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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19)화 (19/110)
  • 19화

    “사냥을 나갔을 때 가진 것 없이 조난을 당하면 처음으로 해야 하는 일이 뭔지 알고 있나?”

    속을 알 수 없는 진한 금안이 저를 꿰뚫어 보듯 강렬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아니요.”

    홀린 기분으로 캐슬린은 대답했다. 알렉시스는 갈 길을 잃고 헤매는 그녀의 팔을 제 어깨에 두르게 하고 말했다.

    “체온 유지.”

    “아.”

    “네가 했던 방법이 맞아. 혼자가 아니라면 서로 체온을 나눠야 하지.”

    그는 한쪽 팔에 힘을 주었다. 캐슬린은 그와 더 가까워졌다. 친밀해지는 몸짓에 그녀의 얼굴이 타오를 듯 붉어졌다.

    “비를 맞았을 때는 보통 옷을 벗고 불을 피운 다음 붙어 앉아. 입은 채로 옷을 말리면 더 체온이 떨어지니까.”

    “거기까지는 몰랐어요.”

    캐슬린은 그제야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알았다면 옷을 먼저 말린 다음에 다시 입혀 줬을 것이다.

    “이제 알았으면 가만히 있어.”

    “그, 그렇지만.”

    체온 유지를 위해 옷을 벗은 채로 붙어 있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지금은 옷이 다 말랐다. 게다가 이런 자세는 상당히 민망했다.

    “원래 이런 건가요?”

    그래서 캐슬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가.”

    저와 달리 그는 별생각이 없는 듯 태연했다.

    “힘드실 것 같아서요. 무거우실 것 같은데…….”

    “내가 약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그럼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있어.”

    하긴 둘 다 눈을 떴는데 다시 누워서 껴안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어쨌든 사냥을 많이 다니는 그이니 조난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캐슬린은 그의 어깨가 신경 쓰여서, 팔을 다시 내려 그의 허리를 안았다.

    밀쳐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알렉시스는 거부하지 않았다. 캐슬린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으니 그의 온기가 제게도 전해지는 듯했다. 캐슬린은 찢어진 치맛자락 사이로 드러난 다리에 쌀쌀한 바람이 닿자 가릴 요량으로 한쪽 손을 아래로 내리다 헛손질을 했다.

    그의 왼쪽 허벅지 주머니 쪽에서 불룩한 것이 만져졌다.

    “거긴 건드리지 마.”

    “아! 죄, 죄송해요.”

    실수했다는 생각에 캐슬린은 화들짝 놀라 다시 팔을 올렸다.

    다시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밀착한 육체 사이로 훈기가 풍겨 아랫배도 따뜻해졌다. 다시 통증이 느껴질까 불안했는데 이젠 괜찮아졌다는 확신이 들었다.

    고요한 동굴 안에서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만 들렸다. 긴장이 풀린 캐슬린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다시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수마에 굴복하고 만 캐슬린의 고개가 떨어졌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그의 품으로 좀 더 파고들었다.

    알렉시스는 그렇게 캐슬린을 안고 날을 지새웠다.

    막 새벽이 되었을 즈음이었다.

    그는 한쪽 팔로 캐슬린을 안아서 내려놓은 다음, 그녀가 완전히 잠에 빠져든 것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왼쪽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얼음꽃을 꺼냈다. 약간 푸른빛이 도는 유리를 세공한 것처럼 투명한 꽃은 모양이 조금 짓이겨지긴 했지만 괜찮았다.

    ‘당장 돌아가야겠어.’

    시간을 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캐슬린의 앞치마를 찢어서 얼음꽃을 넣고 묶은 후, 어깨를 싸맨 천 안쪽에 동여매기 위해 다시 풀었다.

    “엉망이군.”

    황당했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캐슬린이 놓은 천 조각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지만 얼마나 단단히 매어 놨는지 한쪽 팔로 풀기 어려웠다.

    자세히 보니 제 치마를 찢어서 맨 듯했다.

    어깨를 묶은 천에 얼음꽃을 숨겨 놓고, 알렉시스는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를 동굴까지 끌어오고 불을 피우느라 그랬는지 손에 상처가 나 있었다.

    허벅지까지 드러난 한쪽 다리는 생각보다 가냘퍼서 놀랄 정도였다.

    석 달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와 비교하면 놀랄 정도였다. 원래도 가냘픈 몸이었는데 지금은 더 심했다.

    그러고 보니 팔뚝도 부러질 것처럼 가늘었다.

    ‘걸핏하면 끼니를 거르니 저럴 테지.’

    배를 곯지 않고 살고 싶다고 공작 부인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었나.

    하녀일 때와 다르게 원하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을 텐데 왜 밥을 안 먹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몸이 축나면 손해인 것은 저일 텐데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갔다.

    알렉시스는 대체 그의 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해졌다.

    * * *

    날이 밝았다.

    동굴 안쪽까지 스며드는 밝은 햇살에 눈이 부신 캐슬린은 정신을 차렸다.

    알렉시스가 보이지 않았다.

    저를 버리고 간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난 그녀는 급하게 일어나려다 아기를 생각했다.

    ‘조심해야지.’

    요제프가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었다. 임신 초기에는 앉을 때도, 일어설 때도 조심해야 한다고 말이다.

    -부인께선 요정족의 피가 섞였으니 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임신 기간이 보통 사람보다 길 테니까 불안정한 시기도 길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의 조언을 어젯밤에 몇 번이나 어겼는데 지금이라도 조심해야지 싶었다.

    “깼나?”

