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하지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흑발이 아니라 찬란한 금발이었다.
“어머님, 제가 늦었군요.”
“페터, 너 지금.”
“형수님이 많이 당황하신 듯하니 제가 보내 드리고 오겠습니다.”
그는 주변의 시녀를 불러 테이블을 빨리 치우도록 명을 내렸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시녀들은 황태자의 등장에 당황했지만 곧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후는 몹시 분노한 얼굴이었으나 많이 놀랐는지, 푹신한 소파에 앉아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형수님, 가시죠.”
페터가 얼어붙어 서 있는 캐슬린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그녀는 그를 따라가면서 저를 흘낏 쳐다보는 이사벨라의 눈을 봤다.
즐거워 보였다. 아니, 흡족해 보이기까지 한 그 모습에 숨이 턱 막혔다.
“황실의 마차를 내어 드릴 테니 곧장 타고 공작저로 가세요.”
황후궁을 벗어나면서 페터가 빠르게 말했다.
“어머님은 제가 잘 막아 보겠습니다.”
“감사해요, 전하.”
마차 앞에 다다라서야 캐슬린은 겨우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아까 있었던 일은.”
“굳이 설명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요. 입단속은 제가 잘 시키지요.”
페터는 부드럽게 마차 문을 밀어 닫아 주었다. 저보다 겨우 머리 반 개가 클 뿐인 어린 소년의 말은 힘이 있었다. 캐슬린은 울컥하는 것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페터는 마차를 출발시켰다.
* * *
“마님, 다과회가 일찍 끝났다고 들었어요. 마차에서 대기하다가 마님께서 황궁 마차를 타고 돌아가셨다고 해서 제가…… 어머!”
“에밀리, 알스도프는 어디 있어?”
“집사님이요? 지금쯤이면 정원에서 조경 관리를 하고 계실 거예요.”
캐슬린은 공작저에 돌아오자마자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게 알스도프를 호출했다.
“마님, 어쩐 일이십니까?”
노집사 알스도프가 놀란 눈으로 급하게 응접실로 올라왔다. 외출에서 돌아온 다음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그를 불렀던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어볼 것이 있네.”
캐슬린은 얼음 결정이 녹으며 축축하게 젖은 레이스 장갑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님께서 지방 영지에 성을 새로 지으셨다고 들었네. 사실인가?”
“마님, 그것은.”
“사실인지 물었어.”
“……예. 사실입니다.”
“근 몇 년 동안 거주하지 않았던 공작령은 무수히 많은데, 그곳을 포함하여 영주가 구체적으로 머물 계획이 없는 성에도 생필품을 채워 놓았다는 것도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난처해하기는 하였으나 알스도프는 그녀의 물음에 모두 긍정으로 답했다. 캐슬린은 머리가 띵해지며 허탈함을 느꼈다.
“모두 공작님의 뜻대로였나?”
“예. 얼마 전부터 각하의 명령으로 낡은 성을 모두 보수하거나 허물고 새로 지었습니다. 각하께서 식량과 의복을 충원해 두라 하셨고요.”
“장부를 보고 싶네.”
부정하고 싶었다.
정부가 아니라 지방 영지민들에게 호의를 베풀려 그랬던 것은 아닐까?
캐슬린은 알스도프에게 공작저 바깥의 재정 상황과 행정에 관한 장부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공작 부인이 된 후 살펴볼 권리가 있음에도 한 번도 손대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알렉시스는 원한다면 안주인으로서 직접 관리해도 좋다고 했지만 아직은 한 가문의 살림을 직접 맡는 것이 어려워, 수도의 공작저를 꾸리는 것만 맡고 있었다.
‘그래서 몰랐구나.’
장부를 꼼꼼하게 살펴본 캐슬린은 헛웃음을 지었다.
황후의 말은 한 군데도 어긋난 데가 없었다.
지방 영지에 채워 놓은 의복은 평민의 것도 아니었고, 비상시에 잠깐 걸칠 종류만 있지도 않았다.
생활복부터 시작해서 계절마다 바꿔 입을 수 있는 고급 소재의 잠옷, 간단한 파티부터 정식 파티까지 입을 수 있는 드레스 여러 종류. 그리고 사치품으로 부를 수 있는 베일과 실크 스카프 등등.
최고급까지는 아니어도 꽤 신경 쓴 여성용 의복이 대다수였다.
