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캐슬린은 아이가 저와 달리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부인께서 모임에 참석하시는 동안 저는 몸에 좋은 약초를 찾아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고마워요.”
캐슬린은 서둘러 본관으로 돌아갔다. 드레스룸으로 막 들어서자 이미 준비를 마친 에밀리가 드레스 여러 벌을 가져오며 재잘거렸다.
“야회라니, 주인님께서 참석하겠다고 하실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마님과 함께요!”
“나도 갑작스레 전해 들었어. 시간이 없으니 간단하게 입고 갈게. 허리 너무 조이지 않는 걸로 골라 주고.”
“하지만 치맛단이 풍성한 드레스를 입으시려면 어쩔 수 없는걸요. 최신 유행을 따라야…….”
“셔링만 잡힌 걸로 줘.”
귀부인들이라면 격식 있는 자리에선 누구나 가느다란 허리를 강조하기 위해 조이는 드레스를 입었다. 캐슬린도 예법은 잘 알고 있었지만, 아이를 생각하니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막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캐슬린은 비교적 편안한 차림의 반짝이는 은색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섰다.
마차는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채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타며 곁눈질한 캐슬린은 확신했다.
‘저번 달에 맞춘 옷이네.’
그녀의 남편은 황실 핏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꼭 참석해야 하는 파티가 아니면 사교계 모임에 참석한 적이 거의 없어 마땅한 연미복도 몇 없었다. 캐슬린은 그것이 못내 안타까워 유명한 의상실 디자이너를 불러 연미복을 여러 벌 맞췄다.
알렉시스는 알 리 없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연회장에 들어가면 내 옆에 붙어 있도록 해.”
침묵이 이어지던 중 그가 말했다.
“트리벨리언에서 남 이야기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죄다 거기 모여 있을 테니.”
“네. 책 잡히지 않도록 할게요.”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창문 밖 하늘이 점점 까맣게 물들고 있었다.
어느덧 마차가 멈추고 경쾌한 음악 연주와 함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시스는 먼저 문을 열고 내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캐슬린은 조심스럽게 그 손을 맞잡고 내리며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공작저에서와는 달리 꿀처럼 달콤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완벽한 가면이었다.
“발텐 공작 부부 드십니다.”
1층에 마련된 연회장까지는 순식간이었지만 마주치는 사람들은 많았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은 다정하게 캐슬린과 팔짱을 낀 알렉시스를 보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사실이 못내 씁쓸하면서도 캐슬린은 아쉬웠다.
“각하. 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야회의 주최자답게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롤링스 후작 부인이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물론 캐슬린을 향해서는 아니었다.
“각하께서 참석해 주시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답니다.”
“후작 부인께서 이리 기대하시는 줄 알았다면 진작 걸음할 것을 그랬군요. 내 부인이 부탁하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하…… 부인께서 먼저 함께 오자고 말씀하셨군요?”
롤링스 후작 부인은 애매하게 말꼬리를 늘이면서 캐슬린 쪽을 돌아보았다. 찰나의 시간 동안 그녀의 시선이 캐슬린이 입은 드레스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능숙하게 캐슬린에게 말을 건넸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전에 티파티에서는 뵙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렇게라도 얼굴을 뵈니 반갑네요.”
“네, 저도 그래요. 다음에는 제가 공작저에 부인을 초대하지요. 그때 참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요.”
“어머. 친절하기도 하셔라.”
깃털 부채를 팔랑이며 입가를 가리는 모습에는 마땅찮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캐슬린도 진심은 아니었기에, 대강 인사하고는 알렉시스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뗐다.
“저기로 가지.”
알렉시스가 다른 이들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인사하면서 캐슬린에게만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떨거지들에게 시간 낭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그의 발길이 향하는 곳에는 성대한 야회의 이름에 걸맞게 파티 음식이 차려진 오크 테이블이 있었다.
참석자 대부분이 식사를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닌 만큼 자리는 비어 있었다. 알렉시스는 의자를 빼 캐슬린이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들의 눈길이 자연스레 테이블로 쏠렸다. 부채를 팔랑이며 애써 이쪽을 보지 않는 척하려는 영애들은 물론이고 연줄을 잡아 보려는 젊은 영식이나, 사업의 파트너를 찾으려는 중년 귀족들 역시 발텐 공작 부부에게 온통 시선을 쏟고 있었다.
“식사는 아직이겠지?”
알렉시스가 물었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편처럼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심이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캐슬린은 어쩐지 멍해져서 대답했다.
“아, 네. 갑작스럽게 외출 준비를 하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그럴 줄 알았지.”
이리저리 틈을 재 보다가 알렉시스가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판단했는지 몇몇 귀족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도 그것을 아는 듯했다. 느릿하게 테이블 위를 훑던 시선이 색감이 예쁜 푸른 접시 위에 멈추었다.
“이번에 롤링스 가의 음식 솜씨를 한번 알아보는 것도 좋겠는데.”
그가 접시로 손을 뻗었다. 귀족들이 더 가까워졌다.
“부인이 좋아하는 음식이군. 하나 들어.”
캐슬린은 그가 제 쪽으로 밀어 준 접시의 음식을 보고 굳었다.
연어 카나페.
신선한 주홍빛이 눈에 들어온 순간 속이 메스꺼워졌다.
입덧이었다.
“왜 그러지?”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의문이 묻어 있었다.
“발텐 공작 각하.”
