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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11)화 (11/110)
  • 11화

    알렉시스의 침실에서 잠든 캐슬린은 해가 중천에 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설마 마님이…… 하며 반신반의하던 시녀들은 합방일이 아닌데도 동침한 것이 확실해 보이는 공작 부부의 사이를 보며 수군거리고들 있었다.

    “마님, 목욕물을 준비해 뒀어요.”

    왠지 모르게 흐뭇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에밀리가 캐슬린을 부축했다.

    “씻으신 후에는 바로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둘게요.”

    “공작님은?”

    일어나자마자 옆을 돌아보았지만 침대는 비어 있었다. 벗어 두었던 망토도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지만 들려온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주인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어요. 급한 일이 있다고 하시던데요.”

    어제의 일을 없던 것으로 하고 싶기라도 한 듯이 그냥 떠나 버렸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조금 울적해졌으나 캐슬린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애초에 그는 잠시 집에 들른 것뿐이고 갑작스레 붙잡은 것은 자신이었다. 캐슬린은 그 사실을 상기하며 단 한 번만이라도 여느 부부처럼 밤을 보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말씀하셨던 것들은 식사 후에 살펴보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둘게요.”

    “고마워.”

    캐슬린은 처음으로 남편의 침실에 딸린 욕실을 사용해 보았다. 보통 합방일 때는 그가 제 침실로 찾아왔었고, 다른 일로 남편의 침실에 갔을 때는 욕실을 사용할 일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부부의 사이가 예전과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이렇게 아주 사소한 것만 달라져도 캐슬린에게는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녀는 응접실로 돌아가 매달 집행하는 후원금을 검토했다.

    “이번 달에도 마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예산 중 10%를 신전에 기부하는 쪽으로 정리되었어요. 신전 측에서도 받을 수 있는 금액이 한정되어 있어서 그 이상은 거부하겠다고 전했나 봐요.”

    캐슬린은 결혼 후부터 발텐 가의 이름으로 기부를 하고 있었다. 그녀 몫으로 주어지는 예산은 예상보다 엄청났다. 생필품과 사치품 같은 것은 공작저의 공통 예산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공작 부인의 예산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보통 귀부인들이라면 친정에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캐슬린은 윈스턴 영지에 돈을 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신전에 기부하는 것을 택했다.

    물론 기부하고 남은 금액은 턱없이 많았기 때문에 쌓아 두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그래. 그럼 신전 말고 다른 곳에도 기부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그런데 마님, 왜 마님의 이름이 아니라 발텐의 이름으로 기부하세요?”

    에밀리는 서류 정리를 돕다가 의아한 듯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자선 활동을 마님이 아니라 주인님이 하시는 걸로 알아요.”

    “크게 다를 건 없지. 어차피 이건 공작님의 돈이잖아.”

    “아니죠. 그건 확실히 달라요. 마님도 아시다시피 주인님은 빈민 구제나 인재 양성에는 크게 관심이 없으시잖아요. 특히 어린아이들에게는요. 모르긴 몰라도 마님 덕에 주인님의 평판이 하늘 높이 치솟았을 거예요.”

    “어쨌든 좋은 일이니까.”

    캐슬린은 희미하게 웃었다. 에밀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흰 봉투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아, 이거 보세요. 신전에서 초대장을 보냈네요. 세 달 뒤 자선 모임을 여나 봐요.”

    “자선 모임? 후원자들에게 발송하는 건가 보구나.”

    신전은 언제나 후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행사를 했다. 대개는 신성력을 활용한 의료 행위에 기반한 것이었는데 가끔은 이렇게 순수한 사교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요즘 제국 곳곳에 지진이 일어나서 고아들이 많이 생겼나 봐요. 전국에서 몰려드는 고아를 모두 거두다 보니까 후원금을 모으려나 본데요.”

    “참석하겠다고 할게. 준비해 줘.”

    “주인님과 함께 가실 건가요?”

    “아니. 그분은 바쁘시니 나 혼자 다녀올 거야.”

    그는 제가 자선 활동을 하는지도 모를 터였다. 평범한 파티 따위에 참석한다고 생각하겠지.

    애초에 에스코트해 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캐슬린은 그 외에도 몇 가지 꼼꼼하게 서류를 검토했다.

    “공작님의 식사에 올리는 수프는 꼭 콩소메로 해야 해. 양파는 꼭 약한 불에서 볶아야 하고 치즈는 네 가지 종류를 써. 식재료 구입은 나중에 주방장과 다시 이야기해야겠다.”

    “네, 마님.”

    “아까 보니 공작님 욕실의 세정제가 다 떨어졌더라. 라일락이나 라벤더는 싫어하시니 들이지 않도록 말을 전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네, 마님. 이미 다 서류로 처리하신 것들이니 잊지 않고 챙기고 있답니다.”

    에밀리의 장난 섞인 핀잔에 캐슬린은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벌써 내가 몇 번이나 잔소리를 하고 있구나.”

    “어쩜. 주인님은 아실까요? 주인님이 먹고 마시고 만지고 걸치는 모든 것에 마님의 손길이 닿아 있다는 걸요.”

    “아내라면…… 아니, 부인이라면 굳이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하는 일이지.”

    어젯밤 저를 부정했던 알렉시스의 목소리가 생각나 말을 바꾼 캐슬린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울적한 기분을 바꾸기 위해서는 일을 하는 것이 제일이었으니까.

    남편이 떠난 집 안에서는 그를 마음껏 생각하고, 아끼고, 그의 영역을 침범해도 괜찮았다.

