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모아 잡은 두 손에 식은땀이 났다. 하녀들 사이에서는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작이 주변을 거닐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다시 고요가 찾아들었다.
“발뺌하겠다?”
공작이 목소리를 높이자 기겁한 하녀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고 엎드리기 시작했다. 끝쪽에 서 있던 캐슬린과 에밀리는 얼떨결에 따라서 엎드렸다.
하지만 공작은 조금도 화가 누그러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캐슬린의 신이 떨어져 있는 곳.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그녀의 앞으로 말이다.
캐슬린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더 땅에 깊이 처박았다.
“하는 수 없지.”
공작은 신만 집어 들고 말했다.
“다 신겨 보는 수밖에.”
“예?”
시녀장이 놀란 소리를 냈다.
“주, 주인님. 어찌 천한 하녀들 가운데서 찾으려 하십니까. 출신이 높은 시녀들 가운데서 먼저 신겨 보심이.”
“네가 감히 내 앞에서 출신을 입에 담느냐?”
시녀장의 입이 닫혔다.
발텐 공작의 친모 역시 황궁에서 일하던 하녀 출신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떠올린 듯했다.
“도련님, 잠시만요!”
유모가 다급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 소식이 그녀에겐 무척이나 충격인 듯했다.
“도련님, 어찌 이러세요?”
당황을 숨긴 채 평온을 가장했지만 불안감이 스며 있었다. 그녀가 공작을 아직도 품 안의 자식으로 생각하고 끼고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기에 캐슬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 했을 텐데. 별관에서 쉬라 하지 않았나.”
“제가 어찌 이런 일에 빠질 수가 있겠어요? 장차 안주인이 탄생할지도 모르는 일인데요.”
부드럽게 말하며 유모가 공작의 손을 토닥였지만 공작은 손을 잡아 뺐다. 유모의 얼굴이 굳었다.
발텐 공작은 전에 없던 태도로 그녀를 등지고 나서서, 맨 앞줄에 선 하녀에게 명령했다.
“너부터 나와서 신을 신어 보아라.”
캐슬린의 심장이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스스로 위안했다. 그녀의 발 크기는 여느 여자들의 평균이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 중에서만 꼽아도 너덧 명은 저와 발 크기가 같았다.
‘추려내긴 쉽지 않을 거야.’
그녀의 예상대로 신이 딱 들어맞는 사람들이 몇 됐다. 그럴 때마다 공작은 몇 마디 질문을 했다. 어느 소속인지, 나이는 몇인지 그런 것들을.
‘목소리를 들으려는 걸까.’
캐슬린은 제 차례가 되자 이를 꽉 물고 앞으로 나가, 시선을 내리깐 채로 신을 신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맞는 편안한 착화감이 야속했다.
“이름이 뭐지?”
앞에서 지켜보던 공작이 물었다. 캐슬린은 조용히 답했다.
“켈리입니다.”
경황이 없었던 어젯밤과 목소리가 달리 들리길 바라며 최대한 침착하게 답했다.
그런데 공작이 이상했다.
캐슬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빛이 사나워졌다. 공작은 갑자기 불쑥 다가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가, 각하!”
캐슬린은 너무 놀라 얼어붙어 버렸다. 가까이서 본 발텐 공작의 입가는 비틀려 있었다.
그믐날 밤하늘처럼 새카만 머리칼에 황가의 상징인 보름달처럼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 화려하고 준수한 외모를 가졌음에도 금방이라도 사냥개처럼 목을 물어뜯을 듯한 냉정한 눈빛에 숨이 막혔다.
“따라와.”
그는 캐슬린의 팔을 놔주며 씹듯이 뱉었다. 그리고 본관으로 향했다.
“쟤야?”
“설마, 켈리가…….”
“세상에.”
파문처럼 경악 어린 목소리가 하녀들 사이에서 퍼졌다.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표독스러운 유모의 눈빛이 전신을 꿰뚫는 작살처럼 느껴져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안 따라가고 뭐 하느냐!”
시녀장이 호통을 쳤다. 캐슬린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공작의 뒤를 따라갔다. 금방이라도 뒷덜미를 채여 매를 맞을 것 같은 공포에 등골이 싸해졌다.
공작과 열 걸음쯤 떨어져 걷는 동안 온 사용인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이 다 제게 쏠렸다. 본관에 다다라 노집사 알스도프와 마주쳤을 때는 경악의 눈빛을 마주해야 했다. 물론 노련한 사용인답게 그는 얼른 기색을 감추었으나, 스물한 해 동안 눈칫밥만 먹고 살았던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응접실로 올라가거라.”
노집사가 평온한 목소리로 일러 주었다. 캐슬린은 높은 층계를 올려다보다 간신히 발을 뗐다. 응접실 문은 열려 있었다.
방 안은 커튼이 쳐져 있는지 어두웠는데,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등 뒤로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주, 주인님!”
문을 거칠게 닫은 발텐 공작이 굳은 얼굴로 빈정거렸다.
“아까와는 말이 다르군.”
칼날 같은 눈빛엔 하룻밤 인연을 향한 아쉬움 따위는 없었다.
“나를 각하라 부르지 않았나?”
“……그건.”
“이 성의 사용인 중 알스도프를 제외하면 각하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평민은 감히 그 호칭을 입에 담을 수 없으니.”
“…….”
“그런데 어젯밤 그 여자는 날 각하라고 불렀지.”
실수였다.
