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5)화 (5/110)
  • 5화

    ‘그때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어땠을까.’

    황후궁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캐슬린은 생각했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면 이렇게 후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님,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조심스럽게 고했다. 캐슬린은 연푸른색 드레스 자락을 모아 쥐고는 밖으로 나갔다.

    “얼른 가시지요. 황후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도 황후궁의 시녀장은 정문 앞까지 나와 캐슬린을 데려갔다. 마치 그녀가 어딘가로 도망칠 거라고 생각하는 듯이.

    “앞장서게.”

    그마저도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이제는 지겨웠다. 캐슬린은 무감한 표정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발텐 공작 부인 드십니다.”

    시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당장 들여라!”

    노염이 난 황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이크, 하며 시녀가 슬쩍 캐슬린의 눈치를 봤다.

    평소보다 더 심기가 언짢은 황후의 모습이 의아하긴 했으나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이 상황이 무섭지 않았다. 나붓이 걸어간 캐슬린은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를 올렸다.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괘씸한 얼굴을 잘도 들고 다니는구나!”

    씨근덕거리는 목소리가 비난을 담아 캐슬린을 난도질했다.

    “이것이 무엇이냐!”

    황후가 작은 병 하나를 캐슬린 앞에 내던졌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른 그 병은 캐슬린의 눈에 익은 것이었다.

    “저번 합방일에 피임약을 먹은 것이냐?”

    누가 이것을 황후에게 갖다 바쳤을까.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공작저에 황후의 손을 잡을 사람은 없을 텐데. 어째서 저게 여기에…….’

    저 약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할 일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밀한 침실의 사정이 까발려지는 것이 수치스럽지 않을 순 없었다.

    황후의 손짓에 시녀들이 모두 물러가며 문을 닫았다. 곧 응접실에는 캐슬린과 황후, 두 사람만 남았다.

    황태자를 낳고 기운이 쇠해 머리가 반백이 됐는데도 기운이 성성한 황후가 계속해서 다그쳤다.

    “대체 어쩌려고 이러느냐! 결혼한 지 벌써 1년이 되었는데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했다. 내가 조사하지 않았다면 대가 끊길 뻔하지 않았어!”

    “…….”

    “발텐 공은 네가 이런 발칙한 짓을 벌였다는 걸 알고 있느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캐슬린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시선을 맞추어 대답했다.

    “예.”

    “뭐, 뭐라?”

    황후는 목 뒤를 잡고 넘어가려다 펄펄 뛰었다.

    “발텐 공이 원했어도 네가 반대했어야지! 정신이 나갔느냐? 내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느냐? 급 떨어지는 너를 황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도 후계를 생각해서였다. 발텐 공이 처음으로 안은 여자가 너라 하여 받아들였는데, 그 사실을 다 알면서도! 낯이 두꺼워도 여간 두꺼운 게 아니구나!”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견뎠다. 늘 그래 왔던 일이라 조금만 참으면 끝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런데…….

    오늘은 참기가 힘들었다.

    그의 부인이 되기로 하며 맺은 계약에는 이런 일도 감내하기로 되어 있었다. 후계자를 낳지 못하는 귀부인이 당할 수 있는 수치와 고난은 예견된 것이었고, 캐슬린은 분명 그를 승낙했다.

    목숨을 보장받고, 충분한 휴식과 함께 따뜻한 침대와 맛있는 음식을 갖는 대가로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년 전 처음 황후를 독대했을 때만 해도 충분히 견딜 만했는데 계속되는 폭언을 듣고 있자니 속이 끓어오르고 메스꺼워졌다.

    ‘왜일까.’

    주먹을 쥐자 손톱이 손바닥의 여린 살을 파고들었다.

    모르고 싶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제 분을 못 이겨서 날뛰는 황후는 캐슬린의 어깨까지 밀쳤다. 그녀는 꿇어앉아 하염없이 쏟아지는 황후의 폭언을 여느 때처럼 견뎌야 했다.