귀족들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모두가 보고 있었다. 발텐 공작이 발텐 공작 부인에게 음식을 권하는 모습을.
지척에 있는 귀족들은 그가 하는 말도 들었을 것이다. 하녀 출신인 것도 눈감고 결혼할 만큼 세기의 사랑을 한 공작이 실은 부인의 취향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좋지 않은 소문이 돌 것이 분명했다.
캐슬린은 심호흡을 하며 속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배고플 텐데. 자, 내가 먹여 주지.”
그러나 알렉시스는 연극을 얼렁뚱땅 마무리 지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는 카나페를 하나 집어 들고 제게 권했다.
가까이 다가온 연어 향에 또다시 속이 뒤집히려 했다.
캐슬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피해 버렸다.
그리고 재빨리 알렉시스의 어깨 쪽을 털어 내며 말했다.
“잠깐만요. 공작님 옷에 뭐가 묻어서요.”
다행히 다른 사람들이 서 있는 쪽은 알렉시스의 반대쪽이었기 때문에, 캐슬린이 깨끗한 옷을 털어 내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태연한 척하며 그를 바라보는 캐슬린의 심장이 콩콩거렸다.
그녀를 향해 미소 짓는 입술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제가 담겨 있는 황금빛 눈동자에는 미처 사라지지 못한 차가움이 보였다.
“부인은 언제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손길로 연어 카나페를 내려놓은 알렉시스가 감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나를 먼저 챙기는군.”
주위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한 목소리였다. 완벽한 쇼윈도 부부 연기였다.
“하하, 결혼한 지 1년이 넘으셨는데 아직도 사이가 돈독하시군요.”
기회를 엿보던 중년의 귀족이 다른 사람들을 다 밀치고 다가오더니 능청스럽게 말을 건넸다. 알렉시스가 웃으며 일어나 악수를 권했다.
“호프웰 백작. 오랜만이야.”
호프웰?
그 이름에, 알렉시스를 따라 일어나려던 캐슬린은 팔꿈치로 샴페인이 담긴 유리잔을 치고 말았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크리스털 잔이 산산조각이 났다. 덕분에 상큼한 포도 향이 훅 퍼져 캐슬린의 울렁거리는 속은 진정되었으나 더 큰 문제가 생겨 버리고 말았다.
“피해 있어.”
알렉시스가 한쪽 팔로 그녀를 감싸 끌어당기며 시종을 불렀다. 그 사이에 그녀는 호프웰 공작, 아니 백작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부인, 1년 만입니다. 결혼식 때도 정신이 없어 인사를 제대로 나누지 못했는데, 저희가 이리 말을 나누는 건 처음이지요?”
“……네, 백작님. 그러네요. 반갑습니다.”
캐슬린은 가까스로 웃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하지만 그의 살갗이 손바닥에 닿았을 때는 증오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뻔뻔한 작자.’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캐슬린은 무의식적으로 드레스 자락에 손을 닦았다.
“각하와 이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오늘 참으로 운이 좋군요.”
“그리 말할 것까지야. 언제든 공작저로 찾아오시면 될 텐데.”
“각하께서는 영지 관리만 해도 바쁘신데 방해할 순 없지요.”
그러면서도 본격적으로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은 눈치였다. 캐슬린은 눈치껏 말을 꺼냈다.
“신사분들께서 회포를 푸시는 동안, 저는 잠깐 휴게실에 들렀다 오겠습니다.”
“다치진 않았겠지?”
“네. 걱정하지 마세요.”
여전히 가면을 쓴 남편을 향해 마주 웃어 주고는 천천히 자리를 떴다. 몇 발짝 떼다 말고 흘깃 돌아보니 알렉시스는 호프웰 백작과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씁쓸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하지만 지금 남편에게 필요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그일 터.
‘당신을 죽인 사람인 줄도 모르고.’
꿈처럼 지나가 버린 과거. 그러나 캐슬린에게는 잊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 * *
휴게실에서 나오며 캐슬린은 아직도 생생한 그 날 밤을 떠올렸다.
‘다른 방법이 있는 줄 알았다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미약을 몸에서 배출하는 해결책은 한 가지밖에 몰랐기 때문에 캐슬린은 그와 밤을 보냈고, 결국 발텐 공작의 부인이 되었다.
‘왜 접근했을까.’
모르는 척하고 싶었지만 마음이 불안했다. 죽음에서 돌아온 이후 뜻밖의 결혼을 했고, 캐슬린은 내내 유모를 주목했다.
당시엔 유모가 뒤를 봐주기로 한 ‘그분’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호프웰 백작이 과거에 알렉시스를 죽였다는 사실만으로 증거도 없이 그를 범인이라 주장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알렉시스가 황후와의 내통 증거를 잡아 유모를 벌할 때까지 호프웰 백작은 움직이지 않았다.
‘유모와 황후, 호프웰 백작은 서로 다른 쪽에 서 있었던 걸까?’
저와 에밀리가 죽지 않은 것처럼 호프웰 백작의 삶도 달라질 수 있다고 여기기는 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긴장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캐슬린.”
그녀가 돌아온 것을 발견한 알렉시스가 저를 돌아보았다. 호프웰 백작도 크게 반색하며 손짓했다.
“어서 이리로 오시지요, 부인.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소개요? 어떤…….”
“이번 제 파트너입니다.”
그가 뒤로 비켜나자 화려한 보랏빛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보였다. 캐슬린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언니, 안녕.”
이사벨라 윈스턴.
그녀의 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