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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20)화 (20/110)
  • 20화

    산등성이를 타고 울려 퍼지는 음성은 라일런트 자작의 것이었다.

    “각하아아아-! 어디 계십니까!”

    “발텐 공작님! 들리십니까아!”

    “마니이임! 어디 계세요오오!”

    약초꾼들의 다급한 목소리와 에밀리의 울음 섞인 목소리까지 한데 섞여 들렸는데 점점 가까워지는 듯했다.

    은발의 사내는 멈칫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저, 잠깐만요!”

    그대로 그를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캐슬린은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그는 날래게 움직여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가게 둬.”

    “하지만…….”

    “위험한 이들이다.”

    알렉시스가 잘라 말하는 모습에 캐슬린의 말문이 막혔다. 저와 같은 외형을 지닌 사람은 생전 처음 보아서 이대로 놓치는 게 아쉬웠다. 그러나 발텐 공작인 그가 이민족을 경계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머리 색과 눈 색이 닮았다고 해서 마음 주지 마. 그런 빈틈을 노리고 달려들어 급소를 찌르는 게 저들의 특징이니.”

    남부 국경에서 이민족과 전투를 여럿 치른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캐슬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계십니다!”

    “각하!”

    누군가가 드디어 그들을 찾아낸 듯했다. 알렉시스는 시끌벅적하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망설임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가면서도 캐슬린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흰 눈만 가득한 설원에는 찬 바람만 불고 있었다.

    * * *

    알렉시스가 피로 물든 어깨로 그들 앞에 나타나자 난리가 났다. 라일런트 자작은 사색이 되어서 의사 카벨 선생을 앞에 데려다 놨지만, 생각보다 상처가 깊어 여기선 응급 처치만 가능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라일런트 자작은 지금 당장 수도로 귀환해야 한다 주장했지만, 알렉시스는 거절했다.

    “호들갑 떨지 마라.”

    “각하!”

    기가 막힌 라일런트 자작이 설득하려 들었지만 알렉시스는 요지부동이었다. 라일런트 자작은 하는 수 없이 캐슬린이 누워 있는 방으로 찾아와 부탁했다.

    “마님, 각하를 설득해 주십시오. 지금 호프웰 백작이 대숩니까? 어깨 근육이 상했을지도 모르는데요.”

    “자작님, 지금 부인께서 휴식 중이신 게 안 보이시는지요.”

    요제프가 어이없다는 투로 면박을 줬다.

    “그건 부관이신 자작님께서 해결하셔야죠. 각하께 수면제라도 먹여서 재운 다음 마차에 태우면 끝날 일 아닙니까.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신 부인께 말씨름까지 시키다니요.”

    “……신관님.”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캐슬린이 요제프에게 말했다.

    “공작님의 상태를 살펴봐 주세요. 신관님의 치유력이라면 도와주실 수 있겠죠?”

    파리해진 얼굴로 말하는 그녀의 부탁을 요제프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럼 도와주세요. 절 봐서라도.”

    “하아. 예, 알겠습니다.”

    그는 신 대신 만물을 구원해야 하는 소명을 가지고 태어난 만큼 약한 것들에 약했다.

    “부인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어깨를 다치셨다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만물에 모두 동등하게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는 건 아니었다.

    “다치신 곳을 보여 주십시오.”

    아무리 신관이라지만 상당히 불경한 태도에 라일런트 자작은 입을 떡 벌렸다.

    “캐슬린이 보냈다고?”

    그러나 알렉시스는 신관의 무례함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예.”

    “뭐라던가?”

    “그야 당연히 각하를 치료해 달라고 하셨지요.”

    “의외군.”

    “예?”

    그는 답 없이 오른쪽 팔을 내밀었다. 뾰족한 돌부리에 찢긴 어깨는 근육이 상한 상태였다.

    요제프는 살짝 놀랐다.

    ‘통증을 못 느끼는 사람인가?’

    공작은 멀쩡해 보이길래 주변에서 호들갑을 떠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깨가 끊어진다고 소리를 칠 텐데.

    하긴 아내를 그리 냉대하는 사람이니 이 정도 지독한 거야 별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요제프는 치유력으로 그의 어깨를 치유했다. 순식간에 근육이 다시 붙고 피가 멎었다.

