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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9)화 (9/110)
  • 9화

    오늘은 이 남자를 더 마주하는 것이 힘들었다.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는 것이 오늘로 몇 번째인지 세기도 어려웠다.

    그저 빨리 용건을 마무리 짓고 올라가 쉬고 싶었다. 이사벨라의 이야기로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 터였다.

    “제게 하시려던 말씀이 무엇인가요?”

    “윈스턴 영지에서 서신이 왔다더군.”

    이미 소식을 들은 걸까?

    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윈스턴 백작이 무엇을 요구하든 간에 거절해. 최근 그가 황후와 접촉했다는 첩보가 들어왔어. 분명 그의 요구는 황후와 관련이 있을 테니. 편지는 어디 있지?”

    “……태웠어요.”

    “태웠다고?”

    알렉시스의 한쪽 눈썹이 찡그려졌다.

    “우선 더 두고 볼 생각이었어요. 이사벨라가 수도의 사교계에서 데뷔할 예정이라며 저더러 샤프롱을 맡아 달라더군요.”

    “더 들을 것도 없군.”

    캐슬린의 말을 자른 알렉시스가 코웃음 쳤다.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고 내가 답신을 보내지.”

    “공작님이 직접요?”

    의외였다.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답신을 보내야 아버지는 덜 노여워하실 거예요. 일단은 그렇게 넘기면.”

    “아니, 그럴 생각 없어.”

    알렉시스는 긴 다리를 꼬고 앉아 단호하게 말했다.

    “윈스턴 백작은 친딸이 집을 나와 공작저의 하녀로 일하게 내버려 뒀어. 심지어는 공작 부인이 되었을 때도 지참금을 대충 챙겨 보냈지. 그 사실을 온 제국 사람들이 다 아는데 내가 그걸 용납해야 하나? 그걸 내버려 둔다면 발텐 가의 위신을 땅에 내팽개치는 일이야.”

    “…….”

    “고집부릴 생각은 마. 그럼 일어나야겠군. 영지 관리와 관련해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 있어서.”

    “저.”

    캐슬린은 충동적으로 알렉시스를 붙잡았다. 저를 돌아보는 황금빛 눈에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바로 후회했지만, 저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였다.

    “공작님께서 저 대신 답신을 보내셨다는 이야기가 돌면 다른 사람들이 부인을 싸고돈다고 흉볼 거예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직접 움직이겠다는 이유가 뭘까.

    “그렇지 않아도 후계자 건으로 저를 흉보는 이들이 많은데, 공작님께서 감싸 주신다면 오히려 피해를 입으실 거예요. 오해를 살 수도 있고…….”

    “무슨 오해?”

    “저와 공작님의 사이에 대해서요.”

    “그런 오해야말로 내가 진정 바라는 거라고 하지 않았나?”

    제 손을 떼어 내는 그의 손길은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래야만 이혼하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테니 말이야.”

    “이혼……이요.”

    “그래. 나는 후계자 없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에 가장 적당한 상대를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

    알렉시스는 그대로 다이닝 룸을 나갔다.

    캐슬린은 가만히 그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더는 그를 붙잡지 못한 채로.

    * * *

    “마님, 황후궁에서 급하게 사람이 왔어요.”

    알렉시스가 떠나고 닷새 후 황후궁으로부터 다과회 초대장이 도착했다.

    자주색 봉투에 흰색 밀랍으로 봉인된 황실의 초대장에는 뜻밖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늘은 황후궁 알현 대신 다과회 참석으로 대신하라고 하네.”

    “그럼 다른 귀부인들도 오신다는 건가요?”

    “그런가 봐.”

    초대장을 다시 살펴봤지만 참석자 명단은 없었다. 소수만 참여하는 비공식 다과회라는 이야기였다.

    긴 한숨이 나왔다.

    “불참하지 못하게 하려고 당일에 알리시는 거구나.”

    “그래도 다과회라면 대놓고 노발대발하진 않으시겠네요. 자, 얼른 준비해 드릴게요. 목걸이와 반지만 바꾸시면 되겠어요.”

    에밀리가 빠르게 준비해 준 덕에 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었다.

    저번에 참석하려 했던 티파티에서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나왔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얼굴을 비추고 말을 섞어야 했다. 그것 역시 발텐 공작 부인의 이름을 받는 계약 조건 중 하나였으니까.

    ‘적당한 사교 활동으로 발텐 영지의 부흥을 돕는다.’

    캐슬린은 계약 조항 중 하나를 입 안으로 외워 보았다.

