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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17)화 (17/110)
  • 17화

    그로부터 열흘 후, 발텐 공작저 본관 앞은 카르미네 산맥으로 떠나기 위해 준비가 한창이었다.

    “저놈은 왜 저기 있지?”

    알렉시스는 마차에 올라타려다 말고 짜증스럽게 물었다. 노집사 알스도프는 누구를 묻는 건지 몰라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밝은 연두색 머리에 흰옷을 입은 남자가 바쁘게 움직이며 짐 나르는 것을 돕고 있었다. 뭐가 좋은지 실실거리며 웃음을 흘리는 모습이 알렉시스는 영 신경에 거슬렸다.

    “아, 요제프 신관님이요. 마님께서 함께 가자 부탁하셨답니다.”

    “캐슬린이? 왜?”

    “아마도 신성력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의사가 어젯밤 급사하기라도 했나?”

    “그럴 리가요. 이번 여정에 카벨 선생도 동행하지만,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신관이 있으면 이모저모 도움은 되겠지요.”

    집사마저도 별 상관없지 않으냐는 투에 어이가 없어졌다. 쓸모없는 인원은 떼어 내 버릴까 하다가 그는 생각을 바꿨다.

    ‘차라리 데려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내가 없는 사이에 공작저를 어떻게 휘젓고 다닐지 알고.’

    정말로 황실과 델라포스 신전이 결탁한 거라면 옆에 두고 감시하는 편이 나았다.

    “잘 다녀오십시오, 각하.”

    알스도프의 배웅을 뒤로하고 알렉시스는 마차에 올라탔다.

    “오셨어요, 공작님.”

    미리 마차에 타고 있던 캐슬린이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알렉시스는 고개만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곧 마차가 출발하고, 말발굽 소리가 길게 이어지는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짐이 없군.’

    오랜만에 친정에 들르는 귀부인은 보통 화려하게 차려입기 마련인데 그녀는 상당히 소박했다. 정확한 목적지는 윈스턴 영지가 아닌 그 옆의 카르미네 산맥으로 가는 거였지만 귀환하는 길에 얼마든지 들를 수 있으니 같은 말이나 다름없었다.

    ‘하녀로 일한 6년 동안에도 친정에 간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었지.’

    결혼 전 시녀장을 불러 그녀의 근무 기록을 살펴보았던 적이 있었는데, 단 한 번도 휴가를 내고 고향에 갔다 온 적이 없었다. 친부와 그리 가까워 보이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태어나 살았던 곳에서 연락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건 의외긴 했다.

    ‘끝맺음 하나는 잘하는 성격인가 보군.’

    황후가 좋아할 성격이기는 했다. 수족으로 부리기에는 주어진 목표 하나에만 집중하는 이가 제일이었으니까.

    “어제 보내 주신 자료를 읽어 봤어요.”

    한참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캐슬린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옆에 둔 가방에서 어제 그가 알스도프를 시켜 전달한 종이 묶음을 꺼냈다.

    “카르미네 산맥 중턱에서 자라는 약초 중 냉기가 없으면 곧장 시드는 것들만 제가 관리하면 된다고 적혀 있더군요.”

    “잘 파악했군.”

    “그럼 돌아갈 땐 마차를 따로 타야겠네요.”

    “그래.”

    “그런데 왜 마차가 하나인가요?”

    알렉시스는 팔짱을 끼고 자신의 부인을 천천히 훑어봤다. 출발하자마자 이리 바로 물어 올 줄은 몰랐으니까.

    “짐마차를 타고 가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탑승용이 아닌 짐마차는 보온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얼음 결정을 만드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캐슬린은 인간이었다. 내부의 냉기와 외부의 찬 바람을 오랜 시간 견디기는 어려웠다.

    “귀환하는 길은 각자 가야 할 거다.”

    “북부에서 따로 갈 곳이 있으세요? 어디로…….”

    “그것까지 내가 알려 줄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캐슬린은 무엇인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포기한 듯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서류를 정리해 다시 넣고는 경전을 꺼내 펼쳤다. 그 뜨내기 신관이 가르쳐 주는 신학인 듯했다.

    알렉시스는 시선을 돌려 다시 창밖을 봤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수도를 벗어나 북부로 이어지는 카르미네 산맥의 끄트머리에 막 도착할 무렵 해가 졌다.

    지세가 높고 험하여 영지로도 내려지지도 않은 이곳은 황실이 소유하고 있었다. 1년 내내 찬 바람이 불어 냉해가 심한 바람에 농사도 불가능했고, 사람이 많지 않으니 상업도 발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숙소가 여기가 다란 말인가?”

    “예, 각하.”

    이번 여정의 총책임을 맡은 라일런트 자작이 냉큼 대답했다.

    “참고로 여기가 유일한 여관입니다.”

    알렉시스는 낡아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여인숙을 의심스럽게 둘러보았다. 마음에 차지는 않았지만 마을 상태를 보니 고급 여관을 찾을 수 있을 리는 만무한 듯해서 그럭저럭 하룻밤을 때우기로 했다.

