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16)화 (16/110)
  • 16화

    여기서 죽은 유모와 호프웰 백작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유모의 연인은 황후의 기사였고 호프웰 백작이 데려온 이사벨라는 황후의 예비 며느리였으니까.

    ‘모두 황후가 중심에 있어.’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만 같았다.

    “저번에 그렇게 가 버려서 어쩌나 했는데 여기서 다 보네.”

    묘하게 웃는 이사벨라의 얼굴이 즐거워 보였다.

    “나야말로 너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어.”

    캐슬린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니?”

    그 말에 이사벨라의 표정이 약간 허물어졌다. 그가 함께 오지 않았다는 방증이었다. 그 모습에 캐슬린은 페터의 말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결혼은 하지 않을 겁니다.

    이사벨라가 황후궁에 머문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 약혼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이유는 페터의 거부 때문인 듯했다.

    “전하께서는 갑자기 일이 생기셔서 제가 윈스턴 영애를 에스코트했습니다.”

    호프웰 백작이 끼어들었다.

    “무척이나 아쉬워하시면서 제게 몇 번이나 윈스턴 영애를 부탁하셨죠.”

    “전하께서는 아직 사교계 참석보다 학문 정진에 신경 쓰셔야 할 시기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이사벨라도 말을 덧붙였다. 다섯 살 어린 약혼자가 마치 보호해야 할 상대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말투였다.

    “그래. 다음에는 꼭 함께 뵙길 바랄게.”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자 호프웰 백작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전하께서 이 자리에 전하께서 계시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요. 그 덕에 이렇게 발텐 공작 각하께 부탁도 할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 부탁이 뭔가?”

    보아하니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려던 찰나에 제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지려는 낌새에 캐슬린은 휴게실에 더 머물다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아까 설명드렸던 카르미네 산맥의 약초와 관련해 공작 부인께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요?”

    “부인의 도움?”

    알렉시스가 의아한 얼굴로 잠깐 캐슬린을 돌아보았다.

    “의외군. 어떤 일이기에?”

    “언니에겐 모친에게 물려받은 능력이 있어요. 살아 있는 것의 온기를 빼앗아 싸늘하게 얼리는 재주죠.”

    이사벨라가 끼어들었다.

    “물론 그 능력을 조절하지 못해서 황후궁 다과회에서 실수하긴 했지만요.”

    캐슬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슴을 졸이며 숨겨 왔던 비밀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까발려진 기분이 비참했다.

    흔하지 않은 캐슬린의 외모는 모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이민족의 피 때문이라는 사실을 웬만한 사람들은 다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특히나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더욱 그랬다.

    알렉시스를 힐끗 쳐다보았으나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시다시피 카르미네 산맥에는 늘 눈보라가 치다 보니 약초도 그 환경에 적응해 자라서 수도까지 운반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어렵게 약초를 찾아도 운반 중 온도가 달라져 상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해결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소탈하게 웃는 호프웰 백작의 얼굴엔 캐슬린이 아는 무도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철저히 귀족적인 가면이었다.

    “백작의 뜻은 잘 알겠네.”

    알렉시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 제안은 승낙하기 어렵군.”

    “저, 각하. 그렇지만 약초 유통이 활성화된다면 황실에도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지진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수도로 향하는 빈민 중 병을 얻는 자들이 많아 골머리를 썩이신다 들었습니다.”

    “그래, 카르미네 산맥의 약초가 수도에 돈다면 확실히 도움이 되겠지.”

    그는 잘라 말하며 한쪽 팔로 캐슬린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부드럽게 허리를 감싸 안는 손에 그녀는 움찔했다.

    “하지만 내 부인을 고생시킬 수야 없지.”

    팔불출처럼 구는 태도에 호프웰 백작의 낯이 난처해졌다. 동시에 이사벨라의 미소에도 미세한 균열이 갔다.

    “게다가 카르미네 산맥은 접경에 가까운데 어떻게 그 먼 곳까지 부인을 보내란 말인가?”

    “카르미네 산맥은 윈스턴 영지와도 가까워요.”

    이사벨라가 끼어들었다.