    그 사교 활동에 관해서 알렉시스는 일절 상관하지 않았다. 사교 활동을 위해 그녀가 얼마나 사치를 부리든 간에 한마디 말도 얹지 않았다. 그러나 대신 캐슬린이 은근한 모욕을 당한다 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부부 동반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기도 일쑤였다.

    ‘오늘도 마찬가지겠지.’

    격식을 차린 다과회겠지만 황후의 묵인하에 귀부인들의 공격을 받아도 캐슬린은 혼자 견뎌 내야 했다.

    “발텐 공작 부인 드십니다.”

    황후궁 정원에 이르자 시녀장이 고했다. 부드러운 선율과 함께 이어지던 수다 소리가 뚝 멈추었다. 캐슬린은 그 한가운데 길로 걸어 들어갔다.

    황후에게 예를 올리려던 순간이었다.

    “언니!”

    이질적인 호칭이 들렸다. 캐슬린은 제 귀를 의심했다.

    ‘설마……?’

    불안함을 감춘 채 예를 올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예상과 달리 다른 귀부인들은 없었다.

    대신 부드럽게 굽이친 초콜릿색 머리칼에 진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여자가 방긋 웃으며 제게 다가왔다.

    “언니. 이렇게 보니 반가워.”

    “이사벨라?”

    분명 남편이 답신을 보냈을 텐데 수도로 올라온 걸까?

    사교계에 데뷔하지 못한 미혼 귀족 영애는 샤프롱 없이 어떠한 파티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그 장소가 황궁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

    “내가 불렀단다.”

    크고 푹신한 의자에 눕듯이 앉아 있던 황후가 만족스럽게 말했다.

    “윈스턴 백작이 오랫동안 변경에서 국경을 지켜 주고 있는데 내가 그 여식에게 이쯤은 베풀어야겠지.”

    “……그러셨군요.”

    알렉시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앉아라. 오랜만에 만난 자매끼리 회포도 풀어야 하지 않겠니?”

    예상과는 달리 사근사근한 황후의 태도는 왜인지 몰라도 퍽 기꺼워 보였다. 폭언이 쏟아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으로 캐슬린은 황후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사벨라가 생글거리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미혼의 백작 영애치고는 의아한 좌석 배치였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바짝 신경이 곤두섰지만, 코앞에 있는 상대를 모른 척할 수 없어 예의상 말을 건넸다.

    “네가 벌써 수도로 올라왔을 줄은 몰랐어.”

    그러자 이사벨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언닌 모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아버지께 일부러 날짜를 적지 말라고 부탁드렸지.”

    윈스턴 영지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언니라는 소리는 한 번도 하지 않더니, 이젠 꼬박꼬박 호칭을 붙여 부르는 태도에 헛웃음이 났다.

    “발텐 공작께서 언니를 하도 싸고돌아서 친정에서 오는 편지는 죄다 태워 버렸다는 소문이 윈스턴 영지까지 파다해.”

    “저런. 그 정도일 줄이야. 내 살면서 발텐 공이 그렇게까지 아끼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

    황후가 입가에 웃음을 건 채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물론 부인을 그리 아낀다니 뿌듯할 일이지만, 아직도 아이가 들어서질 않으니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가시가 돋친 말이 어김없이 튀어나왔다. 캐슬린은 시선을 내리깔며 앞에 놓인 잔을 감싸 쥐었다.

    “얼마 전 발텐 공이 황궁의를 데려갔던데. 아이 소식은 아니었더구나. 발텐 공이 아직 후계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네가 잘 설득해야지. 안 그러느냐? 더구나 너는 보통 귀부인도 아니거늘.”

    “……예.”

    “윈스턴 영애, 잘 들었겠지? 자넨 그러면 안 되네.”

    한참 동안 캐슬린에게 잔소리를 퍼부어 댈 것 같던 황후가 갑자기 대화의 상대를 바꾸었다.

    “네, 황후 폐하.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을게요.”

    이사벨라가 살랑살랑 웃으며 황후의 비위를 맞췄다.

    “황태자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황실의 대를 잇는 것이 될 테니까요.”

    황태자비?

    캐슬린의 연하늘색 눈이 커지자, 이사벨라는 더욱 진하게 웃으며 저를 바라보았다.

    “어머, 맞다. 언니는 모르고 있었구나? 워낙 비밀리에 진행되는 혼담이라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도록 했어. 언니는 이미 발텐 가의 사람이니까. 이해하지?”

    묘하게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를 보니 이사벨라의 태도가 이해가 갔다. 매번 저를 보면 빈정거리거나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는데 태도가 싹 바뀐 이유가 바로 저것이었다.