    “내일 일정에 맞추어 다시 출발하지.”

    알렉시스의 말에 안도한 마부와 시종들이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여인숙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다리고 있던 주인이 그를 반겼다.

    “공작님, 이리 뵈어 영광입니다. 머무실 곳은 3층이고, 식사는 말씀대로 방에 올려 드렸으니 따로 필요하신 것은 말씀 주십시오.”

    “알았다.”

    그는 열쇠를 받아 들다가 막 안으로 들어서는 캐슬린을 발견했다.

    “공작 부인께서 필요하신 것은 제 마누라에게 부탁하시면 됩니다.”

    주인이 그것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 알렉시스가 물었다.

    “방은 하나이냐?”

    “예?”

    “3층에 방이 하나냐고 물었다.”

    “아, 예. 두 분께서 머무실 방은 하나뿐입니다. 나머지는 너무 비좁고 또 정리가 안 되어 있어서요. 욕실도 없습니다.”

    “다른 층은?”

    “2층은 3인 1실만 있습니다. 1층에 1인실이 있긴 하지만 저희 여인숙에서 일하는 직원들 방이고, 또 욕실도 밖에 있어서 수도에서 오신 분들이 사용하시기엔 불편할 겁니다. 그런데 또 오실 분이 있으십니까?”

    주인장은 공작 부부가 각방을 쓸 거라는 예상 자체를 하지 못하는 듯했다. 알렉시스는 짧게 답했다.

    “없다.”

    그녀와 한방을 쓴다면 들킬 가능성이 있었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알렉시스는 가까이 다가온 캐슬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조금 놀라는 듯하더니 제 손을 잡았다. 그는 3층에 다다라 아무도 보는 눈이 없게 되자 손을 놓고 앞서 걸었다.

    다행히 방은 나름대로 깔끔하고 넓었으나 문제는 침대였다. 퀸사이즈이긴 하지만 두 사람이 떨어져 눕기에는 무리가 있는 크기였다.

    “쉬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니.”

    알렉시스는 겉옷을 벗어 걸어 두고, 라일런트 자작의 방에 가려고 일어났다.

    “저기.”

    하지만 캐슬린이 저를 붙잡았다.

    “불편하시면 제가 나갈게요.”

    “…….”

    “아니면 의자에서 자도 되고요. 불편하게 자는 데엔 이골이 나서 괜찮아요.”

    “쓸데없는 소리 마.”

    알렉시스는 기가 차서 말했다.

    “공작 부인이 냉대받는다는 소리가 듣고 싶은 건 아니겠지.”

    “하지만 제가 여기 있으면 공작님께서 나가실 거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가 듣는 곳에서 라일런트 자작을 불러 약에 관해 이야기할 순 없었으니까.

    “나는 갈 곳이 있지만 넌 아니니 하는 말이다.”

    캐슬린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연한 하늘빛 눈동자가 조금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그녀가 등을 돌렸다.

    “네, 알았어요. 쉬고 있을게요.”

    그러고선 욕실로 사라졌다. 목욕이라도 하려는지 물소리가 거세게 들렸다.

    알렉시스는 별생각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 자정 즈음 다시 돌아왔을 때, 캐슬린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 덮인 천을 걷어 보니 식사는 거의 그대로였다. 크림을 넣어 만든 수프만 그릇을 비웠을 뿐, 훈제한 연어와 청어로 만든 요리는 대부분 건드리지도 않았다.

    의아하긴 했지만 늘 같던 환경이 갑자기 바뀌면 입맛이 없어지는 사람들은 많았다. 알렉시스는 천을 다시 덮고 옷을 갈아입었다.

    침대에 돌아누워 잠든 그의 부인은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한 침대를 쓰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왜 그리 긴장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알렉시스는 저도 모르게 등 뒤를 의식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 * *

    이른 아침부터 마차는 다시 출발했다.

    발텐 공작 부부와 라일런트 자작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모두 여인숙에서 대기했고, 산맥 중턱쯤에서 호프웰 백작 측에서 파견한 짐꾼과 약초꾼이 합류했다.

    “몇몇 귀한 약초들은 사람의 온기가 닿는 순간 시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보통 얼린 손수건을 손에 감고 채취하는데, 최근에는 날씨가 더 추워지는 바람에 채취하다가 동상에 걸리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약초꾼이 설명했다. 캐슬린은 끼고 있던 실크 장갑을 벗으며 답했다.

    “어떤 약초인지 알려 주게.”

    “이쪽입니다.”

    선선한 공작 부인의 태도에 약초꾼은 반색하며 그녀를 안내했다. 라일런트 자작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말했다.

    “어젯밤에는 별일 없으셨습니까?”

    알렉시스는 움츠리고 누워 있었던 캐슬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녀는 일찌감치 옷을 차려입고 내려간 상태였다.

    “없었다. 아직은 날짜가 아니니.”