    * * *

    석 달 후.

    알렉시스는 여전히 집에 잘 돌아오지 않았다.

    온다고 해도 밤만 지새고 필요한 물건을 챙겨 다시 나가곤 했다. 그 사실이 못내 서운하긴 했어도 가끔 아침 식사를 함께할 시간이 있었는데, 얼굴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풀렸다.

    요즘은 밤 사냥을 즐기는지 얼굴에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빨래방에서는 피에 젖은 망토나 정복을 빠느라 울상인 하녀들의 이야기가 많다고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그에게 손을 뻗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새벽같이 그가 떠나고 캐슬린은 정원에서 산책하며 보고를 받았다.

    “주인님께서 마님이 준비해 두신 의복을 다 챙겨 입고 나가셨어요. 바꿔 놓은 세정제나 침대 시트에 뿌려 놓은 향수도 만족하셨다고 하고요.”

    “다행이네.”

    캐슬린은 멀찍하게 물러선 뒤에서나마 남편의 일상을 제가 완성했다는 사실에 소소한 기쁨을 느꼈다.

    “아, 그리고 자선 행사는 오늘 점심에 신전으로 출발하시면 돼요. 마차를 준비해 놓았어요. 아까 신전에서 참석자를 알려 달라고 다시 연락이 왔는데 마님 한 분으로만 전달할까요?”

    “응. 그렇게 해.”

    알렉시스에게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은 있었으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던 순간,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같이 갈 테니 두 명으로 전달하시지요.”

    “황태자 전하?”

    그 다과회가 엉망이 된 후로는 황후궁에서도 알현을 당분간 받지 않겠다 하여 황궁 출입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새삼 반가워졌다.

    “어쩐 일이세요? 여기까지 다 오시고.”

    “뵙고 싶어 왔죠. 오랜만이잖아요. 형수님은 제가 보고 싶지 않으셨나 봅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페터도 살갑게 웃으며 에밀리를 손짓해 보내고, 함께 발을 맞추어 걸었다.

    “따로 찾아뵙겠다 했는데 너무 늦었네요. 사과드립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감사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너무 늦었네요. 그 날, 진심으로 감사했어요.”

    “별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날의 일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입을 막아 두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캐슬린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진 것을 본 페터가 쾌활하게 말했다.

    “걱정거리는 다 잊어버리고 저희끼리 신전에서 쉬다 오죠.”

    “정말 함께 가시려고요?”

    동행이 있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그게 황태자라면 말이 달라졌다. 신전은 한적한 곳에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호위 문제도 있을뿐더러…….

    “이사벨라는 어떡하시고요?”

    아직 그녀는 황후궁에 머무르고 있다고 들었다. 정식으로 약혼한 것은 아니라지만,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자신과 같이 다니면 좋지 않은 소문이 날 수도 있었다.

    “그거라면 괜찮습니다. 몰래 나왔으니까요.”

    “네?”

    “하하, 그리 놀라실 것까지야. 두어 달 동안 원하는 대로 함께 지내 줬는데 오늘 하루는 그분도 양보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도 가끔은 벗어나서 자유를 누려야지요.”

    “하지만.”

    “어차피 결혼은 하지 않을 겁니다.”

    페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결혼할 수 없는 몸이에요. 아니, 결혼하지 않을 거란 말이 더 맞겠죠.”

    “저 때문이라면 그러지 마세요. 괜히 전하께서 신경 쓰실 필요는 없어요.”

    “형수님 때문이 아닙니다. 이건 순전히 제 문제예요. 그리고 어느 가문의 영애든 저와 결혼하는 건 어머님의 욕심일 뿐이에요.”

    한 치의 물러남 없이 말하는 페터는 평소와 달랐다. 그 모습이 꼭 알렉시스와 닮아 있었다. 그래서 캐슬린은 말릴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저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을게요.”

    “그럼 신전의 자선 모임에는 저도 함께하는 겁니다?”

    “황태자라는 걸 밝히지 않으신다면 함께 갈게요. 발텐 가의 마차를 타시고, 옷은…… 정복이 아니라 평범한 것을 입고 오셨으니 괜찮겠네요.”

    “형수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거지꼴을 하고서라도 가겠습니다.”

    너스레를 떠는 페터의 모습이 막냇동생처럼 느껴져 웃음이 났다. 시원한 나무 그늘 옆에 테이블이 차려져 있었다.

    “신전에서 식사를 할 예정이라 간단한 핑거푸드와 차를 마련했어요.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차는 제가 먼저 따라 드리지요.”

    페터가 호기롭게 차를 따르는데,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한입 크기의 연어 샌드위치가 보였다.

    평소에는 잘 먹던 음식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주홍색이 눈에 들어온 순간 비릿한 냄새가 확 피어올랐다.

    캐슬린은 저도 모르게 입을 막고서 헛구역질했다.

    “욱.”

    “형수님? 괜찮으세요?”

    페터가 놀란 듯 찻주전자를 내려놓고 물었으나 메스꺼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캐슬린은 한 손으로 연어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멀찍이 밀어 놓고 나서야 겨우 숨을 다시 고를 수 있었다.

    “죄송해요. 갑자기 역한 냄새가 나서. 연어가 상했나 봐요.”

    “아닌 것 같은데요, 형수님.”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 들고 유심히 살펴본 페터가 말했다.

    “제게는 연어가 아주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네? 분명히 지금도 샌드위치에서 이상한 냄새가, 우욱.”

    말을 이으려는데 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 캐슬린을 빤히 바라보던 페터가 말했다.

    “혹시 임신하신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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