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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12)화 (12/110)
  • 12화

    “임신이라니요. 그럴 리가 없어요.”

    페터의 말에 석 달 전의 밤이 생각났지만 애써 다시 지웠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지만 자신은 예외였다.

    “아직 주치의의 진찰도 받지 않으셨는데 벌써 부정부터 하시다뇨. 앉아 계세요. 제가 가서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아니에요. 괜히 소란 피우고 싶지 않아요.”

    캐슬린은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아 다시 앉혔다.

    “잠시 후 신전으로 출발할 텐데, 지금 주치의를 부르면 여러 사람이 곤란해질 거예요.”

    “공작가의 후계자가 탄생할지도 모르는데 지금 그게 대수입니까?”

    “제게는 그게 더 중요해요, 전하.”

    캐슬린은 씁쓸해지는 마음을 숨기며 단호하게 말했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다른 병일 거예요. 자선 모임에 참석하기 전에 그 사실이 밝혀진다면 황궁에도 말이 들어갈 텐데 그러면 수습하기 어려워져요.”

    “공작가의 주치의에게도 어머님의 손길이 뻗어 있나 보군요.”

    페터는 빠르게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어머님이 아신다면 난리가 날 테니까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차가 준비되었음을 알렸다. 캐슬린은 차만 한 모금 마시고 그대로 일어났다.

    “가시죠.”

    페터가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하지만 임신이 아닐 거라는 그녀의 말을 믿지는 않는 듯 내내 싱글벙글한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그 모습이 못 미더워 모임 내내 신경이 쓰이던 캐슬린은, 공식적인 행사 시간이 끝난 후 결국 탐탁지 않은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형수님, 잠시 만나셔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잠깐 휴게실에서 쉬고 있던 찰나, 페터가 문을 열고 들어와 말했다.

    “주치의는 믿지 못하실 테니 신전의 사람을 데려왔어요.”

    “전하. 이러실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혹 제 말이 틀렸다 해도 진찰은 받아 보셔야 할 겁니다. 속이 메스꺼운 증상은 큰 병의 징조일 수도 있어요.”

    고집을 부리는 시동생에게 캐슬린은 결국 지고 말았다. 페터는 포기한 듯한 캐슬린의 모습에 잽싸게 닫았던 문을 다시 열고 대기하던 사람을 안으로 들였다.

    연두색 머리칼을 가진 쾌활한 인상의 신관이었다.

    “안녕하세요, 부인. 진찰이 필요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신 아래 모두 평등하다는 이념 아래 열린 자선 모임은 신분을 드러내지 않게 되어 있었다. 물론 속세의 신분이 높았다거나 연륜이 있는 신관이라면, 그녀의 신분을 알아채고도 남았겠지만 이 사람은 그런 경우는 아닌 듯했다.

    ‘치유력을 갖고 있어서 신관이 되었다면 평민 출신이겠구나.’

    주섬주섬 진찰에 필요한 물건을 꺼내 펼치는 젊은 신관을 보면서 캐슬린은 생각했다.

    혹시나 큰 병이 발견된다고 해도, 15살 때 자신의 불임을 판정했던 그 신관처럼 이 남자도 돈을 주면 입을 막는 건 어렵지 않을 테니 다행이었다.

    “몸이 어떻게 불편하신지요?”

    페터가 끼어들어 말했다.

    “부인께서 아이를 가지셨는지 알아봐 주게.”

    캐슬린이 말을 정정했다.

    “요즈음 잠을 깊게 자지 못하고 몸에 열이 자주 오르는 듯한데, 잘못된 음식을 먹어서 병이 생겼는지 확인해 주게.”

    신관은 난처해하면서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 손으로 캐슬린의 이마에 손을 얹자 흰빛이 쏟아져 나왔다.

    잠시 후.

    “축하드립니다. 임신입니다.”

    신관이 들뜬 듯한 목소리로 축하를 건넸다.

    “그게 정말인가?”

    캐슬린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어떻게?’

    윈스턴 백작은 결혼 장사를 할 목적으로 그녀를 몇 번이나 의사에게 보이고, 비싼 돈을 들여 신관을 불러왔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같은 겨울 요정들이 낳은 딸이 모두 불임이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래서 여태껏 한 번도 그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는데.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부인께선 아이를 가지셨습니다. 석 달은 된 듯한데요?”

    영문을 모르는 신관은 새하얗게 질린 캐슬린과 페터를 번갈아 봤다.

    “부인께서 많이 놀라신 듯한데, 남편분께서 돌봐 주시지요. 상당히 젊은…… 음, 아니 어린 분이시지만, 그래도 이제 곧 아버지가 되실 테니까 잘 챙겨 주셔야 합니다.”

    “전 이분의 남편이 아닙니다.”

    페터는 칼같이 사실을 정정하면서도 기쁜 얼굴이었다.

    “형수님. 축하드립니다. 이 사실을 아시면 형님께서도 몹시 기뻐하실 거예요. 얼른 돌아가셔서…… 형수님?”

    “전하.”

    처참해진 얼굴로 캐슬린은 간절하게 페터를 붙잡았다.

    “도와주세요.”

    절대 이 사실을 그가 알아서는 안 된다.

    ‘그는 아이를 낳게 하지 않을 거야.’

    남편은 제가 불임이라 부인으로 맞기에 알맞은 상대였다고 했다. 황실의 대를 잇는 것에 목매는 황후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제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안다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페터가 어리둥절해하며 되물었다.

    “제발, 도와주세요. 공작님이 이 사실을 알아서는 안 돼요.”

    그랬다간 이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지킬 거야.’

    캐슬린은 울음을 삼키며 굳게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를 기필코 살려 내고 말 거라고.

    * * *

    그의 원래 이름은 알렉이었다. 엄마가 지어 준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조차도 제대로 불러 주는 이는 없었다.

    “어, 이 새끼. 또 안 처먹었네.”

    “안 먹으면 제 손해지 뭘.”

    감시병들이 낄낄거리며 낡은 그릇을 발로 차는 바람에, 구정물이 쏟아지며 알렉에게 쏟아졌다. 최대한 구석으로 몸을 붙였지만 소용없었다. 짧아진 바짓단 사이로 드러난 발목에 더러운 물이 쏟아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황후궁 지하 감옥은 해가 지면 감시가 느슨해졌다. 감시병들이 정해진 근무 시간보다 일찍 퇴근하곤 했기 때문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곳에서 자란 어린애가 탈출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알렉은 눅눅하고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 사는 게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엄만 안 죽었어. 날 두고 그럴 리 없어.’

    열병을 앓던 엄마를 감시병들이 끌고 나간 뒤로 알렉은 혼자가 되었다. 여섯 살의 소년은 어두운 밤이 무서워서 엄마를 돌려달라고 간청했지만, 돌아오는 건 조롱뿐이었다.

    -네 어미는 뒈졌어.

    -넌 여기서 평생 썩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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