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21)화 (21/110)
  • 21화

    “공작님의 부상은 다 나은 지 오래입니다.”

    캐슬린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먼저 본인의 소개부터 하는 것이 예의라고 알려 드리고 싶군요.”

    “아.”

    그제야 여자는 자신의 무례를 알아챈 것 같았다.

    “제 이름은 에디스예요.”

    하지만 그렇게 이름을 밝히더니, 아무런 말도 없었다.

    자세히 보니, 걸친 옷과 장신구는 고급스러운 것이었지만 가문에 소속된 재단사가 제작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의상실에서 같은 디자인으로 여러 사이즈를 만들어 판매하는 기성품은 부유한 상인들이 즐겨 입곤 하는 종류였다. 에디스는 평민이었다.

    만약 신분을 숨기고자 하는 귀족이었다면 무의식중에 무릎을 굽히는 인사라도 제대로 했을 텐데, 그런 것도 없었으니 확실했다.

    ‘공작님의 부상 소식을 한낱 평민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발텐 공작은 카르미네 산맥에서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그런데 그걸 알고 있다면…….

    캐슬린은 담담하게 말하려 노력하면서 물었다.

    “여긴 어떻게 찾아왔죠?”

    “공작님께서 연락을 주셨어요. 찾아오라고요. 제가 어딜 좀 다녀오느라 그 연락을 늦게 받아서, 벌써 상처가 다 나으신 줄은 몰랐네요.”

    에디스는 편지 한 장을 건넸다.

    거기에는 알렉시스의 필체로 간결하게 ‘자신을 찾아오라’고 적혀 있었으며 발텐 가의 인장까지 찍혀 있었다.

    “그럼 다급하게 굴 이유는 없겠군요.”

    캐슬린은 앉으라고 손짓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네요.”

    “그건…….”

    당황한 듯 망설이는 모양새는 처음의 기세와 달랐다.

    “내게는 하지 못할 이야기인가요?”

    “죄송하지만 그래요.”

    에디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부인께선 모르시는 편이 나아요.”

    “그건 무슨 뜻이죠?”

    “제가 잘못 왔어요. 공작님께선 제가 부인과 대화하는 걸 원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분이 당신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 싶어 한다고요?”

    “네. 전 원래 공작저에 오면 안 되는 사람인데, 그분이 다치셨다고 들어 다급한 마음에 이리로 찾아왔어요. 멀쩡하게 다 나으셨을 줄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거예요. 죄송해요. 못 본 걸로 해 주세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녀는 상황을 정리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왜 나를 피하려는 거야?’

    알렉시스의 부고라도 들려올까 두렵다는 듯 저를 재촉해 놓고선 이제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도망가려는 모양새라니.

    “잠깐만요.”

    캐슬린은 서둘러 응접실을 나가려는 에디스를 붙잡으려 했다.

    “물어볼 게 있어요. 잠시만…….”

    “죄송해요.”

    그녀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캐슬린을 피하고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에디스!”

    막 응접실로 들어서려다 말고 멈춰 선 라일런트 자작이 보였다. 마치 에디스가 공작저에 왔다는 사실에 놀라 집무실에서 헐레벌떡 뛰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에디스, 여기로 오면 어떡합니까? 제가 누누이 말했잖아요. 이러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아, 마님.”

    그 역시 캐슬린을 발견하자마자 입을 딱 다물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죄송합니다, 마님. 제 손님인데 실수했군요. 신경 쓰실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이거 놔요, 자작님!”

    라일런트 자작은 에디스의 팔을 잡아끌고 사라졌다. 캐슬린이 뭐라고 더 물을 새도 없었다.

    “저, 마님. 괜찮으세요?”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 에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착각하는 거라고 생각해, 에밀리?”

    캐슬린은 비참한 기분이 되어 중얼거렸다.

    “저 여자가 왜 나한테 비밀이어야 하는 걸까?”

    “마님…….”

    하지만 에밀리도 괜한 걱정일 거라 말해 주지는 못했다. 캐슬린은 쓰게 웃으면서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부관인 라일런트 자작이 저렇게 챙기기까지 하니 그에게는 소중한 사람일 텐데.

    ‘다 알고 있다고 협박이라도 해야 할까?’

    그리고?

    뭐라고 하지?

    ‘정식 부인은 나니까, 아이까지 가졌으니까 정부는 없애라고? 아니면 나 모르게 만나라고?’

    어느 것 하나 초라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막 해가 지기 시작했을 무렵 에밀리가 소리쳤다.

    “마님, 주인님께서 돌아오셨어요. 지금 본관으로 들어가고 계세요.”

    캐슬린은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났다. 남편의 침실로 향하는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남편의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공작님!”

    붉은 정복 조끼를 거칠게 벗어 던지던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캐슬린?”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옷을 갈아입는 중인데, 안 보이나?”

    “에디스라는 여자가 공작저로 찾아왔었어요.”

    흰 셔츠 단추를 풀어내던 그의 바쁜 손가락이 멈추었다.

