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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8)화 (8/110)
  • 8화

    “으음…….”

    “어머, 마님! 정신이 드세요?”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신음을 내뱉자 에밀리가 울먹거리며 달려왔다.

    “응. 나 좀 일으켜 줄래?”

    “여기에 기대세요. 세상에, 꼬박 하루 동안 기절해 계셨어요. 황궁의가 말하길 다치신 곳은 없다는데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요!”

    유모의 손에 머리채를 잡힌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기절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걱정하는 에밀리를 안심시키려다가 캐슬린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발텐 가의 주치의가 아니라 황궁의가 진찰을 했어?”

    “주인님께서 부르셨어요. 마님이 쓰러지시자마자 그렇게 명령하셨는걸요.”

    “아…….”

    뜻밖의 말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신경도 쓰지 않았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공작님께서 내가 쓰러진 걸 들으신 거야?”

    “듣기는요. 응접실에서 마님이 기절하시자마자 직접 안아서 옮기시기까지 하셨어요.”

    “공작님이 직접 응접실에 오셨다고?”

    “네, 그렇다니까요. 그 미친 여자도 주인님께서 직접 명을 내려서, 앗.”

    에밀리가 속 시원하다는 얼굴로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캐슬린이 계속하란 눈빛을 보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하지만 말하고 싶어 못 이기겠다는 얼굴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유모인지 뭔지, 그 여자는 처형당했어요. 황족 모독죄로 즉결 처분이었죠. 자세히는 모르시는 게 나아요.”

    “그랬구나.”

    찌릿한 어깨를 매만지며 멍하니 대답하자 에밀리가 조금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역시 마님의 일이라면 주인님께선 달라지시나 봐요. 그렇게 끔찍하게 여기시던 유모마저도 당장 내치시는 걸 보니!”

    캐슬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네! 물론 평소엔 주인님이 바쁘셔서 마님께 자주 들르진 못하지만, 어제는 밤새 곁에서 간호도 하셨어요.”

    “뭐?”

    연푸른색 눈이 의아한 빛을 띠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는 분명 나를 미끼로 내통자를 잡아낼 속셈이었다. 평소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목적을 달성했는데 불필요한 일을 굳이 벌일 리가 없었다.

    “왜 그러신 거지?”

    “아이참, 남편이 아내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에밀리가 싱글벙글 웃으며 살뜰하게 캐슬린을 보살펴 주었다. 알렉시스는 일이 생겨 새벽녘에 공작저를 나섰다고 부러 묻지 않은 그의 사정까지 알려 주며.

    ‘정말일까.’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믿고 싶어졌다. 불시에 떠오른 7년 전의 기억 때문에 더 기댈 사람이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마님, 편지가 왔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노집사 알스도프가 편지 봉투 두 장을 들고 침실로 올라왔다.

    “고맙네. 저기 두면 나중에 읽겠네.”

    “급한 건이라 바로 읽으시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조심스레 권유하는 그의 태도에 에밀리가 그것을 건네받아, 페이퍼 나이프와 함께 가져왔다. 편지를 무릎에 올려놓은 캐슬린은 칼을 잡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급한 건이면 나 대신 공작님께 전하는 편이 더 나을 텐데.”

    “그중 하나가 각하께서 보내신 겁니다.”

    “그런가?”

    캐슬린은 뜻밖의 사실에 묘한 설렘을 느끼며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하려 봉투를 뒤집었다.

    ‘나를 걱정하는 거라면…….’

    작게 피어오른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기도 전에 캐슬린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에버튼 윈스턴]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오른손에 쥔 칼의 손잡이를 따라서 미세하게 얼음 결정이 얼어붙고 있었다.

    “각하께서 다른 편지보다 본인의 편지를 먼저 읽으라 하셨습니다.”

    침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작은 칼의 상태를 보지는 못했지만, 캐슬린의 얼굴이 굳어 있는 것은 확실히 알아본 알스도프가 말했다. 캐슬린은 그 말에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떨리는 손 때문에 칼은 이불 속에 숨기고 맨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손가락에 맺혔던 얼음 결정이 순식간에 녹아 사라지며 봉투를 적셨다.