    “오오! 이제 거의 다 되었습니다. 이제 빨리 수도로 돌아가서 약을 드시면 감염의 위험은 없을 겁니다.”

    카벨 선생이 반색하며 기뻐했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표정의 변화 없이 말했다.

    “캐슬린에게 물어라. 바로 수도로 돌아갈 것인지.”

    “제가요?”

    요제프는 집게손가락으로 저를 가리켰다. 알렉시스는 돌아보지도 않고 상의에 팔을 꿰고 있었다. 라일런트 자작이 그를 쫓아 보냈다.

    “얼른 가서 허락을 받아 오십시오. 그래야 떠날 것 아닙니까.”

    “아, 알겠습니다.”

    떠밀리듯 요제프가 카벨 선생과 함께 나가자, 방에는 알렉시스와 라일런트 자작만 남았다.

    “각하, 왜 마님께 직접 가서 묻지 않으시고 제 방에서 이러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좁은데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니 정신이 없어 죽겠습니다.”

    “찾았다.”

    “뭘요?”

    라일런트 자작은 알렉시스가 던진 천 뭉치를 얼떨결에 받아 들고 펼쳤다.

    “어!”

    “다행히 조난당한 곳과 얼음꽃 군락지가 가까웠어.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그는 빠르게 꽃의 상태를 살폈다.

    “예. 피에 좀 젖긴 했지만 아직 상하진 않았군요. 약을 만들 수 있겠습니다.”

    “귀환하자마자 저번에 말했던 약제사에게 연락을 취해라. 수도로 올 때까지 시간이 걸릴 테니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산사태.”

    단추를 여미며 알렉시스는 무너지던 골짜기를 떠올렸다.

    “정상적이지 않아. 근방에서 지진이 있었는지 조사하도록.”

    “하지만 북부에서는 지금껏 지진의 피해를 입은 적이 없잖습니까.”

    “지진이 아니라면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야 할 거다.”

    설원에서 마주쳤던 은발의 사내를 떠올리며 알렉시스가 말했다.

    “일단은 그 꽃으로 약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지.”

    “예. 그리하겠습니다.”

    발텐 공작은 이유를 말해 주는 경우가 드물었다. 라일런트 자작은 그냥 얼음꽃이나 잘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잠시 후 캐슬린이 수도로의 귀환에 동의했다는 말이 전해졌다.

    그날로 발텐 공작 부부는 다시 짐을 꾸려 빠르게 다시 수도로 돌아왔다.

    * * *

    “네? 아니, 주인님께서 그런 약속을 하셨단 말이에요?”

    에밀리가 캐슬린의 머리를 빗겨 주다 말고 아쉬운 듯 탄식했다.

    “아쉬워라. 산사태만 아니었어도 마님의 소원을 이룰 기회였는데 말이에요.”

    “어쩔 수 없지.”

    캐슬린은 씁쓸하게 웃으며 무의식적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기회를 봐서 떼라도 써 보세요. 어쨌든 주인님 목숨을 살린 건 마님이시니 못 이기는 척 들어주실지도 모르죠.”

    “알았어.”

    에밀리는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며, 아침에 도착한 편지를 가져오겠다고 침실을 나섰다.

    호프웰 백작이 요청한 약초를 카르미네 산맥에서 무사히 가져오지 못했으니 보상은 받을 수 없게 됐다.

    캐슬린으로서는 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한번 일어난 산사태가 더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고, 알렉시스는 다쳤다. 요제프의 신성력 깃든 치유력으로 일단 근육을 붙여 놓긴 했지만 완벽한 치료는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도 육체적으로 무리했으니 수도로 돌아오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겠지.’

    캐슬린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카르미네 산맥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다.

    동굴에서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남편은 다시 멀어졌다.

    그는 며칠 동안은 알스도프를 시켜 자신의 상태를 살피기도 했지만, 어깨가 완전히 낫자마자 또 라일런트 자작과 함께 무언가를 논의하고 집을 떠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어제저녁에도 늦게 돌아왔다가 오늘 아침 새벽이 밝자마자 황궁으로 떠났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 바쁘신 걸까.’

    아이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출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는 하지만 가슴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나를 괴물이라 생각할지도 몰라.’

