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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13)화 (13/110)
  • 13화

    알렉은 저도 모르게 여자의 뒤로 숨었다. 그러나 달려 나온 시녀장이 거친 손길로 그를 잡아끌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곧장 치우겠습니다!”

    “저 여자는 누구냐?”

    한 시녀가 귓가에 빠르게 속삭였다. 황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천박하군. 백작에게 데려다줘라.”

    “예. 저 애는 감옥에 다시 넣겠습니다.”

    “아니, 데리고 들어와.”

    황후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알렉은 겁에 질려 여자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 역시 시녀들에게 끌려가는 중이었다. 알렉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무어라 말했다.

    ‘친구.’

    알렉은 입술 모양으로 그녀의 말 중 그 단어만을 읽어 냈다. 그러나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배 속 아이와 친구가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라는 뜻이었다.

    “교활한 놈. 지하 감옥을 뛰쳐나와?”

    팔을 붙든 시녀장이 중얼거렸다.

    “네 명을 재촉하는 게지.”

    알렉은 시녀장이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을까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어느새 저를 에워싼 시녀들이 그의 사방을 가리고 있었다.

    “꿇어라.”

    어느 방으로 끌려간 알렉은 거칠게 내던져졌다. 그는 덜덜 떨면서 황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후는 손짓해서 시녀장에게 무언가를 가져오라 시켰다.

    그녀는 검은 액체가 든 병을 가져왔다.

    “마셔라.”

    “이, 이게 뭔데요?”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알렉은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시녀들이 달려들어 두 팔을 잡고 놔주질 않았다.

    “이거 놔요!”

    “닥치고 마셔! 버러지 같은 자식. 천한 피는 못 속이는 게지. 네 처지엔 그 독이 딱이다.”

    “우웁!”

    억지로 벌린 입에 진득한 액체가 쏟아져 들어왔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의 맛이 역했다.

    시녀들에게 잡힌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녀장은 기어코 병이 텅 빌 때까지 알렉의 입에 약을 부었다. 그제야 황후의 얼굴에 웃음이 서렸다.

    시야가 점차 흐려지면서 뜨거운 기운은 온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알렉은 쓰러지는 중에도 그 웃음을 봤다.

    ‘엄마…….’

    알렉은 스르르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면 옆에서 엄마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기를 바라면서.

    * * *

    ‘쓸데없는 꿈을 꿨군.’

    알렉시스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갑자기 정신을 잃는 바람에 밖에 쓰러진 듯했다. 다행히 제가 누워 있는 동안 비가 오지는 않은 듯했다. 그랬다면 꼼짝없이 객사할 뻔했다.

    팔다리를 주무르니 얼마 안 있어 감각이 돌아왔다. 여섯 살부터 10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마셔서인지 증상이 심각했다. 온갖 치료를 동원하니 조금씩 나아지기는 해도, 완전 해독은 불가능했다.

    ‘내 처지엔 이 독이 알맞다고 했었지.’

    꿈에서 들어서 그런지 황후의 말이 생생했다. 헛웃음이 났다.

    어쩌면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죽여 버릴 생각에서 먹인 독이지만 결국은 전쟁터에서 살인귀가 되는 데 도움이 되었으니까.

    그는 얌전하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말을 찾아내서 올라탔다. 공작저로 귀환하는 데까진 금방이었다.

    본관 입구에서는 노집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각하. 일찍 돌아오셨습니다.”

    알스도프는 미리 준비한 수건을 알렉시스에게 건네며 말했다.

    “예상보다 일찍 끝나더군.”

    “새로 시도한 중독 치료가 효과를 보인 걸까요?”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아.”

    오히려 그 재수 없는 꿈이 도움 된 거라면 모를까.

    “저, 마님께서 걱정 많이 하셨습니다. 거짓으로라도 일이 있으셨다 말씀드릴까요?”

    알스도프가 물었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동선을 말했다가 사실이 아니란 걸 들키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지?”