    그런데, 감정을 죽이고 한 귀로 듣고 흘리면 그만인 것을.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한 번이라도, 그이가 막아 주었으면 해서지.’

    헛웃음이 나왔다. 그럴 리도 없고 그러길 바라도 안 되는데 자꾸 왜 이러는 건지.

    “이딴 끔찍한 약을 한 번만 더 복용했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 알겠느냐?”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황후는 쌓인 것이 많았는지 평소보다 더욱 격렬하게 화를 냈고, 캐슬린은 순종하며 그 분노를 다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황후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해할 수 없었고 보내 주어야만 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발텐 공은 너 같은 여자가 볼 것이 뭐가 있다고 그리 싸고도는지.”

    쯧, 하며 등을 돌리는 황후에게는 못마땅함이 묻어났다. 캐슬린은 못 들은 척하며 비틀거리며 일어나 인사를 올리고 황후궁을 나왔다.

    황후궁의 시녀는 아무도 그녀를 따르지 않았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마부가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지만 캐슬린은 손을 내저었다.

    “소란 떨지 말게. 괜찮아.”

    “하지만 얼굴이 너무 창백합니다. 이 상태로 마차를 타셨다가는 구토하실지도 몰라요.”

    “……그럼 잠시 산책이라도 하고 오겠네. 기다리게.”

    캐슬린은 홀로 황후궁 바깥에 있는 외부 정원으로 향했다. 외부 정원은 황족이라면 누구든 쉬어 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평소에는 거의 들르는 사람이 없어 고요한 곳이었다.

    그녀는 텅 비어 있는 티 테이블에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아니, 온갖 생각이 요동치는 머릿속을 비우려 애썼다.

    평소대로라면 에밀리가 따라와서 말동무라도 해 줬겠지만, 오늘은 일이 생겨 입궁할 때 같이 오지 못했다. 다른 시녀를 데려올 수도 있겠지만 캐슬린은 공작저의 다른 사람들과 쉬이 친해질 수 없었다. 최하층 주방 하녀였던 이가 지금은 모셔야 하는 주인이 되었으니 기꺼워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사람을 시녀랍시고 달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형수님!”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반갑게 그녀를 불렀다. 캐슬린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형수님, 오늘도 여기 계십니까?”

    “……황태자 전하.”

    그녀가 황급히 일어나 예를 올리려 하자, 황태자 페터가 손사래를 치며 다가와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실 필요 없다니까요. 가족끼리 그런 예를 차리시다니요.”

    구김살 없이 환하게 웃는 금발의 청년은 황후가 늘그막에 겨우 얻은 늦둥이이자 황제의 후계자였다. 황가의 핏줄임을 증명하는 황금색 눈동자는 발텐 공작과 똑 닮았지만, 순금을 녹여 만든 듯 찬란한 금발은 그와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또 표정이 어두우시군요. 어머님을 뵈러 오셨습니까?”

    “네. 오늘 알현이 있었거든요.”

    힘없이 웃어 보이자 페터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 또 형님께선 같이 오시지 않은 거로군요?”

    “…….”

    “그걸 핑계로 어머님께선 또 형수님께 후계를 운운하며 악담을 퍼부으셨을 테고요.”

    캐슬린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심정을 짐작한다는 듯 페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니지요. 제 잘못이 맞는걸요.”

    “그런 소리 마세요. 왜 그게 형수님의 잘못이죠? 따지자면 그건 이 일을 모르는 척하는 형님 탓입니다. 다들 형님이 묵인하니 계속 형수님을 잡는 거지요.”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형수님?”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터져 버린 눈물에 당황한 캐슬린이 당황하자, 그가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감사……해요.”

    “뭘요. 사사롭게 보면 형수님은 제 누님이나 다름없는데요. 차라리 숨기지 마시고 실컷 우세요.”

    그 말에 걷잡을 수 없이 설움이 복받쳤다. 그녀는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아무도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준 적 없었다. 실상 그런 위로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 주었으면 하는 누군가를 떠올려 본다면 그건…….