    알렉시스가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언제 나가셨어요?”

    캐슬린은 얼른 배에서 손을 떼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해 뜨자마자.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아봐야 할 테니.”

    그는 붉은 열매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덤불 나무 열매. 다행히 여기서도 자라더군.”

    야생 음식은 아무거나 먹지 말라고 했는데.

    요제프의 조언이 떠올라 망설이는데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니 그냥 먹어.”

    그녀가 낯설어서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알렉시스가 말했다.

    “수도에서 과실수로 키우기도 하는 종류야. 독성도 없고. 벌써 하루 동안 굶지 않았나.”

    그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아기를 세끼나 굶게 하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몸은 왜 그렇지?”

    그녀가 열매를 먹는 것을 보고 있던 알렉시스가 물었다.

    “제 몸이요?”

    캐슬린은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저는 다친 곳은 없어요. 괜찮아요.”

    “상처가 아니라 거길 말하는 거야.”

    알렉시스는 다치지 않은 한쪽 팔로 아래를 가리켰다.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내린 캐슬린은 허벅지가 드러난 다리를 보고 깜짝 놀라 황급히 가렸다.

    “아! 이건 어제 천이 필요해서 찢다 보니까…….”

    “처음 보이는 것도 아닌데 놀랄 것까지야.”

    앞치마를 건네주는 그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한데 저만 유난인 것 같아 민망해졌다. 앞치마를 동여매자 알렉시스가 말했다.

    “공작저에서 굶고 사나?”

    “네?”

    이상한 질문이었다. 캐슬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데 왜 하녀였을 때보다 더 말랐지?”

    “그건…….”

    입덧 때문이라곤 말할 수가 없었다. 석 달 전, 아기가 생겼던 그 날과 비교하면 요즘은 살이 많이 빠져서 잘 맞던 드레스도 헐렁해지는 지경이었다.

    그가 굳이 제 몸에 신경을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사고 때문에 들켜 버린 것 같았다. 그가 금방이라도 제 몸을 구석구석 살펴볼까 걱정이 되어 대충 둘러댔다.

    “귀부인들 사이에 유행인 드레스 때문이에요.”

    “드레스?”

    “네. 가냘퍼야 잘 어울리는 옷이라서요.”

    알렉시스가 한숨을 쉬었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이었으나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마음이 놓였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네.”

    말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쌀쌀맞았지만 캐슬린은 그것마저도 좋았다. 저를 생각해 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몽글거렸다.

    “나가지. 대충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네.”

    캐슬린은 얌전히 그의 곁을 따라 나갔다.

    눈보라는 그쳤다. 하지만 수북이 쌓인 눈 때문에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의 뒤를 따라가던 캐슬린이 자꾸 뒤처지자 알렉시스는 옷자락을 내주었다.

    “잘 잡고 따라와.”

    “네, 그럴게요.”

    하지만 눈길을 뚫고 지나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어제 너무 무리했는지 몸이 축축 처지기 일쑤였다. 계속해서 뒤떨어지는 그녀를 돌아보던 알렉시스가 한숨을 쉬었다.

    “잡아.”

    그는 제 손을 불쑥 내밀었다. 캐슬린은 멍하니 남편의 크고 단단한 손을 내려다봤다.

    “뭐 하는 거지?”

    “아, 아니에요.”

    금방이라도 다시 거둬질까 두려워 얼른 그 손을 잡았다. 어제와는 달리 온기가 느껴졌다.

    냉기 때문에 몸은 추웠지만 마음은 따스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눈을 헤치고 지난 순간이었다.

    “멈춰라.”

    처음 듣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오자 알렉시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캐슬린도 덩달아 멈추고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이국적인 억양이 섞인 비아냥거림이 숲속에 울려 퍼졌다.

    “카르미네에 감히 발을 들인 침입자 주제에 용케 목숨줄이 붙어 있었네.”

    사람 수백 명이 둘러싸도 부족할 만큼 커다란 나무에 울창하게 뻗은 가지가 보였다. 그중 하나에 올라서서 활을 겨누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게다가.

    “애석하게도 그중의 하나는 배신자의 딸이고.”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남자는 캐슬린처럼 반짝이는 은발에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겨울 요정.’

    어머니와 같은 종족이었다.

    “뻔뻔하게도 이곳에 침입한 이유가 뭔지나 말해 봐.”

    “침입이라니, 말이 과하군.”

    알렉시스가 맞받았다.

    “카르미네 산맥은 제국의 소유. 출입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황실에 있다.”

    “황실? 제국?”

    남자가 소리 내 웃더니 밑으로 뛰어내렸다. 이글거리는 푸른 눈에는 분노가 선명했다.

    “본래 우리의 터전을 빼앗고 여인들을 납치해 이곳으로 내쫓은 것이 트리벨리언인데, 또 이곳에 기어들다니 낯이 두껍기 짝이 없군.”

    무어라 말릴 틈도 없이 그가 알렉시스를 향해 활을 쏘았다.

    “안 돼!”

    캐슬린은 저도 모르게 그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얼음 결정이 형체를 이루어 나가더니 화살을 붙잡았다.

    얼음 기둥은 시위를 떠난 화살을 감싸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남자의 활마저 빼앗아 얼렸다. 무기를 빼앗긴 남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얼음 기둥을 몇 번이고 보다가 캐슬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

    처음에 느껴지던 확연한 경계와 분노가 누그러진 태도였다.

    “혹시 네가.”

    무언가를 물으려는 듯 그가 몇 발짝 가까이 다가오던 순간이었다.

    “각하-! 발텐 공작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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