    두꺼운 커튼 옆에 서 있는 알렉시스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표정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침묵 가운데 흐르는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반쯤 풀린 흰 셔츠 사이로 보이는 가슴이 눈에 띄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누구예요?”

    “나가 봐야 하니 나중에 이야기해.”

    알렉시스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너무나 명백한 대화의 거절이었다.

    그는 갈아입으려던 옷도 내버려 두고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스쳐 지나가려 했다. 눈가가 뜨거웠다.

    캐슬린은 필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오늘은 돌아오실 건가요?”

    “그게 왜 궁금하지?”

    그의 대답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러 왔다.

    그녀의 남편, 아니, 발텐 공작이 무표정한 눈빛으로 캐슬린을 훑어보았다.

    아름답다고 생각해 왔던 금안이 이 순간만큼은 참을 수 없이 잔인했다.

    “내가 재깍재깍 돌아와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나?”

    “……그래 주시면 좋겠어요.”

    정말 에디스란 여자가 당신의 정부인가요?

    제가 아이를 가졌다고 고백해도, 당신은 에디스를 만나기 위해 저를 떠날 건가요?

    그리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용기 내어 한 말에 그는 소리 내어 웃더니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그대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그럼 계약 결혼답게 후계자부터 낳아.”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지금, 뭐라고…….’

    명백한 조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거지에게 적선하는 금화를 시계탑 위로 던지는 격이었다.

    캐슬린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그를 밀쳐 냈다.

    열이 오른 것처럼 느껴지는 남편의 팔은 쉽게 저를 놓았다.

    알렉시스는 망설임 없이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지나쳤다. 그는 거의 달리고 있었다.

    안장조차 얹지 않은 채로 말에 올라타 사라지는 그를 문가에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알스도프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다가왔다.

    “마님.”

    “자넨 라일런트 자작이 에디스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겠지.”

    늘 유순하고 조용하던 공작 부인의 날 선 목소리에 알스도프는 흠칫 놀랐다. 눈물이 가득 고인 연하늘색 눈동자가 그 어떤 때보다 차가워 보였다.

    “내가 공작님께 직접 묻길 원하는가?”

    “……서쪽 사냥터의 오두막일 겁니다.”

    “그곳으로 가야겠네. 마차를 준비시키게.”

    에밀리는 만류했지만 캐슬린은 홀로 마차에 올랐다.

    서쪽 사냥터는 황실의 방계인 발텐 가문의 사람이 대대로 물려받는 땅으로 공작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때는 늘 여기에 있었던 걸까.’

    사냥터에 밤을 보낼 수 있는 오두막이 있는 걸 서류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캐슬린은 알고 싶었다. 정말 그가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었는지, 그리고 그 여자를 숨겨 두기 위해서 저를 방패로 삼았는지.

    사냥터 출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방문에 당황했지만 발텐 가의 문양이 찍힌 마차와 캐슬린의 얼굴을 보고 통과시켜 주었다.

    들판 한가운데 있는 오두막이 보였다. 캐슬린은 거기서부터 마차에서 내려 걸어갔다.

    알렉시스가 아끼는 흑마가 근처에서 고삐마저 묶이지 않은 채 풀을 뜯고 있었다. 라일런트 자작의 말은 보이지 않았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붉은 머리칼이 보였다. 캐슬린이 막 다가서려는 찰나였다.

    무언가를 참는 남자의 신음이 들렸다.

    “아, 공작님. 더 못 하겠어요.”

    애원하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응접실에서 만났던 에디스라는 여자의 목소리 같았다.

    “그만, 그만하면 안 될까요?”

    “안 돼.”

    가쁜 숨을 내뱉는 알렉시스가 명령했다.

    “계속해.”

    “하지만. 으…….”

    안쪽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나더니 에디스가 신음을 흘렸다.

    캐슬린은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더 듣고 있다가는 토할 것 같았다. 그녀는 그대로 입을 막고 마차로 돌아갔다.

    캐슬린은 마차에 기대앉아 제가 들었던 대화와 숨소리를 끊임없이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눈물에 젖은 제 얼굴을 보고서도 감흥 없이 뒤돌아선 남편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진정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이제는 정말 떠나야겠다고.

    * * *

    알렉시스 발텐은 이틀 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공작저로 돌아왔다.

    “각하!”

    공작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알스도프가 급하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지?”

    “없습니다!”

    몹시 당황한 채 말의 앞뒤를 잘라먹고 횡설수설하는 노집사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곳저곳 다 뒤져 보아도 보이질 않습니다. 하녀들도 아무도 모른다고 하고요…… 오늘 아침부터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없어졌냐는 말이다.”

    그는 몹시 지쳐 있었다. 이런 사소한 일까지 사사건건 제가 알아야 하나 싶어 짜증이 치밀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알스도프의 말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마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알렉시스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마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각하!”

    쐐기를 박듯 이어지는 노집사의 말에 그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는 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위층으로 올라가 그녀의 침실 문을 열어젖혔을 때, 늘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던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봉투도 없는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알렉시스는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편지에는 망설임 없이 날려 쓴 한 문장만 남아 있었다.

    [저를 찾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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