미네 산맥에서의 행동은 환심을 사려고 했던 짓이었나.’

    수도로 돌아와서도 한참이나 그녀의 행동이 진심처럼 보여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역시 아니었던 거다. 다른 때도 아니고 에디스의 방문 이후로 바로 사라진 것을 보면.

    흔들렸던 제가 한심할 지경이었다.

    ‘오두막에서 엿들은 이야기를 외부에 발설하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어.’

    캐슬린 윈스턴에 대한 나머지 가능성마저도 깔끔히 지워 내 버린 알렉시스는 한참 만에 결론을 내렸다.

    그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1기사단의 일부를 황궁 쪽으로 보내. 멀리 가지는 못했을 테니.”

    “그 말씀은……!”

    황실의 방계인 발텐 가에는 특별히 수도에서 사병을 거느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지만 역사상 그 부대가 둘 이상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알렉시스 발텐은 예외였다.

    접경 지역의 전투에서 늘 선봉장으로 섰던 그에게만큼은 호위 기사가 아닌 전투 기사단까지 거느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 기사단을 황궁으로 보내겠다는 뜻은 황궁과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소리였다.

    “각하, 해가 졌습니다. 이 시간에 1기사단을 보내시면 황실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황후의 귀에 내 이야기가 들어가기 전에 막아야 한다. 어차피 벌어질 전쟁이면 앞당기는 것도 나쁘지 않아.”

    “각하!”

    “캐슬린을 발견하면 즉시 데려오라 전해.”

    요지부동이었다.

    알스도프는 할 수 없이 순응하고 물러섰다.

    무장한 기사단이 떠나고, 시간이 흘렀다.

    밤이 깊어갈수록 공작저에는 전시 같은 긴장이 흘렀다. 아무도 편히 잠드는 이가 없었고, 물 한 모금조차 쉽사리 넘기지 못했다.

    캐슬린의 시녀였던 에밀리만이 가슴을 치며 울 뿐이었다.

    달이 뜨고, 졌다.

    떠오르는 태양에 눈이 부실 즈음이 되어서야 기사단이 돌아와 보고했다.

    “어젯밤을 포함하여 3일 동안 황궁에 드나든 외부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변을 맴도는 사람도 없었고, 특히 공작 부인께서는 출입 기록조차 없으시다 합니다.”

    “확실한가?”

    “예. 황태자 전하께서 조회를 허락하셔서 확인했습니다. 분명합니다.”

    황궁 출입 시에는 로브 착용도 허용되지 않았다. 외모가 그토록 눈에 띄는 그녀가, 특히 요즘처럼 보안이 더 강화된 시기에 출입 기록조차 따돌리고 잠입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황후도 거기까지는 손을 댈 수 없었다.

    황태자의 움직임도 조사해 보았으나, 그는 황궁에서 나온 적도 없었다.

    미궁은 끝이 없었다. 그는 생각 끝에 말에 올랐다.

    “델라포스로 간다. 기사단은 신전 주변에 매복시켜 그녀의 흔적을 찾도록.”

    이미 사람을 보냈지만 정말 그녀가 그곳으로 몸을 피해 있다면 서둘러야 했다.

    사전 연락도 없이 발텐 공작이 홀로 들이닥치자, 한참 수련 중이던 델라포스의 대신관은 아연실색하여 뛰어나왔다.

    “각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발텐 공작은 델라포스뿐 아니라 제국의 그 어떤 신전도 걸음한 적이 없었다. 황족임에도 신년 행사에도 참석지 않은 적이 여럿이라 신성모독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수행 인원조차 없이 이리 갑자기 행차하다니.

    “요제프 신관을 찾아왔네.”

    “요제프 말씀이십니까? 그 아이는 지금 수련을…… 각하!”

    들은 척도 않고 수련장으로 향하는 알렉시스는 왠지 모르게 다급해 보였다.

    쾅-!

    그동안 수련을 게을리한 죄로 사흘간 금언 수행을 하느라 골방에 혼자 처박혀 있던 요제프는 문이 박살 나는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각하?”

    저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바쁘게 방 안을 살피는 발텐 공작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여긴 웬일이십니까?”

    “요제프 신관. 자네에게 물을 것이 있어 왔다.”

    “직접 행차하실 만큼 다급한 일입니까?”

    언제는 투명인간 취급을 하더니 이제야 물어볼 것이 있다고 직접 달려왔다니 황당할 따름이었다. 어쨌건 대신관이 감시하듯 버티고 서 있으니 불경한 말은 할 수 없었다.

