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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18)화 (18/110)

18화

캐슬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산사태가 끝난 후였다.

사위는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가슴이 답답했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춥지는 않았다. 순간 아이가 잘못됐을까 봐 걱정됐지만 배는 아프지 않은 것을 보니 괜찮은 듯했다.

저를 덮고 있는 무거운 것을 억지로 밀어내고 눈밭에서 빠져나온 뒤, 캐슬린은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

“공작님?”

시릴 정도로 흰 눈에 파묻힌 검은 머리칼이 보였다. 그제야 캐슬린은 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던 것이 눈이나 나뭇등걸이 아니라 알렉시스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공작님, 괜찮으세요?”

맨손으로 눈을 파헤치며 불러 봤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눈을 다 떨어낸 다음 뺨을 치며 불러 봤지만 소용없었다.

“어떡해…….”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둘러보았으나 산사태 때문에 지반이 무너졌는지 그들은 다른 곳으로 떨어진 듯했다. 사람은커녕 약초밭이나 길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캐슬린은 젖 먹던 힘까지 써서 알렉시스를 눈더미에서 꺼냈다. 그러다 그의 오른쪽 어깨가 피로 젖은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던 탓인지 입술까지 파래져 있었다.

‘나를 감싸려다가 다친 거야.’

산사태가 덮치던 순간 잡고 있던 고삐를 놓고 제 머리를 감싸던 팔이 생각나 울컥 눈물이 솟았다.

‘정신 차려야지.’

캐슬린은 그를 눕혀 놓고 주변을 멀리 둘러보았다. 다행히 동굴이 보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저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남자를 저곳까지 데려갈 수는 없었다. 들것도 없을뿐더러 있다고 쳐도 혼자서 들어 올릴 힘이 없었다.

고민하던 캐슬린은 일단 일어섰다.

“여기 계세요. 곧 올게요.”

그녀는 발이 푹푹 파이는 눈밭을 헤치고 동굴로 향했다.

‘하나, 둘, 셋…….’

알렉시스가 누워 있는 곳에서부터 대략 3천 걸음쯤 걸었을 때 동굴 앞에 도착했다. 안은 짐승이 살지는 않는 듯 비어 있었고 꽤 깊어서 찬바람이 닿지 않았다.

산에서는 해가 빨리 진다. 체온 유지를 위해서라도 그를 신속하게 옮겨야 했다.

‘내가 가진 힘이 얼리는 능력이 아니라 녹이는 능력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눈만 가득한 산에서 겨울 요정의 능력은 도움이 될 리 없었다. 허망함을 느끼며 동굴 바깥으로 나간 캐슬린은 순간 휘청했다.

빙판을 밟아서 미끄러질 뻔했다. 겨우 중심을 잡고 비켜선 그녀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

눈이 다시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단 시도는 해봐야 했다. 캐슬린은 알렉시스의 곁으로 돌아가 심호흡했다.

“제발.”

늘 가슴 졸이며 숨기기만 했던 힘이었다. 이번만큼 크게 발휘해 보기도 처음이었다. 간절함을 담아, 캐슬린은 알렉시스의 발끝에서부터 동굴 입구까지 이어지는 제 발자국을 따라 눈을 얼렸다.

-콰지직.

묵직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눈 덮인 땅이 얼었다. 흰 눈이 녹는가 싶더니 바로 얼며 투명하고 미끈한 빙판이 되었다.

캐슬린은 반쯤 찢긴 제 앞치마를 풀어 빙판에 깔고 그 위에 알렉시스를 낑낑거리며 들어서 눕혔다.

“조금만 참아요.”

그리고 있는 힘껏 그의 어깨를 밀었다. 알렉시스는 그대로 빙판에서 미끄러져 동굴로 향했다.

“헉, 헉.”

캐슬린은 이를 악물고 그를 따라 달렸다. 그녀는 몸이 날렵한 편이었지만 빙판에서 가속도가 붙어 미끄러지는 사람을 따를 재주는 없었다. 그가 돌벽이나 나무에 부딪히기 전에만 도착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다행히 알렉시스는 동굴 안쪽까지 이어진 빙판의 끄트머리에서 멈추었고 아무 데도 부딪치지 않았다. 캐슬린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처음으로 자신의 힘에 감사했다.