    [내일 아침 식사 시간에 보지.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 나누었으면 좋겠군.]

    알렉시스가 전한 말은 별다른 내용 없이 그게 다였다.

    그러나 캐슬린은 그 아무것도 아닌 말에 마음이 놓였다. 자신이 돌아올 시각을 일러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사소한 관심에도 들뜨는 기분이 싫지 않았다.

    그제야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읽을 자신이 생겼다. 캐슬린은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나머지 봉투를 뜯었다.

    [캐슬린.

    자의인지 타의인지, 네가 가문과의 연락을 끊은 지는 오래되었으나 그간의 시간으로 해묵은 감정이 조금은 풀렸으리라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윈스턴 가의 연락을 무시하였더라도 크게 상관하지 않았지만, 이번은 너 역시 그러지 못할 것이다.]

    발텐 공작 부인이 된 이후 남편을 제외하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의 성정을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왠지 모를 거부감이 느껴졌다.

    일단은 편지를 계속 읽었다.

    [네 동생 이사벨라가 수도의 사교계에 데뷔할 시기가 되었다. 이미 북부 사교계에서는 데뷔하였으나 알다시피 이곳에서 접할 수 있는 가문은 한정적이지.

    이사벨라는 혼담이 오가고 있으니 데뷔는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 언니로서 네가 책임질 것이라 믿는다.]

    짧은 편지는 안부 인사조차 적혀 있지 않았다. 캐슬린은 긴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내려놓았다.

    “마님, 무슨 일이세요? 안색이 안 좋아요. 윈스턴 백작가에 무슨 일이 있대요?”

    “우선 이거 태워 줘.”

    캐슬린은 에밀리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에밀리는 군말 없이 벽난로에 그것을 던져 태우면서 답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내 동생이 수도의 사교계에 데뷔할 예정이라며 나더러 책임지라고 하네.”

    “네에?”

    에밀리가 얼굴을 찡그렸다.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이사벨라, 아니, 윈스턴 영애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응. 그 애 빼고 달리 누가 있겠어?”

    “허, 참.”

    백작 영애이니 무어라 말은 하지 못하지만 상당히 불만스러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에밀리는 캐슬린과 6년간 룸메이트로 지내며 과거의 사연을 다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내일부터 준비할까요, 마님?”

    노련한 집사 알스도프가 물어 왔다. 캐슬린은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직 상경 날짜도 알지 못하고 공작님께서도 들은 바 없으실 테니 준비는 이르네. 추후 다시 부탁하지.”

    “예. 그럼 그리 알고 물러가겠습니다.”

    알스도프가 나간 뒤 에밀리는 심각한 얼굴로 설득했다.

    “마님, 절대 안 돼요. 마님이 윈스턴 영지를 떠난 게 누구 때문인데요? 주인님께 말씀드려서 파문시키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웬 사교계 데뷔를 도와주라는 거예요?”

    “나도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어. 다만…….”

    이사벨라 윈스턴.

    자신과 달리 적법한 혼인 관계에서 태어난 변경백의 적녀.

    물론 캐슬린 역시 족보에 백작 부인 소생으로 올라가 있기는 하지만 눈속임에 불과했다. 백작 부인은 이사벨라를 먼저 족보에 올린 후에야 캐슬린의 이름을 올리겠다고 강경하게 요구했고, 윈스턴 백작은 받아들였다.

    그래서 캐슬린은 언니임에도 이사벨라보다 나중에 족보에 올랐다.

    외모로도 확연히 드러나거니와 윈스턴 가의 가계도를 살펴본다면, 그녀가 백작 부인 소생이 아님을 누구든 알 수 있었다. 출생 연도라도 제대로 적혀 언니라 불릴 수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너 같은 것과 자매로 엮이다니 불쾌해.

    -넌 아버지의 성만 물려받았을 뿐이지 가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생각이란 게 있다면 여기서 떠나. 너 하나 때문에 윈스턴 백작가가 얼마나 추잡한 소문에 휩싸여 곤란한지 알기나 해?

    -너 때문에 나까지 싸잡혀서 질 낮은 사람 취급을 받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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