    “고향 인근에 머무르는 것이 힘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윈스턴 영애.”

    알렉시스가 이사벨라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영애는 아직 약혼조차 하지 않은 미혼이라 모르겠지만 부부에게는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네?”

    “부인이 없는 동안 내가 편하리라 생각하나?”

    그의 말에 모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공개된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애정을 과시하는 공작의 모습은 귀족다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간 크게 발텐 공작에게 충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부인의 의사도 중요하고 말이지.”

    알렉시스의 말에 호프웰 백작이 캐슬린을 쳐다봤다. 승낙해 달라는 간절한 눈빛이었다.

    “글쎄요.”

    캐슬린은 한 발짝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말씀이라 시간이 필요하네요.”

    남편의 뜻이 정확히 어떤지는 몰랐지만, 이 저주 같은 능력을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이 꺼려졌다. 단칼에 잘라 말하는 것은 예법상 어긋났기에 적당히 거절의 뜻을 표하는 순간이었다.

    “저런, 아쉬워라. 그랬다간 언니의 능력이 묻히고 말 텐데요.”

    그러나 이사벨라는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캐슬린의 치부를 묻어 두고만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언니의 그런 능력을 두고 저주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잖아. 그런 오해를 없앨 아주 좋은 기횐데 아쉽네.”

    캐슬린을 두고 저주받은 핏줄이라고 자주 비난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사벨라였다. 결혼 전에는 윈스턴 가문의 위신을 깎는 짓이 되니 비밀을 지켰지만, 이제는 상관없으니 입이 근질거려 미치겠는 모양이었다.

    “그건.”

    “윈스턴 영애, 그쯤 하는 것이 좋겠군.”

    이 자리에서 온갖 오명을 다 읊을 모양인 이사벨라의 말을 막으려던 순간이었다. 알렉시스가 싸늘하게 말했다.

    “곧 황실의 일원이 될 사람이 그리 입을 가볍게 놀려서 쓰나.”

    “……네?”

    “윈스턴 가의 영애로서든, 예비 황태자비로서든 그런 태도는 실격이야. 캐슬린의 일이 그리 가볍게 떠들고 다닐 일은 아니지 않나.”

    순식간에 힐난당한 이사벨라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언니를 돕고 싶은 마음에 실수했네요. 죄송합니다, 각하.”

    “사과는 내게 할 게 아니지.”

    알렉시스가 턱짓으로 캐슬린을 가리켰다. 이사벨라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미안해, 언니.”

    “비밀을 지키는 법을 좀 더 연습하는 게 좋겠다.”

    캐슬린이 짧게 답하자 알렉시스가 몸을 낮추어 다정하게 속삭였다.

    “음악이 시작되는군. 한 곡 출까?”

    “좋아요.”

    자리를 뜨자는 명백한 요청이었다. 이사벨라와 호프웰 백작의 시선이 등에 따라붙는 것을 느끼며 캐슬린은 그가 이끄는 대로 플로어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백작이 수를 쓰는군. 다른 속셈이 있는 거야.”

    “알고 계셨어요?”

    스텝을 맞추어 가볍게 턴을 돌던 캐슬린이 놀라 작게 물었다.

    “호프웰 백작과 황후 마마의 일을요.”

    “그렇지 않고서야 윈스턴 영애를 에스코트할 이유가 없지.”

    “아.”

    “넌 마치 그전부터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날카로운 알렉시스의 말에 캐슬린은 아차 했다. 제가 들어도 충분히 의심을 살 수 있는 듯한 발언이었다.

    “아니에요. 저도 방금 알았을 뿐인걸요.”

    호프웰 백작이 사실은 당신을 죽이고 공작 위를 빼앗을 사람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말해 보았자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호프웰 백작은 빈민 구제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는 편이어서 평판이 아주 좋았다. 아까의 약초 이야기도 그 방면의 이야기인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공작님께서 약초에도 관심이 많으셨을 줄은 몰랐어요.”

    “내가? 그럴 리가.”

    “아니면 빈민 구제 사업인가요?”

    “둘 다 관심 없어.”

    빠르고 경쾌한 선율에 맞추어 그녀의 허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놓는 동작을 하며 알렉시스가 말했다.