‘내게는 한 번도 선물을 건넨 적이 없었는데.’
부관이 조언해 주었을까.
남편은 제 옷에도 관심이 없어 황실 예법에 따른 정복만 맞춰 입고 다녔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1년 동안 몰래 재단사를 불러 치수를 재게 하고 최신 유행에 따른 옷부터 기본적인 스타일까지 다양하게 여러 벌로 그의 드레스룸을 채워 놨었다.
그럴 정도였는데, 여자 옷은 한 곳도 아니고 무려 여섯 개의 성에 빼곡하게 채워 뒀다.
‘정부가 최대 여섯 명이라는 소리일까…….’
캐슬린은 떨리는 손으로 두꺼운 장부를 덮고 내어가라 일렀다. 당장에라도 알스도프를 붙잡고 알렉시스에게 다른 여자가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아냈다. 그는 충실한 남편의 수족이니 사실대로 말해 주지 않을 것이었고, 말해 준다 하더라도 한 차례 정리한 사실일 터다.
캐슬린은 있는 사실 그대로를 알고 싶었다.
후계자를 낳지 않을 거라는 결정은 저에게만 해당하는 거였는지.
그래서 황후에게 폭언을 당하고, 다른 귀족들에게 멸시를 당해도 그리 무관심하게 굴었는지.
당신이 정부를 아끼는 것을 들키지 않을 훌륭한 방패막이가 필요했던 것뿐이었는지.
“마님, 주인님께서 돌아오셨어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겨우 옷을 갈아입던 중 에밀리가 올라와서 말했다. 이미 날은 어둑해진 뒤였다. 자갈밭을 밟는 말발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마님!”
슬리퍼를 신을 정신조차 없이 뛰어나갔다. 뒤에서 에밀리가 황급히 소리쳤지만 그녀는 알렉시스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또 언제 떠나 버릴지 모르는 남편이었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공작님.”
계단 층계를 내려가다 말고 그를 마주쳤다. 붉은 망토를 걸친 알렉시스가 층계를 오르다 저를 발견하고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지?”
달음박질한 것처럼 숨이 찼다. 캐슬린은 한 발짝 내려섰다. 금방이라도 목까지 차오른 말을 뱉어 내고 싶어 심장이 펄떡거렸다.
“바로 다시 나가실 건가요?”
“그래. 씻고 다시 나갈 계획이었다.”
“잠시만요.”
마음이 덜컥 앞섰다. 캐슬린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지금 해.”
그는 무감하게 그녀의 손을 떨쳐냈다.
“……다른 사람이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여느 때와 다른 공작 부부의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올려다보는 사용인들이 보였다. 캐슬린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애원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따라와.”
알렉시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스쳐 지나가,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걷는 그의 발소리가 지친 듯했다.
캐슬린은 맨발로 그의 뒤를 따랐다.
“공작 부인의 침실에는 슬리퍼가 없는 건가?”
알렉시스가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망토를 끌러 내던지면서 물었다. 그제야 자신의 차림을 깨달은 캐슬린은 부끄러워졌다.
맨발은 차치하고서라도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않은 상태였다. 평소에는 잠들기 직전까지 일상용 드레스를 잘 갖춰 입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아니었다.
“신어.”
알렉시스는 제 슬리퍼를 대신 내주고는 의자에 앉았다. 캐슬린은 머뭇거리다 그의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었다.
“하려는 말이 뭐지?”
차마 그의 맞은편에 앉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래서 캐슬린은 거대한 침대의 끝에 서서 말했다.
“지방 영지를 새로 관리하고 계시다 들었어요.”
“새삼스러운 이야기군. 이미 아는 일 아니었던가?”
“네. 하지만 한미한 영지의 성까지 새로 보수하고 물건을 채워 넣으시는 줄은 몰랐어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그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나는 영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했을 뿐인데 그게 못마땅하다는 소리인가?”
“못마땅하다는 것이 아니라…… 공작님께서 숨기는 일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목소리가 떨렸지만 캐슬린은 꿋꿋이 말했다.
“공작님께 정부가 있다는 소문이 돌아요.”
“하.”
알렉시스가 헛웃음인지 비웃음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처음에는 황후 마마께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고, 나중에는 장부를 살펴보니 확실히 그런 정황이 보이더군요. 공작님답지 않게 여성의 의복을 사서 각 영지에 보내신 기록을 확인했어요.”