    “하지만.”

    “그쯤 해 둬.”

    독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날뛸 때면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날이 여럿이었다. 그때마다 변명할 순 없었다.

    알렉시스는 수건으로 대충 온몸에 뒤덮인 흙먼지를 떨어냈다. 보송하게 마른 수건에서는 은은한 라임 향이 났다.

    ‘담당 하녀가 바뀌었나.’

    그는 세탁물이야 청결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뿐 향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쓰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트러스 계열의 향을 선호하기는 했다. 굳이 말한 적은 없는데 알아서 챙긴 것이 마음에 들었다.

    “바로 쉬실 수 있게 목욕물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각 없어.”

    언제나처럼 저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피는 노집사의 모습에, 알렉시스는 발걸음을 돌려 침실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 했다.

    귓가에 들려온 즐거운 웃음소리만 아니었더라면.

    “뭐지?”

    알스도프가 황급히 말했다.

    “아, 마님께서 식사하고 계십니다.”

    “한 사람이 아닌 듯한데.”

    분명 남녀가 섞인 소리였다. 알스도프가 난처한 얼굴을 하는 것을 보니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알렉시스는 다시 계단을 내려와 식당 쪽으로 향했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러면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앗.”

    약간 열려 있던 식당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그는 안에서 뛰어나오던 누군가와 부딪쳤다.

    “아, 죄송합니다. 제대로 보고 다녔어야 하는데 부주의했네요.”

    연두색 머리칼을 가진 젊은 남자가 멋쩍어하며 사과를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누구지?”

    미리 통보한 바 없이 외부인이 이 늦은 시간까지 공작저에 머무는 것도 불쾌한데, 집주인을 알아보지도 못한다니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공작님.”

    뒤늦게 저를 발견한 캐슬린이 황급히 다가와 말했다.

    “지금 돌아오셨나요? 귀환 일자를 들은 바 없어 미리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둘이 같이 있었단 말이었다.

    그녀가 집에 손님을 초대한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공작 부인으로서 무도회를 열거나 티파티를 주관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 다분히 사적인 모임을 공작저 내에서 연 적은 없었다.

    그것도 낯선 남자와.

    “형님. 이제 오셨군요?”

    거기다 식당 안쪽에서 그의 이복동생도 등장했다.

    ‘셋이었군.’

    이마가 지끈거렸다. 맞지 않는 조합 셋의 모습에 신경이 곤두서고 있었다.

    “이 사람은 델라포스 신전의 요제프 신관입니다.”

    “신관?”

    웬일로 신관이 공작저에 방문했단 말인가?

    알렉시스가 대놓고 저를 훑어보자 멋쩍어진 요제프가 예를 차려 뒤늦은 인사를 했다.

    “이곳의 주인이신 발텐 공작 각하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델라포스에서 신을 모시는 종 요제프라고 합니다.”

    “신의 종을 내 집에서 볼 줄은 몰랐는데.”

    “아, 오늘로 귀댁에서 몸을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손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모습에 기가 막혔다.

    “의탁? 누구 마음대로?”

    “제가 부탁했습니다, 형님.”

    페터가 끼어들었다.

    “아직 젊은 신관이라 수행을 위해서는 바깥세상을 좀 더 경험할 필요가 있을 듯해서요. 어찌 됐든 델라포스 신전은 황실에서도 신경 써야 하는 곳 중 하나가 아닙니까?”

    “그럼 황실로 데려갈 것이지 왜 발텐에 머물게 한 거지?”

    황태자가 공작저에 드나드는 것도 불쾌하기 그지없지만 눈감아 주었다. 그랬는데 이제는 객식구까지 끌어들이다니.

    “형수님께도 그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어떤 대답이 나오든 월권의 책임을 물어 쫓아낼 심산이었다. 한데 그의 동생이 한 말은 뜻밖이었다.

    게다가 캐슬린이 큰 눈을 깜빡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전의 가르침을 배워 보고 싶었어요. 경전으로 혼자 공부하는 것은 아무래도 힘에 부쳐서요. 안 되나요?”