여섯 해 동안 공작저의 하녀로 살았지만, 그 이전 열다섯 해 동안 그녀의 신분은 귀족이었다. 혹독하게 가르침받은 지식은 몸에 배 있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네가 어젯밤 내 침실에 들었어.”
그가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아니라 할 것이냐?”
“죄송……합니다, 주인님.”
여기서 부정해 봤자 소용없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하여 캐슬린은 긍정하되 거짓말을 했다.
“일이 하도 고되어 신세를 고쳐 보려는 욕심에 그리했습니다. 그러나 고귀하신 몸을 더럽혔다는 사실을 깨닫자 견딜 수가 없어 도망쳤습니다. 부디 자비를…….”
“황후가 보냈나?”
“네?”
캐슬린은 제 귀를 의심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마가렛 트리벨리언이 보냈느냐고 물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는 황후께서 보낸 암살자가 아닙니다!”
그제야 공작의 눈빛이 왜 그런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캐슬린은 털썩 주저앉아 외쳤다.
“절대 주인님을 살해할 생각은 없었어요!”
황후는 발텐 공작의 족보상 어머니였다. 다시 말해 황제의 사생아를 제 자식으로 받아들인 법적인 어머니란 뜻이었다.
그녀가 발텐 공작을 싫어하다 못해 저주하여, 그가 소년 시절부터 전장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은 제국민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얗게 질린 캐슬린을 관찰하듯 내려다보던 그가 한참 만에 말했다.
“그래. 네가 암살자라면 어젯밤 당장 내 목을 조르고도 남았겠지.”
공작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신세를 고쳐 보겠다는 네 욕심 때문에 이미 내 목에는 칼이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어.”
“그, 그게 무슨.”
“제안을 하나 하겠다.”
제게 선택권을 주는 것치고는 더없이 살벌한 눈빛이었다. 하룻밤의 여운을 잊지 못해 헤매는 남자의 얼굴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마치 제가 반란군의 수괴라도 되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교수형과 참수형 중 고르라는 걸까…….’
식은땀이 났다.
하지만 그는 허리를 숙여 캐슬린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나와 결혼해 줘야겠다.”
“……네?”
제 귀에도 분명히 멍청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캐슬린은 제 귀를 의심했다.
“다시 말하게 하지 마라.”
짜증이 난 듯한 음성으로 공작은 빠르게 말했다.
“나는 너를 부인으로 맞을 생각이다. 신세를 고치고 싶었다 했으니 거절할 리 없을 테지.”
“아…… 저, 저는.”
황족이자 공작의 지위를 지닌, 고귀한 남자. 게다가 처음 겪었던 어젯밤의 상대였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이 청혼에 설렐 법도 하건만 캐슬린이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 먼저였다.
‘무서워.’
태어나서 쭉 제 몸에 흐르는 귀족의 피를 원망해 왔다. 철저한 계산 아래 감정을 속이고 살며 가족조차 도구로 생각하는 족속들. 그녀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저는 감히 거기까지 바라지 않아요. 이대로 하녀로 살겠습니다.”
“이 방을 나가면 넌 바로 머리채가 잡혀 지하 감옥에 처박힐 것이다.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보느냐?”
“아…….”
저를 찢어 죽일 듯 바라보던 유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유모는 두 달 전 자신이 총애하던 시녀를 괴롭히다 내쫓았다. 찻물의 온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야단을 쳤는데 표정이 불손했다는 이유였다. 그 시녀는 쫓겨난 이후 쥐도 새도 모르게 행방불명됐었다. 하녀들 사이에선 그녀가 뒷골목에서 변을 당했을 거라는 이야기가 알음알음 떠돌았다.
캐슬린이 말을 잇지 못하자 발텐 공작이 응접실을 가로질러 가 의자에 앉았다.
“이제 들을 생각이 생겼나 보군.”
애완견을 부르듯 자연스러운 손짓에 캐슬린은 어쩔 수 없이 따랐다. 그의 맞은편에 앉자 발텐 공작은 무심한 눈빛으로 빠르게 말했다. 금방이라도 이 귀찮은 일을 끝내 버리고 싶다는 듯이.
“공작 부인 자리를 내어 주지. 이 가문의 모든 재산과 대귀족의 권리를 주겠다는 뜻이다. 자연사할 때까지 목숨은 붙어 있을 것이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알스도프에게 일러 무엇이든 가져가라. 하지만 그 이상은 없어.”
“그 이상이라고 하시면…… 제가 가질 수 있는 것이 더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발텐 가문의 재산과 대귀족의 권리라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런데 ‘그 이상’이라니?
“후계자는 낳지 못할 거라는 뜻이다.”
“…….”
“아니, 낳지 않는다는 편이 정확하겠지.”
발텐 공작이 원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제야 캐슬린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 캐슬린은 대답했다.
“정말…… 저를 살려 주실 수 있나요?”
심호흡하며 모아 잡은 손이 떨렸다. 장갑을 끼지 않아 냉기가 느껴졌지만, 아버지의 마수가 뻗치지 않는 공작저에서 오래도록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결심이 굳어졌다.
“내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그럴 것이다.”
너무도 당연히 나온 발텐 공작의 대답에, 캐슬린의 수락은 빨랐다.
“……네. 그러겠어요.”
“만약 어젯밤 일로 아이가 생겼대도 내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보통 여자들이라면 상처받을 말이었겠지만 캐슬린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무슨 뜻이냐는 듯 발텐 공작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캐슬린은 고백했다.
“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니까요.”