“캐슬린. 일상이 지루해져서 이젠 발텐 가의 살림을 다 통제하고 싶어진 건가?”
“아니요. 제가 알고 싶은 건 단 하나예요.”
캐슬린은 떨리는 손을 모아 잡으며 물었다.
“정말 정부가 있으세요?”
“…….”
“그래서 자주 집을 비우시는 건가요?”
아닌 것처럼 보이고 싶었으나 숨길 수가 없었다. 캐슬린은 아니기를 바라는 눈빛을 하고서 울먹이고 말았다.
“대답해 주세요, 공작님.”
“내게 다른 여자가 있든 말든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그러나 그에게서 들려온 말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왜, 왜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니죠? 저는 당신의 아내예요.”
“아니, 넌 내 아내가 아니야.”
알렉시스는 무감한 얼굴로 말을 정정했다.
“캐슬린 발텐. 넌 공작 부인일 뿐이지.”
얼핏 들으면 같은 말인 듯했지만 아니었다. 명백한 구분에 캐슬린은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죠…… 그냥,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저 아닌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었다고요. 그래야, 그래야 저도.”
“정말 내게 다른 여자가 있다면 어쩔 셈이지?”
“그러면…… 저는.”
목이 메며 왈칵 눈물이 솟아올랐다.
“이혼이라도 하자고 할 셈인가? 아니, 넌 그래선 안 돼. 애초에 나와 조건을 주고받으며 결혼을 거래한 걸 잊었나?”
“이혼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그저 당신의 마음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건가요?”
“이상하군.”
알렉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캐슬린의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으로 턱을 잡아 올려 굴러떨어지는 눈물을 확인했다.
“애초에 넌 내게 정부가 여럿 있다 해도 묵묵히 받아들여야 할 처지야. 그런데 왜 그렇게 굴지? 상처라도 받은 것처럼.”
“…….”
“날 사랑하기라도 해?”
조롱하듯 들려온 말에 캐슬린은 부정하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는 편이 정확했다.
“네.”
결국, 캐슬린은 고백하고 말았다.
“공작님을 사랑해요. 그래서 견딜 수가 없어요. 당신이 저에게 아무것도 바라시지 않는 것. 황후께서 절 핍박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관심도 두지 않는 것. 저 말고 다른 여자를 안는 것도요…….”
알렉시스는 굳은 얼굴로 손을 거두었다. 캐슬린은 다급하게 말했다.
“공작님께 많은 것을 바라지 않을게요. 그저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고 제 손을 놓지 않겠다고만…… 그렇게만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그는 확연히 싸늘해진 태도로 되물었다.
“쓸데없는 것은 바라지 말라고 했을 텐데. 벌써 잊었나? 가만히 있으면 편하게 지낼 것을 왜 굳이 들쑤시지?”
“가만히 있으면 정말 제가 편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가 금방이라도 돌아서 버릴 것만 같아서 캐슬린은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간절히 말했다.
“보석과 지위가 있어도, 냉대당하는 심정으로는 견디기가 어려웠어요. 공작님께서, 당신이 돌아봐 주시기만 한다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 주지 않으시니까…….”
“애초에 맺은 계약의 내용이 그랬어. 그 이상을 바라는 건 너다.”
저도 잘 알고 있었다.
결혼을 두고 맺은 계약의 조건을 넘어서는 것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제 마음을, 장부를 계산하듯이 이리저리 셈할 수가 없었어요.”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지만 캐슬린은 매달리고 싶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니 한 번만이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부부처럼 대해 주실 수는 없나요?”
초라하게 그에게 애원했다.
“한 번만이라도요.”
알렉시스는 더없이 냉정한 얼굴을 하고서 갑갑하다는 듯 정복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건가?”
그는 캐슬린의 어깨를 밀어 침대에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발끝에서 슬리퍼가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지고 등이 푹신한 이불에 닿았다. 저를 타고 오른 남자의 황금색 눈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말해 봐.”
명령하듯 채근하는 말에 자존심이 무너졌다. 제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 미리 알았기 때문이리라.
“네.”
캐슬린은 울먹이면서 대답했다. 침묵이 흐른 후, 그의 손길이 옷깃 사이로 미끄러졌다.
“하아…….”
자극을 참지 못한 캐슬린의 달뜬 숨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거칠게 다가온 입술은 그 숨결을 무자비하게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