    “그건 황실의 의무지.”

    “네…… 그렇죠. 그럼 호프웰 백작이 다시 청하면 확실히 거절의 뜻을 보낼게요.”

    “아니.”

    손끝을 잡고 캐슬린을 가까이 끌어당긴 알렉시스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적당히 시간을 끌다 승낙하는 편이 좋겠어.”

    “승낙이요?”

    “그래. 대신 대외적으로는 윈스턴 영지를 방문하러 간다고 하는 편이 낫겠지.”

    캐슬린은 느리게 눈썹을 깜빡였다.

    “백작의 요청이 네 능력으로는 하기 힘든 일인가?”

    알렉시스가 물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캐슬린은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공작님께선 아무렇지 않으세요?”

    “뭐가?”

    “이사벨라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에요. 제겐 그런 저주 같은 능력이 있는데…… 아직 잘 조절하지 못해서 저번에 황궁에 들렀을 때 사고가 있었어요.”

    공작저에서는 잘 숨겨 왔던 일이라 알렉시스는 알 리가 없었다. 황후의 수족이라 의심될 만한 사람에게서 부인의 비밀을 들었는데도 평온한 그의 태도가 이해되질 않았다.

    “숨겨서 죄송해요.”

    그러나 알렉시스는 별 상관 없다는 얼굴이었다.

    “황후의 찻잔을 깨 버린 일이 내게 기분 나쁠 일은 아닌데.”

    “알고 계셨어요?”

    “공작저에 황후의 귀가 있듯 황궁에도 내 귀가 있는 법이거든.”

    “그러셨군요…….”

    “아무튼 호프웰 백작의 제안은 승낙하도록 해.”

    먼 카르미네 산맥까지 갔다 오라는 이유가, 혹시 그사이에 공작저에 다른 사람을 들이기 위해서냐고 물을 뻔했다.

    하지만 캐슬린은 가까스로 그 말을 삼켰다.

    “험한 길일 테니 준비는 철저히 해야겠군.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떠나지.”

    북부는 대체로 지형이 평탄하지 않았다. 임신 초기엔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이 떠올라서 망설여졌다.

    “저는 따로 일정이 없어요. 하지만 홀로 가기에는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점이 많아서 바로 떠나기는 무리예요.”

    “내 일정을 취소하겠다고 말한 거다.”

    “같이 가신다는 말씀이세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마침 음악이 끝났다.

    그가 무릎을 굽혀 인사를 하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

    “카르미네 산맥 근방에 마침 볼일이 있었거든. 좋은 핑계가 될 듯해서 말이야.”

    역시.

    저를 걱정해서 해 주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이번에도 제가 그에게 도구로 필요해서 건넨 말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뜻밖의 말을 했다.

    “다만 이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면 네가 원하는 것 하나를 들어주지.”

    “정말이세요?”

    애초의 계약 조건에는 이런 식의 보상은 없었다. 캐슬린은 그가 억지로 등을 떠밀어 보낸다 해도 대가 없이 카르미네 산맥으로 떠나야 할 처지였다.

    “그래. 무엇이든.”

    무감한 얼굴로 저를 기다리는 남편을, 캐슬린은 떨리는 손으로 맞잡았다.

    “약속하신 거예요.”

    “나더러 죽어 달라든가 이혼해 달라는 것 외에는 얼마든지 들어주지.”

    그 말을 끝으로 알렉시스가 손짓하자 발텐 공작 부부의 퇴장 소식이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공작저로 돌아가는 중에도 캐슬린은 뜻밖의 희망을 품어 들뜬 가슴을 눌러야 했다.

    ‘아이를 자식으로 받아 달라고 부탁해야지.’

    약속을 빌미로 말을 꺼내면 처음에는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결국 아이를 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희망 하나에 떠나왔던 북부로 다시 돌아갈 결심을 했다.

    캐슬린은 아직 평평한 아랫배를 살짝 쓰다듬어 보았다. 깜깜한 창밖만 내다보는 알렉시스의 시선은 공작저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닿는 법이 없었으나, 그래도 괜찮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