    “방심하셔선 안 됩니다. 각하의 상태가 늘 안정적인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이곳까지 따라오지 않았나.”

    팔짱을 끼고 있던 알렉시스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 꽃이 이 근방에서 핀다는 건 확실해?”

    “예. 어젯밤 보고드리기 전에 여인숙 주인에게 슬쩍 물어봤는데 소문대로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꽃을 취한 사람은 없다더군요.”

    “일단 가져가 보면 알겠지.”

    “그럼 마님께서 약초 채취를 돕는 것을 살펴보시다가 슬쩍 빠지시지요. 저는 호프웰 쪽의 사람들이 마님과 접촉하는지 감시하겠습니다.”

    “알았다.”

    알렉시스는 선선히 답하며 반짝이는 은빛 머리칼이 눈보라에 휘날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사나운 바람 탓인지 그녀의 뺨이 새빨갛게 얼어 있었다.

    ‘감기라도 걸릴 셈인가?’

    예전부터 사냥해 왔던 표범 가죽이 산더미로 쌓여 있을 텐데 창고에 쌓아만 둔 건지 하나도 몸에 걸친 게 없었다.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병에 걸려 앓아누우려고 저러는 건가 싶었다.

    ‘내가 왜 이런 데 신경을 쓰는 거지.’

    황후의 첩자일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신경이 쓰이는 것이 거슬렸다. 알렉시스는 애써 옆에 묶어 두었던 말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갑자기 떠들썩하게 흥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아! 마님, 대단하십니다.”

    “뿌리째 채취에 성공한 경우는 처음 봅니다!”

    “이걸 그대로 가져가면 금화 열 자루는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아, 지금 돈이 문제인가? 아마 임시 치료소에 몰려든 사람들의 병을 다 고칠 수도 있을걸!”

    시선을 돌려 보니 우락부락한 약초꾼들에게 둘러싸여 캐슬린은 머리끝만 보였다. 약초 채취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저쪽으로 가 보시지요, 마님. 저기엔 예민한 약초들이 한데 모여 자라는데 사람 손이 스치기만 해도 시들지 뭡니까. 눈밭에 손을 한참 동안 묻어 뒀다가 만졌는데도 그러더라니까요.”

    “맞습니다! 그래서 발견하고서도 입맛만 다시면서 뽑지를 못했지요.”

    “마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잔뜩 흥분해서는 공주를 따라다니는 호위병들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는 꼴이 볼썽사나웠다.

    나무에 묶어 둔 고삐를 풀려다 말고 캐슬린 쪽만 쳐다보고 있자 라일런트 자작이 물었다.

    “각하, 왜 그러십니까?”

    알렉시스는 왜 이렇게 자신이 쓸데없는 데에 미적거리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약초꾼 중 캐슬린과 가까이 접촉하는 놈이 있으면 따로 보고 올려.”

    “예?”

    “내통자일 가능성도 있지 않나.”

    “아, 예…….”

    라일런트 자작은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한쪽을 가리켰다.

    “얼음꽃 군락지는 저쪽입니다, 각하.”

    캐슬린이 약초를 살펴보는 길을 스쳐 지나가는 쪽이었다. 알렉시스는 대답 없이 말을 끌어냈다.

    “공작님?”

    그를 발견한 캐슬린이 몸을 일으켰다.

    “일이 있어 먼저 내려가지. 라일런트 자작이 호위할 거야.”

    “아, 네. 알았어요.”

    끼고 있었던 실크 장갑은 벗은 지 오래였고 치맛자락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으며 한 손에 든 바구니엔 약초가 가득했다. 하는 시늉만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음에도 의욕이 대단했다.

    “왜 그리 열심이지?”

    그래서 알렉시스는 마음이 더 불편했다.

    “네?”

    연신 곱아든 손을 주무르면서도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게, 제가 주겠다 말했던 보상 때문인지 황후 때문인지 파악할 수가 없어서.

    저번처럼 또 돌아봐 달라느니 그런 말을 하려는 거라면 그만두라고 하려는데, 가슴에 찌르르한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게 무슨 말씀…….”

    답이 없는 알렉시스를 보며 의아한 듯 캐슬린이 물어 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눈보라가 강하게 몰아쳤다.

    “아!”

    거센 바람에 그녀가 바구니를 놓치고 그것을 잡으려 애타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우르릉!

    어디선가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눈이 가득 쌓인 골짜기가 무너지고 있었다.

    “사, 산사태입니다! 각하, 어서 이쪽으로!”

    반대편에 있던 라일런트 자작의 외침과 함께 약초꾼들이 기겁하며 우왕좌왕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각하! 어서 말을 타십시오!”

    그러나 알렉시스는 고삐를 놓고 반사적으로 달려가 캐슬린의 팔을 잡아챘다. 힘없이 끌려오는 작은 몸을 감싸 안자마자 순식간에 눈이 쏟아져 내렸다.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덮치며 숨이 막혔다. 알렉시스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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