    그가 부인에게 주기로 한 대귀족의 권리에는 신전의 가르침을 받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귀족이라면 갖춰야 할 교양 중의 하나였으니 신관에게 직접 배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마음대로 해. 상관하지 않을 테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한 알렉시스는 상관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돌아섰다. 층계를 오르는 등 뒤로 안도의 한숨을 쉬는 기색이 느껴졌다.

    “부인, 그럼 얼른 가서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소곤거리듯 주고받는 대화에 신경이 온통 아래층으로 쏠리는 것만 같았다. 알렉시스는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침실로 올라가 문을 닫았다.

    딱 보아도 신관으로 임명받은 지 한두 해 정도밖에 안 돼 보였다. 스물서넛쯤 되었으려나.

    공작저에 머물게 된 젊은 신관이 캐슬린과 또래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더 어이가 없어졌다.

    ‘애송이 같은 놈에게 무슨 가르침을 받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그러나 공작 부인이 경전을 얼마나 심도 있게 공부하는지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으므로, 알렉시스는 곧 신경을 꺼 버렸다.

    * * *

    하지만 요제프가 신경을 거스르는 것은 그날 하루로 그치지 않았다.

    예상보다 일찍 귀환한 탓에 공작저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는 황당한 일을 겪어야만 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추천하는 방향은…… 어, 발텐 공작 각하. 안녕하십니까?”

    알렉시스는 그의 부인과 애송이 신관이 꽤 자주 붙어 있는 것을 목격했는데,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책을 보며 무엇인가를 속닥거리다가도 제가 멀리서라도 보이는 것을 보면 입을 다물거나 말을 돌리기 일쑤였다.

    특히나 캐슬린은 더 그랬다.

    알렉시스는 바짝 얼어붙어 있는 그의 부인을 훑어보고 스쳐 지나갔다. 정원의 테이블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경전과 종이 뭉치, 깃펜뿐인데 무언가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저런 표정을 지으니 찝찝하면서도 불쾌했다.

    ‘죄라도 지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군.’

    분명 뭔가를 숨기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알렉시스는 티도 나지 않을 만큼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산책을 그만두고 본관으로 돌아갔다. 알스도프가 조용히 보고했다.

    “각하, 라일런트 자작이 도착했습니다.”

    “들이라고 해.”

    부관인 라일런트 자작은 그가 재정비하는 영지의 총책임을 맡고 있었다. 직접 보고를 하겠다고 요청한 것을 보면 무슨 문제가 발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그래야지.”

    짧게 답하며 그는 축조가 끝난 성의 도면을 그에게 건넸다.

    “살펴봐. 준비는 거의 끝났다.”

    “예. 각하께서 오랜 시간 준비하신 만큼 역시 흠잡을 데는 없겠지요.”

    외알박이 안경을 꺼내 들고 그 자리에서 꼼꼼하게 살피던 그는 도면을 내려놓고,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명하신 대로 조사한 결과 예상하신 것보다 지진 발생 주기가 잦아지고 있습니다. 규모도 크지 않고 발생 지역이 산발적이기는 하지만, 꽤 빈번합니다.”

    “황제가 오늘내일하는 판국이니까.”

    알렉시스는 라일런트 자작이 건넨 보고서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폐하께서 붕어하시기 전에 최대한 빨리 끝낼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아, 아직 약은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상관없어. 각 영지의 성만 차질 없이 준비해.”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마님께는 아직 지방 영지에 관해서 말씀드리지 않으신 겁니까?”

    “그래. 그녀는 믿을 수 없다.”

    “예. 그러면 저도 함구하겠습니다.”

    라일런트 자작은 도면을 챙겨 들고 나갔다. 알렉시스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황후와는 계속해서 접촉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캐슬린 발텐, 아니 캐슬린 윈스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속속들이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니. 그건 무슨 속셈으로 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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