    ‘알렉시스 발텐.’

    남편이었으면 했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이 결혼을 성사하는 데 중요한 조건이라고 말했던.

    그러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란 사실을 잘 아는데, 그와 닮은 눈을 가진 이가 해 주는 말에 왜 이리 위로받게 되는지.

    올해로 열여섯 살로, 발텐 공작과는 열두 살이나 차이 나는 황태자는 아직 약혼조차 하지 않았다. 관례상 열여덟 살에는 결혼을 해야 하는데 아직도 미적거리고 있으니 하루하루 나이가 들어가는 황후가 속이 타는 것일 테다.

    “제가 어머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황실의 대는 형님이 아니어도 이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시려면 하루빨리 약혼을 하셔야 할 텐데요.”

    그의 서투른 위로에 조금이나마 안정을 찾은 캐슬린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축축해진 손수건을 돌려주려다 멈칫했다.

    “……아. 손수건이.”

    “괜찮습니다. 가지세요.”

    “그렇지만.”

    “황태자궁에서 굴러다니는 겁니다. 별거 아니에요. 가다가 버리셔도 됩니다.”

    황실의 문양이 수놓인 손수건은 굴러다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페터는 늘 이렇게 그녀를 신경 써서 챙겨 주었다. 캐슬린은 오늘만큼은 누군가가 건네주는 위로 한 줌이 간절히도 필요했고, 그래서 페터의 호의를 받았다.

    ‘돌려 드려야지.’

    손수건을 작게 접어 소맷자락에 넣은 캐슬린은 다음에 황궁에 오게 되면 돌려주리라고 마음먹었다.

    “형수님께서도 제 약혼을 간절히 바라시는 듯하니 이제부터 정말 열심히 찾아보아야겠습니다. 하지만 어쩌지요. 이미 눈이 너무 높아져 버렸는지 적당한 아가씨를 찾기가 쉽지가 않네요.”

    “세상에는 외모보다 다른 뛰어난 점을 지닌 사람이 많아요. 전하께서 그것을 꼭 아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제가 감히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망설였지만 페터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캐슬린은 목에 걸렸던, 남편에게는 하지 못했던 말을 꺼내 놓을 수 있었다.

    “그래야, 결혼 생활이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새겨듣겠습니다.”

    페터는 웃으며 일어나 한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형수님? 제가 에스코트하죠.”

    “……고마워요.”

    예전부터 살갑게 굴던 페터는 꼭 친동생처럼 굴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낯설었지만, 그가 발텐 공작에게도 똑같이 구는 모습을 보고 캐슬린은 그가 진심으로 자신들과 친해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형인 발텐 공작은 동생을 냉담하게 무시하기 일쑤였지만.

    “자, 다 왔습니다. 조만간 또 뵙…… 아차. 그럼 형수님께서 힘드실 테니, 곧 다시 입궁하길 바랄 순 없겠군요.”

    페터는 능청맞게 웃으며 캐슬린을 마차에 올려보내곤 문을 손수 닫아 주었다.

    “그래도 다시 뵐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조심히 가십시오.”

    그는 마부에게도 몇 번이나 캐슬린을 잘 모시라 당부하고는 돌아갔다.

    창문 너머로 멀어지는 페터의 뒷모습을 보며 캐슬린은 생각했다.

    ‘그이였다면…….’

    발텐 공작과 황태자는 성격뿐 아니라, 어머니도 다르고 나이 차이도 커서인지 외형도 꽤 달랐다.

    호리호리하고 아름다운 미소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페터와, 빈틈없이 날을 세운 단단한 전장의 사내 알렉시스.

    그런데도 왜 그녀는 시동생의 모습을 보며 남편을 떠올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잊자.’

    그러나 이제 곧 끝이다.

    캐슬린은 긴 한숨을 내쉬며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페터는 다시 보자고 말했지만 이제 황궁 출입은 끝일 것이다.

    공작저를 떠나면 그 의무는 지킬 이유도, 필요도 없게 되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