    ‘나보다 위에 있다는 우월감.’

    언제나 이사벨라는 그 감정에 젖어 살았다.

    ‘그래서 내가 발텐 공작 부인이 된다고 했을 때 난동을 부렸겠지.’

    황실에서 한 가문의 여식 두 명에게 모두 혼인을 맺게 한다는 사실이 다소 의외긴 했지만 제국법상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특히 요즘 들어 접경 지역의 국방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서 윈스턴 영지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된다고 하니, 그의 여식을 황태자비로 삼아 충성을 맹세하게 만들 만도 했다.

    “그래. 축하해.”

    그래서 캐슬린은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다. 동요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이사벨라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하지만 황태자는 성년이 아니니 결혼식을 올리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지. 그사이에 어떻게든 황실의 후계가 단단해져야 해.”

    황후가 다시 말을 끊고 나섰다. 이미 끝난 줄 알았던 후계 이야기였다.

    “혹시나 해서 당부를 받아야겠다. 쓸데없는 질투를 하지는 않겠다고 약속하렴.”

    “질투라니요?”

    “발텐 공이 다른 곳에서 후계자를 얻어 와도 박대하지 않겠다는 약속 말이다.”

    당황스러운 말에 손이 떨렸다. 캐슬린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황후 마마?”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사생아도 입적만 제대로 된다면 본부인의 자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황후의 말에 이사벨라가 맞장구쳤다.

    “그럼요. 언니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처지도 이해할 테니 모질게 굴지 않을 거예요.”

    즐거운 듯 캐슬린의 굳은 얼굴을 관찰하는 그녀는 무엇인가를 아는 듯 보였다. 캐슬린은 그녀와 황후를 번갈아 보았다.

    “이런. 설마 몰랐느냐?”

    황후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발텐 공에게 정부가 있다는 사실을?”

    “……정부, 라고요?”

    “그래.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황후가 등받이에 몸을 더욱 깊숙이 기대며 말했다.

    “수도에만 없지, 각 영지에 정부를 하나씩 두고 거느리느라 바쁘다더구나. 집까지 다 내려 주었다지? 성을 아주 견고하게 보수하고 온갖 식재료에다 옷까지 갖가지 물건을 다 챙겨다 두었다던데, 정부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생전 안 하던 짓을 하겠느냐?”

    영지 관리를 해야 한다며 하루가 멀다 하고 공작저를 비우던 남편이 떠올랐다.

    ‘……아니겠지.’

    어차피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도 아닌데 다른 여자가 만나고 싶었다면 숨길 이유가 없다. 게다가 그는 아이를 원하지도 않는데 정부라니, 말도 안 되는…….

    ‘하지만.’

    아닐 거라고 되뇌던 중 의문이 떠올랐다.

    캐슬린은 한 번도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알렉시스는 정부가 있는지에 관한 질문에 부정하거나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데다 그는 후계자를 낳지 않고 싶다고 했을 뿐이지 잠자리가 싫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왕이면 본부인에게서 후계를 보면 좋을 일이지만 정 안 되면 밖에서라도 얻어 와야지. 안 그러느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황후가 대답을 종용했다. 잔의 손잡이를 꼭 쥔 캐슬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정부가 아이를 데리고 공작저로 찾아오면, 언니는…… 꺄아악!”

    이사벨라가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캐슬린은 그 소리에 놀라 황급히 잔에서 손을 뗐다. 황후 역시 놀라며 놀란 숨을 뱉었다.

    “이, 이게 무슨!”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캐슬린이 마셨던 뜨거운 홍차는 싸늘하게 얼었고 흰 얼음 결정은 이미 잔을 넘어 테이블 위를 뒤덮고 있었다. 이사벨라와 황후가 급하게 몸을 일으키다가 떨어뜨린 접시와 잔이 깨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캐슬린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얇은 레이스 장갑 사이로 손가락 사이를 감싼 얼음 결정이 보였다.

    그녀는 처참한 기분이 되어 눈을 감아 버렸다.

    “저주받은 핏줄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느냐!”

    황후의 분노한 목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이민족의 피가 섞였다고 해서 헛소문이 떠도는 줄만 알았더니, 이 무슨 해괴한……!”

    윈스턴 가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평생 감추고 싶었던 결점이 드러나 버려서인지 머리가 새하얘졌다.

    캐슬린이 주춤주춤 물러서는데, 뒤에서 다가온 누군가와 부딪쳤다. 따스한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아 제 등 뒤로 오게 했다.

    ‘알렉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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