    요제프는 공작 부인께서 참 피곤하시겠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물어보시지요. 제가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알려 드리겠습니다.”

    “공작저에서 물건이 사라졌네.”

    “예?”

    “자넨 그 행방을 아는가.”

    “아니, 대체 뭘 잃어버리셨길래 여기까지……. 그리고 뭔지도 모르는데 제가 어디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외부인 중 마지막으로 그걸 보았던 자가 자네야.”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억울해서 팔짝 뛸 노릇이었다. 점술가나 예언가 취급을 하러 온 줄 알았는데 이젠 도둑놈 취급이라니 더 최악이었다.

    “전 공작저에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나온 적이 없습니다!”

    “맹세할 수 있나?”

    “당연하지요! 저는 델라포스에서 사역하는 신의 종입니다. 애초에 제 것이 아닌 것은 탐내지 않아요.”

    “그 말이 진실이길 바라네. 지금부터 신전을 수색할 테니까.”

    “예? 아니, 각하!”

    그 말을 끝으로 알렉시스는 델라포스 신관을 나왔다. 대신관이 황망하게 뛰어나와 무어라 항의했으나 곧 기사단이 도착하여 신전을 수색하는 통에 물러나야만 했다.

    “없습니다, 각하.”

    “신전 또한 외부인의 출입은 없었다 합니다.”

    그러나 조사 결과는 예상외였다. 알렉시스는 더욱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공작저로 귀환했다.

    “알스도프. 캐슬린은?”

    본관에 들어서자마자 성마르게 묻는 모습에 노집사는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느꼈다.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알렉시스는 굳어진 얼굴로 침실로 올라갔다. 그녀의 침실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알스도프가 따라 올라와 보고했다.

    “명령하신 대로 마님 소유의 재산을 모두 조사했지만 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금전, 보석, 땅문서, 하다못해 드레스룸의 옷과 구두까지도 그대로입니다.”

    “맨몸으로 사라졌다고?”

    덜컹, 심장이 아래로 처박혔다.

    순간적으로 그녀가 납치당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으나 이내 판단을 바꿨다.

    공작저의 보안이 그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제 의지로 떠난 것이다.

    ‘납치당한 것으로 보이길 바랐을 수도 있겠지.’

    용의자를 황후와 윈스턴 백작으로 확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 2기사단 단장을 소환하려던 찰나였다. 에밀리라고 했던 시녀가 들어섰다.

    아직도 울고 있었는지 코끝이 빨개진 채로.

    “주인님, 마님께서 들고 가신 물건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가지고 간 물건에 따라서 그녀의 행선지를 추적할 수 있었다. 금전의 흐름은 더 파악하기 쉽고, 만약 황궁의 하사품을 가져갔다면 장물을 취급하는 보석상을 불러들이면 될 테니까.

    “6년 전, 공작저로 들어오실 때 가져오셨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에밀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저와 함께 방을 쓰실 때 쓰셨던 물건을 모두 챙겨 가셨어요. 마님의 방에 있는 것은 하나도 손대지 않으시고, 그 시절에 입으셨던 옷과 신발, 빗, 앞치마 같은 것만 다 챙겨 가셨어요…… 온통 옛날 물건들만요.”

    떨리며 이어지는 말은 결국 울음으로 변했다. 에밀리는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 말에 알렉시스의 머릿속에 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지금껏 세워 온 가정과 추론이 몽땅 흐물거리며 녹아 사라졌다.

    ‘왜?’

    그 후 떠오른 것은 의문뿐이었다.

    ‘왜 그것만 가져간 거지?’

    제가 그녀에게 던져 준 돈과 물건, 권리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녀는 한 번도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았다. 그런데 공작 부인의 물건은 하나도 챙기지 않고, 하녀로 일하던 시절 쓰던 낡은 물건만 모두 챙겨 갔다고?

    “2기사단을 불러들일까요, 각하?”

    20년이 넘게 알렉시스를 모신 노집사가 기민하게 그의 속내를 알아채고 물어 왔다.

    “그러도록. 수사는 제국 전체로 확대한다.”

    움직이지 않는 입을 열어 알렉시스는 겨우 그렇게 명했다. 곧 그녀를 잡으면 그 이유도 밝혀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알렉시스 발텐은 자신의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음에도 캐슬린 윈스턴의 흔적을 단 하나도 찾지 못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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