그의 몸을 빙판에서 끌어내 좀 더 안쪽으로 옮겨 놓은 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긴장이 풀리자마자 아랫배가 사르르 아팠다. 배를 움켜쥐고 숨을 헐떡였다. 잠시 지나자 다시 고통이 사라졌다.

‘무거운 걸 들어서 그런 건가 봐.’

요제프는 치유력을 가진 신관인 만큼 의학에도 어느 정도 해박했다. 그가 알려 준 임신 초기 주의 사항에는 무거운 물건을 들지 말라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숙소로 돌아가면 요제프에게 말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가야. 미안해.’

일단은 알렉시스를 살리는 것이 먼저였다.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며 흔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기절한 채였다. 살갗은 차가웠고 오른쪽 어깨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렀다.

캐슬린은 동굴 안쪽을 뒤져 바짝 마른 지푸라기와 나뭇가지 조금, 부싯돌을 찾았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라 생각했는데 약초꾼이나 사냥꾼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동굴이었던 모양이다.

‘다행이야. 그러면 누군가 찾으러 오겠지.’

마을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란 뜻도 된다.

캐슬린은 알렉시스의 옆에서 능숙하게 부싯돌을 쳐서 불을 피웠다. 주방 하녀로 살았던 6년 덕에 불씨를 다루는 데는 이골이 난 몸이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찢어내 얼렸다가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다시 녹였다. 그렇게 물에 푹 적신 천 조각으로 알렉시스의 상의를 벗기고 어깨를 닦은 후, 꼭 묶었다.

그리고 다시 옷을 입히려 했지만 어려웠다. 질 좋은 붕대로 감싼 것도 아니고 솜씨도 서툰지라 싸맨 어깨가 불룩해서 소매가 끼워지질 않았다.

계속해서 시도하던 캐슬린은 결국 포기했다.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남편의 옷을 입히려다 보니 몇 번이나 껴안는 듯한 자세를 취해 기분도 이상했다.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 내가 무슨 생각을.’

억지로 헐벗은 가슴에서 시선을 뗀 캐슬린은 지푸라기를 모닥불에 더 던져 넣고 알렉시스의 혈색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생각보다 알렉시스의 상태는 빨리 호전되지 않았다. 조급해지는 마음에 몇 번이고 두 손을 모아 얼음을 만들었다가 녹여서 그의 입에 흘려 넣었다.

처음에는 입가로 흘려 버리기만 하다가 잠시 후부터는 물을 받아 마시기 시작했다. 마음이 놓였다.

캐슬린은 이제 그의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한참을 계속하니 조금씩 혈색이 돌아왔다.

“알렉시스?”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눈꺼풀이 움찔거리긴 했지만 아직 눈을 뜨진 못했다. 그래도 캐슬린은 희망을 얻었다.

‘조금만 체온이 오르면 깨어날 거야.’

색을 찾기 시작한 입술을 떨리는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따뜻했다. 그녀가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캐슬린은 그의 헐벗은 가슴에 온기를 전하기 위해 그를 안고 누웠다. 딱딱한 바닥이었지만 모닥불 옆이어서 그런지 생각만큼 춥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의 체온 또한 생각보다는 따스했다.

자신의 온기를 나눠 주려다 남편에게서 온기를 전해 받은 캐슬린의 눈꺼풀이 점점 느리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피로가 순식간에 덮쳐왔다.

‘깨어 있어야 하는데…….’

불이 언제 꺼질지 모르고 알렉시스의 상태도 살펴야 했다. 이겨 내 보려고 했지만 어느샌가 캐슬린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 * *

-알렉시스?

심해에서 들리는 듯 아련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누구지.’

저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특히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알렉시스는 자신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과장은 아니었다. 그런 눈사태 속에서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계획했던 것보다 이른 죽음에 맥이 풀렸지만 어쨌든 최악은 아니었기에 그럭저럭 받아들이려던 순간이었다.

‘캐슬린은?’

눈이 덮치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광경이 떠올라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인질로 잡아 두고 있던 그의 부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죽었을까.’

살아 있는 것의 온기를 빼앗는 힘을 가진 여자.

변경백의 딸.

황후의 끄나풀.

캐슬린 발텐.

아니, 캐슬린 윈스턴.

그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알렉시스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눈이 뜨였다.