    이민족의 피가 섞인 제국민은 몇 있었지만 이렇게 임신 기간이 긴 경우는 캐슬린도 처음 들어보았다.

    특히 윈스턴 영지에서 만났던 가신들의 딸들은 그녀처럼 북방의 이민족인 겨울 요정의 피가 섞였지만 모두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러니 비슷한 경우를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부정을 의심하면 무어라 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요제프가 일어나며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각하께서 당신 자식이 아니다, 헛소리를 하시면 제가 델라포스의 대신관님을 데려오겠다니까요.”

    “대신관님은 요제프의 부탁을 들어주시기나 한대요?”

    제 걱정을 덜어 주려는 그가 고마웠지만 큰소리만 치는 모습에 걱정이 됐다.

    “어제도 신전에서 연락이 왔잖아요. 이번 수련에도 반드시 참석하지 않으면 신관 서임을 거두겠다고요.”

    “저만 한 치유력을 신성력으로 지닌 자도 드물어요. 절 내치면 델라포스의 손해죠. 두고 보세요. 절 쫓아내진 못합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요제프.”

    어쩌면 에밀리가 가져오는 편지가 델라포스의 마지막 경고장일지도 몰랐다. 저 좋자고 요제프의 신세를 망칠 순 없었다.

    “신전으로 돌아가셔도 돼요.”

    “신께서 말씀하시길 네 앞에 있는 어린것을 외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네?”

    “부인 배 속의 어린 생명이 눈에 밟혀서 제가 떠날 수 있을 리 없잖습니까.”

    “아예 쫓아 보내려는 게 아니에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신관님께서 도와주시면 좋겠지만, 신전에서 제명당하면서까지 그러길 원하진 않아요.”

    단호한 그녀의 말에 요제프가 반박하지 못하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맞는 말이긴 한데 왜 자꾸 반박하고 싶은 기분인지 저도 모를 노릇이었다.

    “마님, 델라포스 신전에서 또 편지가 왔어요.”

    “그거 보세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에밀리가 붉은 밀랍이 찍힌 편지를 흔들어 보였다. 정말로 경고장이었다.

    “후. 알겠습니다.”

    강경책을 쓰는 신전의 입장에 요제프도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그럼 한 달 뒤에 다시 뵙겠습니다, 부인.”

    “네, 얼른 가세요.”

    델라포스 신전은 이번에 요제프를 돌려받으면 당분간 보내 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기부금을 더 내서라도 그가 오랫동안 파견을 나올 수 있도록 부탁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아, 그리고 마님.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누구?”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일단 귀족처럼 보이진 않던데요. 주인님을 찾아왔다고 하더라고요.”

    “응접실로 들이도록 해. 혹 전쟁터에서 만났던 인연일지도 모르니까.”

    남부 전선으로 자주 출정했던 알렉시스에게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찾아오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알렉시스는 그런 이들을 사병으로 받아 주기도 하고, 황실의 기사로 추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밀리는 머뭇거리며 답했다.

    “저, 여성분인데요.”

    “……뭐?”

    “군인처럼 보이지도 않았어요.”

    말문이 막혔다. 공작저로 여자가 찾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설마 몰랐느냐? 발텐 공에게 정부가 있다는 사실을?

    황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니겠지.’

    괜한 착각일 거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캐슬린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접 맞아야겠다. 앞장서렴.”

    “네에.”

    에밀리가 눈치를 보며 그녀를 별관으로 안내했다.

    유모가 죽은 후 손님 접대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별관은 여성이 머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접대용 차를 준비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알렉시스를 찾아왔다는 여자는 빈 테이블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발텐 공작 부인께서 드십니다.”

    에밀리의 말이 들리자마자 그 여자는 튕기듯이 일어났다. 허리까지 굽이치는 붉은 머리칼이 탐스러운, 아름다운 여자였다.

    “발텐 공작님께선 어디 계세요?”

    그녀는 캐슬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물어왔다. 이국적인 억양이 섞인 채 조급하게 뱉는 말을 듣는 순간, 캐슬린은 자신이 아까 부정했던 사실을 확신할 수 없어졌다.

    “이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공작님께서 어깨를 다치셨다면서요!”

    에밀리가 큰소리를 냈지만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만나야겠는데, 어디 계시죠?”

    루비처럼 새빨간 눈은 성마르게 그녀를 재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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