흐린 시야는 초점이 맞춰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얼마 뒤, 그는 누군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게.”

뭐지.

눈앞에 보인 광경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죽었으리라 생각한 캐슬린이 저를 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치맛자락은 아무렇게나 찢어졌고 머리는 산발이었으며 얼굴은 숯검정이 묻어 엉망이었다.

숨소리는 안정적인 것으로 보아 잠든 것으로 보였다. 알렉시스는 그녀를 품에서 떼어 내다가 어깨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져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묶여 있었다.

‘나름대로 치료하려 애썼군.’

옆은 꺼져 가는 모닥불이 보였다. 그 주변에는 지푸라기 더미와 부싯돌도 있었다.

알렉시스는 일단 불을 더 피웠다. 주변을 보니 동굴 입구가 보였다. 이미 해는 져 있었다.

-얼음꽃 군락지는 저쪽입니다.

약초밭의 위치와 지도에 기록돼 있던 카르미네 산맥의 은신처 현황을 떠올려 봤을 때, 이곳은 대강 라일런트 자작이 가리킨 방향과 일치하는 듯했다.

산사태 탓에 눈더미가 쌓이면 길이 막혔을 수도 있고, 방향을 착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자세하게 알아보려면 해가 떠야 했지만 알렉시스는 기다릴 수 없었다. 의심받지 않고 카르미네 산맥에 올 기회는 단 한 번뿐. 게다가 예상치 못한 사고가 일어났으니 곧 사람이 올 것이다.

알렉시스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캐슬린을 내려다봤다.

그녀가 알아서는 안 되었다.

알렉시스는 조용히 일어나 발소리를 죽이고 밖으로 나갔다.

* * *

“으음.”

잠에 빠져 있던 캐슬린은 허전한 기분에 눈을 떴다. 한쪽 팔로만 안기가 힘들어 돌아누운 남편을 두 팔로 껴안았었는데, 어색한 것은 잠시였고 그러고 있으니 포근한 기분마저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알렉시스?”

그가 보이지 않아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

그리고 타오르는 모닥불 너머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다. 돌벽에 기대어 있는 그는 알 수 없는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언제 깨셨어요?”

캐슬린은 황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벌어지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으셔서 걱정했어요. 눈 속에 파묻혀 체온이 많이 떨어졌거든요. 약초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급하게 싸매 놓기만 했는데 아프지는 않으세요? 날이 밝으면 제가…….”

“캐슬린.”

다급한 마음에 두서없이 튀어나오는 말을 아무렇게나 꺼내 놓는데 알렉시스가 말허리를 잘랐다.

“방금 나를 뭐라고 불렀지?”

“네?”

캐슬린은 뜻밖의 말에 당황했다.

“제가 공작님을 다르게 불렀나요?”

“……아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탓인가 싶어 캐슬린은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뜨거웠다.

“열이 나요.”

알렉시스가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상처를 입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구는 그의 모습이 속상했다. 캐슬린은 일어나려는 그의 어깨를 눌러 다시 주저앉혔다.

“공작님께는 이런 일이 익숙하신지 몰라도 전 아니에요.”

그녀가 아는 알렉시스 발텐은 늘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앞에서, 그것도 저 때문에 상처 입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라니.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캐슬린은 한쪽 손에 얼음 결정을 맺었다가 바로 그만두었다. 동굴은 모닥불의 열기로 가득 차 있어 손은 바로 축축하게 젖었다.

캐슬린은 무릎으로 일어서서 알렉시스의 이마를 짚었다. 끓던 이마가 점차 식기 시작했다. 캐슬린은 차가운 손이 미지근해지고, 뜨거워지면 다시 그 행동을 반복했다.

팔이 저렸지만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언제까지 할 생각이지?”

알렉시스가 물었다.

“열이 더 나지 않을 때까지요.”

캐슬린이 대답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가 다른 한쪽 팔로 저린 어깨를 주무르며 몇 번이고 자신의 이마를 식히기를 고집하는 것을 쳐다만 보았다.

그러다 알렉시스는 다치지 않은 한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캐슬린의 몸이 휘청했다.

“아.”

순식간에 캐슬린은 그의 허벅지를 타고 앉는 자세가 되었다. 뒤바뀐 눈높이에 놀란 것도 잠시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져 숨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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